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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중간만 한 내 인생

carmina 2022. 8. 6. 21:05

지난 세월을 살면서 지나 온 나의 삶을 돌아 보니

내 인생은 늘 중간 정도의 삶을 살아 온 것 같다.

가장 판단하기 쉬운 방법이 공부다.

초등학교 생활동안 특별히 잘하지도 못하는 성적.

그래서 시험쳐서 들어가는 중학교 입시에 담임 선생님이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인천의 제일 좋은 중학교에 원서를 써 주자니 조금 부족한 것 같고,

차상급의 중학교는 무난할 것 같고...

그래서 결국 선생님은 내게 어차피 시험보는거니 네 몫이다 하고 제일 좋은 중학교에 원서를 써 주셨다.

그러나 보기 좋게 떨어지고...나는 일류의 아류는 아니더라도 후기로 2류 정도의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곳은 거의 나같은 학생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니 그 곳에서도 전체 4개 학급의 학생들 중 뛰어난 성적은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가?

내 성적은 그 중 겨우 25%의 플러스 마이너스 1% 내에 드는 정도였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만약 우수반에 들어가 늘 하위 성적을 유지했었더라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 중 하나는 따라 잡을려고 열심일 수도 있었고, 반대로 포기해서 늘 열등 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차선택의 반을 선택한 것이 잘한 피선택일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거기서는 1등을 놓치지 않을려고 노력했으니까...

 

그러나 우리 학교가 아주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 외에는 서울에 있는 유명대학에 들어간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고, 그래도 내가 입학한 대학교에 많은 고교 친구들이 입학했다.

공과 대학교도 등급이 있었다.

기계 계열이 제일 우수학생이었고, 그 다음 화공계열, 그 다음 건축토목 계열이었으니 이 또한 중간 얼치기였다.

화공계열에는 3개의 세부과로 나뉘어지는데 화공과, 섬유과, 고분자공학과 중에 선택해서 지망하는데 그래도 화공과가 우수 학생이 많았고 다행히 그 범위 안에 내가 들어갈 수 있었다.

2학년부터 시작된 화공과 생활.

그러나 내 관심은 공부보다 외부활동이 많았다.

그렇다고 당시 많은 학생들의 관심이었던 통상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운동권은 전혀 아니었다.

겨우 겨우 학점만 따 놓은 상태였고, 어쩌다가 전공 필수를 이수하지 못해 3학년에 재수강해서 겨우 학점을 받아 놓기도 했다. 화공과의 학생들이 주야간 합쳐서 거의 100명 수준이었는데 내 석차도 중간 정도에서 조금 뒷편에 속하는 정도였다.

그런 지지부진한 수강생활을 하다가 군대 복무를 하면서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다.

인생 처음으로 지식적 탐구 생활을 떠난 군대 생활에서는 내가 나름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군대라는 조직이 전혀 성적순하고는 관련 없는 곳이고 오히려 교육의 환경과 멀었던 사람들이 물만난 듯이 더 열심히 설치는 곳이다. 태권도나 축구, 배구등 신체 운동을 잘하는 사병들이 늘 앞장을 섰고, 상관들로부터 인정받으며 그 들이 앞에 나와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무대가 군대다. 오히려 공부만 하다가 재학 중 입대한 젊은이들이 나약했으며, 그 들은 힘이 있는 상관들로부터 어리버리한 고문관 대우를 받을 만큼 힘든 곳이다.

논산훈련소 수료 후 후반기에 화생방교육 6주를 마치고 최전방의 말단 소총소대로 소총병으로 들어갔다가 부대 내에서 아주 간단한 상식이 필요한 일을 어리숙하게 하는 소대장에게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수학적 이론의 충고 한 마디를 했다가 중대의 본부소대로 발령나고, 다시 또 어떤 계기가 되어 후방인 내 고향 인천의 부평의 신설 화학부대로 차출되어 군생활을 마쳤다. 그 곳에서 다시 일반 중대원으로 들어갔지만 그 곳에 모인 사병들은 대학교 재학 중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많은 부분에 공감할 수 있었다.

군대생활 동안 내무반원들이 주로 대학생들이라 틈날 때마다 공부하기에 나도 덩달아 시작한 일본어와 전역 후 복학하기 전부터 시작한 영어회화는 내 인생에 신의 한수였다. 그로 인해 대학 4년동안의 지지부진한 성적보다 내 외국어실력과 대학시절 여러 사회활동을 인정받아 학점이 높은 동급생들을 제치고 국내 최고 수준의 회사에 입사했다.

새로 시작된 인생은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을 졸업한 수재들이 일하는 곳이었지만 내가 그 들보다 더 잘할 수 있던 것은 영어와 일본어 회화였으며, 내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인성이었다.

그토록 내 열정을 바쳐 일을 했지만 그 회사는 아쉽게도 몇 년 안되어 중동 전쟁으로 인해 그 지역에 수행 중인 프로젝트의 수금이 부진해 사업을 접고, 직원들은 다른 회사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다른회사로 가더라도 내 평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아마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입사 후 2년 반동안 그 들의 본 나의 능력과 일에 대한 열정과 믿음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이라는 곳. 그 곳은 열심히 암기한 자들이 인정받는 곳이 아니었다. 대신 여러 번을 반복하고 꼼꼼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한 곳이었다. 즉 Know-how 보다 Know-where가 더 업무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첫 직장부터 어수선하게 되어 있는 서류들을 나름대로 정리를 잘하니 업무에 도움이 되었듯이 그런 습관이 능력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곳이었다. 즉, 학창 시절때처럼 나 혼자만이 잘하는 것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도록 만드는 것이 더 유능함을 인정받는 사회였다. 그러나 간혹 아주 월등한 직원들은 학창시절처럼 초고속으로 승진하기도 했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다. 나는 그럴만한 위인은 못되었다.

몇 번의 직장생활도 전세계적으로 유가하락으로 불어닥친 경제불황에는 내 자리가 설 곳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용노동부에서 내 이름을 본 직원이 겨우 서너명 되는 작은 업체에서 내게 부탁을 해서 몇 달 간 그 회사를 다녔지만, 직원들 급여를 미루는 나이 든 사장의 횡포에 그만두었다.

이후 그 어디에도 내가 하던 업종은 추가 인원이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생전 처음 손을 대 본 자영업.

크게 욕심내지 않았다. 불황을 타지 않고 모든 사무실에서 매일 필요한 소모품을 공급하는 작은 사업은 큰 사업자금을 들이지 않고 모든 손님들에게 내 성실함이 인정받는 덕택으로 7년을 버틸 수 있었다.

세계 경제상황은 다시 좋아져 들어 간 대기업. 이미 나이가 들대로 들었고, 진급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내 상관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나이 든 내게 배려를 잘 해 주었다.

최고 일류 회사에서 패기가 가득한 젊은 직원들 틈에서 겨우 겨우 버텨내고 그 곳에서 정년을 지나고도 몇 년을 근무한 덕분에 내 노후자금을 마련하는 기회도 만들었다. 다시 세계 경제가 어려워져 대규모 감원에는 나같이 덤으로 일하는 직원들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눈여겨 본 다른 직원이 먼저 이직한 회사에서 퇴직한 나를 불러 그 곳에서도 몇 년 정도 일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의 직장생활동안 경쟁을 통해서 정식 입사를 한 것은 맨 첫 직장 뿐이었다.

퇴직하여 이제는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리라 믿고 이것 저것 내 재능을 이용할 수 있는 프리랜서 일을 찾았지만 나는 그렇게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못했다. 남들은 여행이나 강사등을 주업으로 삼기도 했지만, 나는 그다지 특출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같은 인맥이 많을 것 같은 사람들을 모아 보험업에 투입하는 것이 보험사의 전략인듯, 온갖 감언이설에 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에 소일삼아 들어간 국내 최대의 보험회사. 실은 이 회사보다 먼저 나를 콘택트한 보험회사도 있었다. 그곳은 집에서 지내느니 밖에 다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들어가, 가족들의 보험가입만 몇개 하고 내 적성이 아닌 것 같아 대충 영업하던 중, 인천 남동의 작은 중소기업에서 임원으로 와서 고문식으로 일을 해 달라 해서 또 출근.

이미 나이가 들었으니 나는 단지 그 들이 필요한 일만 2년동안 해 주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직장을 다니기는 내 힘에 부쳤다.

여기까지 중간 정도에서 겨우 겨우 버텼던 내 직장생활이 끝났다.

이제는 더 이상 고용노동부에서 추천하는 업체가 있어도 응시하지 않았다.

단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여기 저기 입사지원만 할 뿐이다.

그리고 굳이 내가 월급만큼 벌지 않아도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소소한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평생 즐겨하던 여행을 하고, 그 글을 내 블로그에 올린것 뿐인데

이제는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여행비가 지원되는 여행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또한 이제까지 관심가지지 않았던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블로거에도 응시하여

인천과 부천의 두 곳에 블로거로 선택되어 용돈 정도의 수입이 정기적으로 있고

여행작가협회에서 주선하는 지방여행을 다녀도 모든 여행경비가 지원되니

이 또한 꿩먹고 알먹기다.

가끔 여행강의를 맡아 수입도 생기니, 적어도 내가 굳이 여행지를 선택하지 않아도

자주 여행가는 일이 생겼다.

단지 건강만 지속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