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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간의 My Home 변천사

carmina 2022. 9. 4. 22:43

60년 넘게 살면서 60년동안 내 집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직 한번도 생각해 본것을 쓸려니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것을 부모님이나 형님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아주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밖에 기억이 없으니

내가 장가가기 전까지 살던 집에서 태어난 것이 맞는 것 같다.

1. 고향집 (50년대 ~ 80년대 초)

인천의 동구 화수동 130번지. 초가집이었다.

삐거덕 거리는 검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아궁이가 있는 작은 사랑방, 전면에는 안방이지만 부엌은 없었다.

그 앞에 커다란 광(창고)이 있어 나무나 톱밥등을 쌓아 두었고

그 왼쪽에 작은 문을 지나면 개울 옆에 변소(화장실)가 있었다.

그 반대편에도 대문같은 문이 달린 곳을 넘어서야 우리 집의

고운 찰흙이 깔린 마당 옆에 검고 커다란 무쇠솥과 일반 솥이 두개 걸려 있었다.

무쇠솥은 당연히 나무를 때고 일반 솥은 연탄을 이용했다.

당시에는 넓다고 생각했던 마루의 양쪽으로 안방, 건넌방 그리고 뒤에는 텃밭이 있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어 여름이면 빨간 고추장 독안으로 풍뎅이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60년대 말, 언덕 동네 위로 소방도로가 우리 집 옆으로 생긴다며

집터의 반을 도로로 내어줘야 했다.

식구는 많은데 집터의 반을 내줘야 하니 아버님은 당시에 획기적인 생각으로

보상받은 땅값을 이용하여 집을 다 헐고 새로 이층 양옥집을 건축하셨다.

당시 우리 달동네에서 처음 건축한 양옥집이었다.

그 때 우리 집터를 처음 파헤치니 그 아래 수없이 많은 조개껍질이 나왔다.

우리 집터는 1882년 미국상선이 바로 이 곳에 배를 닿고 한미 통상조약을 맺은 곳으로

100년뒤인 1982년에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우고 우리 집 위에 있는

허름한 집들을 모두 철거하여 당시 외침으로부터 한양을 방어하던 전초 기지라 하여

'화도진'이라는 이름으로 병영의 옛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아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니까 100년전에는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정박했으며

어부들이 잡은 조개들을 까서 껍질들을 버리던 곳이었다.

그 곳에서 청년때까지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직장을 다녔는데 그만 내가 3개월만에 병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3달 뒤 집에 오니 이번엔 어머님이 쓰러지셨다.

나도 환자지만 어머님이 보살펴 주실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부천에 사시는 둘째형님네 집에서 거주하며 직장생활을 하다가 해외현장으로 나가 1년 근무하고 돌아 와서도 몸이 불편하신 어머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2. 신혼집

해외현장에서 1년 정도 생활하니 커다란 몫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현장에서 돌아와 본사 근무를 하면서 집을 나와 또 형님댁에 살다가 결혼을 앞두고 그간 월급과 해외현장에서 번돈을 합한 750만원 정도 중에서

결혼 비용 50만원만 남기고 모두 털어 부천에 5층짜리 서민 주공아파트를 전세얻어 들어갔고

결혼 비용은 축의금과 카드로 충당한 후 그 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당시 한달 월급이 30만원 정도였다.

아내도 직장을 가지고 있던 터이고 나도 주말이면 부모님께 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부천이라는 위치가 가운데 지점이라 이견은 없었다.

사진은 70년대 잠실 주공아파트 단지 (부동산 블로그에서 퍼움)

아파트였지만 부엌에서 연탄불로 취사와 난방을 하는 구조인데 우린 맞벌이하는 부부라 저녁에 같이 퇴근하면 불이 꺼지는 때가 많아

추운 집에서 곤로를 이용하여 저녁을 해 먹고 두터운 옷을 입고 방이 따뜻해 질 때까지 견뎌야만 했었다.

3. 서울입성

결혼 후 2달 뒤 내가 또 다시 사우디 현장으로 나가 1년넘게 체류하다 오니 아내는

처갓집과 직장이 있는 서울 구로구 시흥동에 작은 연립주택 하나 얻어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몇년 뒤 세들어 살던 그 집을 집주인이 빚때문에 경매를 내놓겠다는 것을 우여곡절끝에 주인에게 돈도 일부 떼이며 우리가 매입하니 처음으로 내 명의로 된 집은 보잘것 없는 작은 집이었다. 그래도 결혼 2년만에 마이홈은 참 기록적인 인생의 사건이었다.

어쨋든 그 곳에서 아기하나를 더 낳고 살기를 몇 년.

처갓집이 가까이 있어 맞벌이하는 우리에게는 편했다.

아내도 경영하는 피아노 학원에서 제법 수입이 많아 때로는 나보다 더 벌기도 했다.

집은 작았다.겨우 최소한의 살림만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애가 둘이나 되고 커가다 보니 넓은 주택을 고민해야 했다.

4. 중동 신도시로 Go Go

새집을 사야겠다고 주택청약적금을 들어 놓았지만 경제적인 가격에 우리 살림에

적당한 30평대 집은 늘 청약 순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동시분양하는 수도권의 5개 신도시인 부천 중동, 일산, 과천 분당, 안양 평촌과 산본 중에서 그 중 부천 중동에 청약 순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큰 평수를 약 1억이라는 분양가로 살 수 있었다.

4개월마다 한 번씩 중도금을 넣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자금이 부족하니 몇 개 은행에 적금을 넣고 신용 대출을 받느라 점심시간이면 밥을 일찍 먹고 회사 근처의 은행들을 재빨리 뛰어다니며 순례해야만 했다.

기록을 보면 당시 약 10개 이상의 은행과 거래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매번 4개월마다 중도금을 납입하고는 우리 집이 어느 정도 공사가 진척되었나 하고 마이홈에 대한 부푼 꿈으로

일부러 차로 진입하기 어려운 공사현장가까이에 와서 보곤 했었다.

어렵사리 중도금을 완납하고 커다란 아파트에 입주하니 그제서야 마이홈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신혼 때 장만했던 많은 가구들과 물품들을 다 버리고 1992년 해외현장가느라 떠난 지 7년만에 부천에 새 아파트를 사서 다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한것인가?

좁은 집에 살다가 실제 평수로는 거의 3배가까운 크기의 집에 오니 저택같았다.

비교적 다른 층보다 저렴한 맨 꼭대기층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하게도 도로 옆인데도 불구하고 소음이 적었으며 여름에도 높은 층이라 통풍이 잘 되어 에어컨없이도 시원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곳에 넓은 거실이 있고 방이 4개나 되어 방 하나를 내가 평생 가지고 싶었던 음악실로 만들어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다만 교회를 처가쪽으로 다니다 보니 매 주일마다 먼저 살던 동네로 다녀야 했다.

그러나 오래 살다보니 공사가 부실했는지 안방의 천정에서 비가 새서 곰팡이가 슬고

때로는 비가 창문으로 들이쳐서 벽이 누렇게 변하기도 했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가 가끔 고장이 나서 불편을 겪기도 하고 지하 주차장에 여유도 많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까운 곳에 대형 쇼핑몰 몇 개와 큰 백화점 몇개가 들어서고

집 앞에 전철이 생긴다는 기대감으로 집 값은 처음 분양할 때보다 약 8배까지 치솟고 있었다.

4. 주상복합아파트의 시대

그렇게 살다보니 몇 년 뒤 사람들의 주거의 패턴이 달라졌다.

이젠 보통 아파트가 아닌 내부 시설이 좋은 주상복합아파트를 선호하는 시대가 왔고

마침 우리 집 근처에 공터에 대규모 주상복합 건물들이 들어선다며 청약을 시작했는데 무려 3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로 아내가 몇 구좌를 신청했건만 모두 탈락되어 아쉬워하기도 했다.

2007년 11개동 35층규모의 주상복합아파트가 완공되고 입주가 시작되었으나 몇 년 전 광풍같던 청약열풍으로 주택가격이 반드시 껑충 뛸 것으로 예상했던 소유주들이 몇 채씩 사 놓은 것들을 제 값도 건지지 못하고 팔아 버리니 분양가격이 30%나 하락하는 것을 보고 아내는 기어코 그중 하나를 사서 당장 현금이 없으니 전세를 주었다.

그 때 쯤 우리 아파트도 가격이 많이 올라 새로 구입한 주상복합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만큼 되어 아내는 살던 집이 팔리고 새집들어가면 내게 외제차를 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상하게 그 때부터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도 없고 주위에 매물이 무척 많아졌다.

 

당시 1가구 2주택자에 중과세를 한다고 시한을 두고 처분하지 않으면 중과세를 매긴다 하여 너도 나도 집을 내놓고 빨리 처분하고자 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대부분 사람들도 역시 살던 집을 부동산업체에 내 놓았기에 꼭대기 층이라는 불리한 조건의 우리 집은 난감한 처지에 빠져 버렸다.

집값은 뚝뚝 떨어지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만 겨우 겨우 싸게 산 주상복합아파트 금액까지

내려가는 수준에 이르러 조바심이 났다. 이러다 추가 금액이 많이 필요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 나날을 지내는데 정말 드라마틱한 사연으로 그 많은 집들가운에 조건이 안좋은 우리 집만 팔리고

등기를 마치니 정부가 정한 시한에 불과 며칠 전에 1가구 1주택자가 되어 중과세를 피해갔다.

이제 두번째 마이 홈이 생겼다.

창문은 통유리로 바로 앞에 도로가 있고 전철역도 가까와 최적의 조건이라

아내는 너무 행복해 하였다.

이 집은 한 층에 5가구가 있는데 우리 집은 사면이 다른 이웃집과 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집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음악을 하고 연주를 하는 우리집에게는

딱 적당한 구조의 집이었다.

맞벌이하는 우리들에게 아파트 보안절차도 안심했고 화장실이 두개나 되었다.

아내는 이 부부를 위한 화장실이 별개로 있는 것에 감동을 했다.

비록 방은 3개이지만 방 하나를 슬라이딩 도어로 두개로 나눌 수 있게 되어있어

내 공간인 음악실로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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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이라면 집이 도로옆에 있어 창문을 열면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특히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밤새 폭주족들의 소리로 노이로제까지 생기기도 했다.

단지 주상복합이다보니 욕실에 욕조가 없었고, 잡동사니들을 넣어 둘 공간이 부족했다.

이 새집에 들어오면서 아내는 고급주택에 맞는 가구들을 새로 구입한다고 여기 저기 참 많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내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5. 초고층 아파트 시대

집 근처에 66층 쌍둥이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것도 완공 후 분양이 안된다하여

잔여물량을 분양가의 30%에 판다하니 아내는 기어코 살고 있는 우리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그 곳에도 집을 하나 사서 월세로 놓았다. 살던 집의 가치가 좀 더 올라갔으면 여유있게 입주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함이 아쉬웠다.

과거의 전세로 Rent 하는 시스템이 은행이자가 턱없이 떨어지니

전세는 이제 월세로 바뀌는 추세라 대출받은 이자는 월세로 받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직장이 대기업이라 신용이 좋아 대출도 쉬웠다.

또한 직장인들끼리 맞보증하여 1000만원 정도 대출을 받는 것도 가능했다.

초고층아파트에 살고 싶은 아내는 우리가 살던 집을 월세로 놓고 그곳으로 이사했다.

비록 낮은 층에 살고 있지만 주부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과 입주민들을 위한

공동시설들이 많아 생활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남산타워가 보이고 인천의 앞바다 그리고 멀리

김포공항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장면도 보기 좋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여의도의 회사 빌딩 옥상에서 우리 집이 보이기도 했다.

지방출장차 비행기편으로 지방을 갓다가 돌아올 때도 우리 집이 가장 선명하게 보였다.

집안 내부의 시설들이 유럽형으로 되어 있어 아내는 무척 만족해했다.

욕조도 유럽같은 스타일이라 아내는 가끔 어머니를 모셔 와 목욕을 시켜드리며

우리 집에 지내는 즐거운 시간을 고마워했다.

또한 아내와 아들은 빌트인으로 되어 있는 지멘스 브랜드의 커피머신에 혹 빠져버렸다.

아파트의 꼭대기층에는 게스트룸이 있어 아내는 대학 친구들이나 합창단 친구들을 단체로 초청해

1박2일로 즐기기도 하고, 단지 내 대형 세탁기가 있어 웬만한 큰 빨래들은 모두

코인세탁기를 이용했다. 또한 그 앞에 청계천같이 만든 심곡천이 생겨 주택의 가치는 더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이 아파트에서 생전 처음 음악을 하는 좋은 이웃을 만나기도 했다.

내 꿈이었던 이웃과 식사를 같이하고 반찬을 나누어 먹으며

저녁이면 노래하고 와인을 같이하는 시간들이 내겐 참 귀한 행복이었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같이 노래하며 지내는 꿈같은 시간도 가졌다.

집이 좋아 사람들도 많이 초대하여 즐기고, 여름에는 아파트 내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아파트도 이웃집과 벽을 공유하지 않으니 여러모로 편했다.

도로 안쪽으로 있어 거리의 소음도 많지 않았고 내 차가 어디 주차되어 있는지

집안에서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이라 최적의 주거조건이었다.

또한 아파트 관리비도 이전 살던 주상복합아파트보다 현저하게 저렴했다.

집이 좋다보니 복덕방에서 집을 세 놓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많이 와 아내는 갈등했다.

마침 세 놓은 아파트의 입주자가 자꾸 월세가 연체된다는 핑계로 아내는

우리가 그 집으로 다시 이사가고 비교적 임대료가 높은 초고층아파트는 다른 사람에게 월세로 임대했다.

그리고 먼저 살던 그 집에서 정년퇴임을 했고 지금 그 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내나이 60대 중반 앞으로 또 이사할 기회가 있을까?

아마 아이들 모두 결혼시키고 나면 이 집에서 비싼 관리비 내고 사는 일은 없을테니

또 한 번의 이사를 가야하는데 이제는 규모를 축소해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