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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바래길, 고성 공룡발자국유적지

carmina 2016. 12. 30. 12:49

2016. 12. 26 ~ 12. 27



밤 늦게 서울에 도착해 집으로 가는 전철안에서도 오늘 종일 걸으며 본

남해 바다의 파란 바다가 바람에 일렁이어 마치 바다에 살얼음이 덮인 것같은

장관이 눈에 아른거렸다. 끝없는 변하는 파란 바다의 모습이 늘 좋은 것은

어릴 때 부터 내가 본 바다색깔은 늘 거무튀튀한 서해바다여서일까?

 

다음의 걷기도보여행 카페인 '마음길' 를 통해 나선 남도여행.

올 12월에는 유난히 행사가 많았다.

11월부터 시작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합창을

전공자들 틈에서 아마추어인 내가 객원단원으로 끼어 어려운 독일어 발음과

내 생전 가장 어려운 노래인 바흐 합창음악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위해

연주일인 12월 15일까지 매일 음악에 빠져 살았고

그 와중에 집이 이사를 하는 바람에 12월 내내 매일 이사짐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에 하루를 다 보냈다.

거기에 산타이고를 다녀와서 쓴 책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의

출판기념회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도무지 12월은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보냈다.


집 정리를 대충 해 놓고 문득 내가 이번달에는 한 번도 걷기 여행을 떠난 적이 없어

도보여행 카페를 검색하니 1박 2일 남해 바래길 공지가 올라왔지만 이미

정원이 차서 접수가 끝났지만 그래도 대기자로 올려서라도 떠나고 싶었다.


떠나기 이틀 전에 결원이 생겨 대기가 풀리고 드디어 성공.

날씨를 보니 남쪽 지방에는 비가 연 이틀 예정되어 있기에

'혹시 작년에 보았던 남해 앞바다의 그 옥빛 색깔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남해 바래길은 작년 정초에 친구와 함께 2박 3일로 남해바래길의 아래 지역인

다랭이 지게길, 앵강다숲길, 그리고 구운몽길을 걸었지만

이번에 예정된 길은 남해의 다른 섬에 있는 고성 공룡화석지 길과

화전별곡길을 걷기로 되어 있어 중복되지 않아 기대가 되었다.


지난 밤에 알람을 5시 15분에 맞추어 놓고 자면서 혹시 그 시간에 일어나면

늦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잠을 설치다가 결국 한 시간 마다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느라 아침에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대충 충청도를 지나는 것 같은데 창밖에 비가 내린다.

그것도 주룩 주룩...


남해를 가기 앞서 우선 사천에 내려 이른 점심을 먹었다.

사천은 원래 도시이름이 삼천포였는데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안좋아 도시명을 바꾸었다.

사천에 유명하다는 쭈꾸미전문 식당에 들어가

매운 쭈꾸미를 얇은 피자에 싸 먹는데 쭈꾸미 맛인지

피자맛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피자의 달콤한 맛에

매운 쭈꾸미맛이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비가 내리는 맥전포항에 도착해 모두들 분주하게

우비와 우산으로 중무장을 하고는 등대가 있는 방파제길을 걷는데

배들이 열심히 빠른 속도로  멀리 보이는 등대뒤를 돌아 방파제 안쪽으로

들어 오고 있다.  파도를 피해 들어 오는 것인지 아니면 조업을 마치고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보기에는 모든 배들이 무척 서두르는 듯 보였다.

방파제를 앞 뒤로 가로 막은 거대한 트리포드 덩어리들이 세찬 파도에

떠밀려 나간다 하니 파도의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난다.

그 파도를 견디는 등대는 얼마나 기초를 튼튼히 해 놓았을까?

그리고 등대안에서 그 파도를 보는 등대지기는 얼마나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일까? 누군가 등대지기 노래를 흥얼거렸다.




방파제에서 내려와 상족암공룡길로 향하여 가다가 아무래도 비가 거세

바지단이 젖으면 신발속까지 다 젖을 것 같아 준비했던 겨울용 스패츠를 착용하고

산길로 접어드는 나무계단위로 올랐다.


부드러운 흙길 옆에 누런 고사리가 지천으로 덮여 있다.

이 길은 남해의 고사리밭길의 한 부분이다.

지리산 자락의 고사리보다 더 크게 자란 것 같다.

공룡발자국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나무데크로 되어 있어 비가 와도

걷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해안가를 돌아 구비 구비 길이 이어진다.

우리 일행의 모습들이 빗속에 핀 꽃같이 알록달록하다.




바닷가 돌들은 거칠었다.

파도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뜻이다.

이쪽 바다는 육지와 마주보고 있으니 파도가 그다지 없을 것이다.



나무들이 바다를 향해 세력을 넓혀 가다가 그만 바닷가 절벽앞에서

발을 헛딛어 넘어져 막 쓰러질 듯이 기대어 있다.

긴긴 해안가길을 걷다가 마을이 있는 곳에는 인적은 없고

말리기 위해 빨래 줄어 걸어 놓은 고기들이 비를 맞고 있다.



어떤 부지런한 어부는 그 고기들을 모두 하나 하나 비닐로 덮어 놓았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커다란 부표에는 큰 굴들이 달라 붙어

누군가 어부지리로 굴을 따 먹은 흔적이 보였다.


 

제주도에서 본 주상절리가 이 곳에서도 보였다.

절벽에 돌들이 연필을 세워놓은 것처럼 각을 지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그 앞 바다에는 거대한 돌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표면은 마치

운모조각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 위에 파도에 떠밀려 왔던 작은 불가사리하나가

미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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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밀려왔다가 다시 떠밀려 나가지만 높은 바위가 없어서인지

그다지 큰 물보라는 없었다. 평소 연안관리를 잘하는지 어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쓰레기는 보이지 않아 좋았다. 쓰레기라고 보이는 것은

어차피 바다로 돌아갈 굴 껍데기뿐이었다.




비도 오고 찾는 사람도 거의 없을텐데 아주머니 한 분이 길가에서 바구니에 파래를 담아

팔고 있다가 내 모습을 보더니 차마 사가라는 말씀은 못하시고 그냥 웃고만 계셨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궂은 날에도 이렇게 나와 있는 부모님을 도시에 나가있는

자식들은 알기나 할까?


변산의 채석강 처럼 이 곳의 절벽은 완전히 얇은 돌들이 층층히 쌓여 있는

퇴적암층구조다. 채석강은 책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곳의 바위들은

마치 얇은 합판을 쌓은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화산암이 흘러 내려 쌓였으면

이렇게 될까?





바위들이 있는 절벽이 역 사다리꼴 같이 생겨서 만약 층 하나의 돌을 빼면

절벽이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다.


인근에 청소년 수련원이 있어 아이들의 자주 찾아 오는지 바닷가에 작은 돌을 모아

만든 탑이 많이 세워져 있다.


절벽 해안도로를 따라 만들어진 나무데크를 걸어 절벽동굴을 찾았다.

이 곳에 공룡발자국이 있어 특별히 문화재로 보호하는 곳이다.

작은 섬 하나에 마치 코끼리 바위같은 구멍이 생겼다.




이런 동굴에 들어가면 울림을 체험하기 위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공명을 즐기는 객기를 부렸던 내가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 참았다.

바위 절벽의 윗 부분이 아래쪽 보다 튀어 나와 있어 작은 지진이라도 나면

그 바위가 무너질 것 같다.




바위에 모래알만큼이나 적은 흙의 성분으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굵은 나무들이 벽과 직각으로 자라고 있다. 인간도 이렇게 살리라.




동굴 옆 넓은 바위에 공룡의 발자국들인듯 커다란 원형 흔적이 남아 있다.

커다란 접시 정도의 크기로 볼 때 아주 큰 공룡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순간 지구상에서 사라진 공룡들. 멸종설에 대해서는 각종 이론이 많지만

요즘같은 조류 AI가 창궐하여 전국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

아마 전염병으로 사라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진다.




다시 비오는 애안로를 걷고 반대편 적량해안으로 와 버스를 타고

저녁을 먹어야했으나 이 곳의 식당형편이 우리 같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한

시설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각자 몇 명씩 팀을 이루어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남자들 몇명이 찾아간 식당에서 이 곳의 유명한 메뉴인 멸치쌈밥을 주문했는데

음식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종업원이

밥을 태웠단다. 그래서 만들던 반찬도 중지했다고...


어이가 없어 우린 시간이 급하니 탄 밥이라도 가지고 오라고 해서 먹어보니

비록 조금 탄 냄새는 나지만 먹을 만 했다. 멸치 쌈밥은 멸치를 자글 자글 끓여서

쌈에 싸 먹는 음식인데 만약 생멸치가 있다면 차라리 이런 쌈밥보다는

부산의 기장에서 맛보았던 멸치무침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전 시인 곽재구씨가 쓴 '포구기행'에서 멸치털이 글을 읽고 나는

그 해 근로자의 날 혼자 밤열차를 타고 부산 기장으로 내려가 새벽에 포구에서

멸치에서 떨어진 은빛비늘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바다에 떨어트리며 

멸치털이하는 그 장관을 보고 멸치양념무침을 처음 먹어 본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도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아내와 다시 내려가기도 했었다.


저녁에 남해 편백휴양림에서 남자들끼리 모여 밤늦게까지 여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술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해 하룻밤을 보냈다.




두번째 날.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여니 주차되어 있는 차에는 빗방울이 남아 있지만

다행하게도 비가 그쳤다. 방장이 가져 온 진짬뽕으로 얼큰한 해장을 한 뒤

아침의 찬 바람에 모두 옷을 겹쳐 입고 숲길을 나섰다.

넓은 숲길에 긴 그림자들이 오손 도손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다.




낮은 언덕을 오르느라 모두 두텁게 껴입은 옷이 불편했는지 한꺼풀씩

옷을 벗어 배낭에 넣었지만 곧 언덕을 돌아가니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

집어 넣었던 옷을 다시 껴 입는 해프닝도 있었다.


작은 돌들이 깔린 평탄한 숲길이 걷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단지

산 비탈이 바위들이 굴러 내려 안전에 위협을 줄까봐 리더는 일행에게

비탈과 떨어져 걸으라 해서 우린 모두 기차놀이를 했다.



언덕에 오르니 멀리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그리고 산골짜기 사이로

저 멀리 남해 바다의 파란 빛이 뻗어져 있다. 한려정이라는 하얀 전망대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산 언덕을 올라가 섬의 양쪽으로 바다를 보며 걸으려 했지만

사람들이 안다녀 길이 불편하다고 도로 내려와 편한 길로 내려갔다.



깎아 지른 절벽위에 푸른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다. 모습으로 보아

이 길은 임도인 것 같다. 그래도 산에 저렇게 나무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 세대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다. 만약 가난하게 살았다면 산에

나무들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바위들이 무언가 알수 없는 상형문자들 새겨 넓은 바위면에 새겨

우리에게 말을 전하는듯 하고 나무들은 자신의 푸르름을 바위까지 물들게 했다.





편한 길을 걷는다. 멀리 보이는 건너편 산에 남해의 보리암이 보였다.

어떻게 저런 높은 곳에 절을 세웠을까?




산위에서 멀리 보였던 저수지가까지 내려오니 이 곳이 남해 휴양림임을

알려주는 입간판과 이 곳이 천하마을이라는 비석이 보였다.

일행들이 옹기 종기 모여서 바라보고 있는 어느 집 마당에

예닐곱마리의 작은 강아지들이 옹기 종기 모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길가의 남해바래길 안내도를 보니 우리는 화전별곡길의 중간에 있는

편백휴양림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이 곳까지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화전별곡은 김구선생의 화전(花田)별곡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표현했다해서 이 곳에 그렇게 명명했다.



이 곳에서 다시 버스는 타고 적량으로 가는 도로 중간에 내려

본격적으로 남해 바다를 끼고 송정방향으로 걷는다.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모자를 손으로 잡지 않으면 날라갈 것 같다.

그보다 장관은 바람이 불어 수면을 일렁여서 보이는 모습이

마치 바다에 얇은 살얼음이 덮인 것같이 보여 참 아름다웠다.




동요가 흥얼거려진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가는 배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어제부터 종일 내 입에서는 가곡 가고파의 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힐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가곡 가고파는 노래가 작곡된지 40년만에 마치 영화처럼

가고파 후편이 김동진선생에 의해 작곡되었으나 많이 불려지지는 않지만

난 이 노래를 좋아해 혼자 전후편을 자주 부른다.


차가 한적하게 달리는 도로옆의 안전한 가림막이 있는 보행로를 따라 걷다가

삼거리에서 우측 새로난 길로 가는데 문득 길이 막혀있다.

간신히 숲길을 찾아내 걸었지만 그 길도 유자를 키우는 사유지를 통과해서

가야 했으나 그마저 길이 끊겨 있다. 새로운 도로를 만들면서

바래길 코스를 수정하지 않은 듯 했다.

그 숲길에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작은 동백꽃들이 심어져 있어

모두를 반갑게 했다. 거기에 흰동백나무까지 있어

길이 아닌 길을 찾아가느라 불편했지만 모두의 얼굴엔

꽃과 바다의 아름다움에 웃음뿐이다.





공사중인 언덕길을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올라간  설리전망대에서

그야말로 뺨을 때리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아직 그다지 춥지 않아

아픔은 덜했지만 한겨울 바람부는 날 이 곳에 오면 아마

바닷바람의 매서움을 체험할 것이다.

바람이 그렇게 심하게 불지만 바다의 수면은 큰 파도없이 한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바닷물이 흘러가는 중간에 위치한 작은 섬뒤에는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쪽에서 흘러 온 물들이 서로 자기 길을 찾느라 다투고 있는 듯 하다.

마치 현재의 정치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평온의 바다가 이어진다.

그 바닷가 끝에 강태공 한 명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있다.


해안가 절벽길을 따라 걸어가 송정해변으로 내려오니 시간이 2시경.

아침 9시부터 걸었으니 쉬임없이 많이 걸은 셈이다.


 



점심을 위해 버스를 타고 찾아간 햇살복집에서 색다른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콩나물과 미나리를 넣고 끓인 시원한 복지리탕에 밥은 기름과 김부스러기가 있는

큰 대접에 무초무침과 함께 지리탕에 있는 야채를 넣어 비벼먹는데

맛도 좋지만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일행들은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본 독일마을에 관심이 많아

그 곳을 찾기로 했다.

독일마을은 한국이 어려웠던 60년대 70년대 시절 파독간호원들과 광부들이

나이들어 고향에 돌아와 같이 살고 싶어 만든 마을이다.

건물도 특별히 독일풍으로 지었고 이름도 각자의 주택이나

게스트 하우스, 카페, 식당등을 독일의 유명한 도시들의 이름을 빌렸다.





구에 이곳에 정착한 1세대들의 이름이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고국이 그리웠으면

독일에서의 편안함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을까?

아마 여우도 죽으면 머리를 고향으로 향한다 했듯이 이들도 그렇게

고국땅에서 뼈를 묻고 싶은 것 같다.


나는 독일에 여행도 두 번 가보았지만 출장은 더 많이 가 보았다.

특히 겨울철 크리스마스에는 특별히 크리스마스 마켓이 마을광장에서 만들어져

사람들은 한해의 마지막을 따뜻한 와인인 글뤼바인과 맥주를 마시며

따뜻한 땅콩과 돼지고기로 만든 슈바인학센을 먹으며 즐긴다.

독일 출장을 가면 거래회사 직원들은 우리에게 늘 맥주를 대접했다.

또한 여행차 노래하는 이들끼리 공연을 위해 찾아간 독일여행시

공연 후 뮌헨의 대형맥주집에서 우린 모두 독일맥주집의 멋을 실컷 즐긴 적도 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마신 글뤼바인을 집에서 만들고 싶어 각종 한약재를 사다가

만들어 보았지만 실패했다고 했더니

지금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딸이 언젠가 귀국하면서

글뤼바인을 만들 수 있는 티백을 사다 주어 비슷한 맛을 집에서도 맛볼 수 있었다. 


낮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괴테하우스, 바이로이트, 하이델베르그, 베토벤하우스, 하노버, 베를린...등등.

마을의 주택가를 지나며 혼자 하이델뢰스라인(들장미)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느 해 출장차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으로 가는 가루다 항공편에서

내 옆의 독일할머니가 내게 독일 노래를 아느냐고 묻기에 이 노래를 조금 했더니

노래하는 것을 중지시키더니 지금 여기 이 근처에 앉아 있는 독일사람들이

모두 발리에서 세미나가 있어 가는데 노래를 같이 하자 해서

기내에서 독일노래 합창을 같이 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관광을 오고 있다.

카페에서 여유있게 글뤼바인을 한 잔하고 싶었지만 일행들이 많아 군침만 다셨다.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 그 곳에 오래있지 못하고 모두 해안으로 걸어 내려왔다.

해안가에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해초를 따고 있으니 그 모습을 젊은 커플이

대포같은 카메라로 담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1박 2일 남해여행은 끝이 났다.




올라오는 길에 남해의 4개 섬을 다리로 이은 곳 중 제일 큰 다리를 잠시 구경하고

막힘없는 고속도로를 달려 올라와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잠이 들어있다.


늦은 시간까지 어제 오늘의 감동을 글로 풀어쓰고파서 밤늦게까지 자판을 두들긴다.

내 기억은 나이들면 스러지지만 내 글은 오래 남아 나를 즐거웠던 시절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