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여기저기 코스

영덕 블루로드 여행기

carmina 2011. 4. 30. 22:16

 

 

영덕 블루로드 (2011. 4. 25 ~ 4.26)

내가 하루에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요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 대한 여행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까미노 800키로를 40일동안 걷기 위해 어떠한 능력이 필요한가?
 
하루 평균 20키로.  평탄한 길이라면야 상관없겠지만, 산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그래도 시도는 해 보자.
 
그런 관심으로 샌드위치데이에 휴가를 하루 내고 찾아간 영덕 블루로드.
당초 포항의 해파랑길을 검색하다가 아무래도 돌아오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영덕코스로 바꾼게 제대로 선택한 코스로 되었다.
 
이미 대게축제가 지나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고,
주일 저녁에 영덕에 도착해 월요일 화요일 꼬박 걸으면 무사히 화요일 저녁이면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블루로드는 전체 A, B, C의 3개코스로 총 50키로이고 매 코스마다
약 17키로를 6시간동안 걷는 여정이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하루는 30키로를 걷고 둘쨋날은 20키로를 걸어야 한다.
 
그렇게 일정을 잡고 부활절 주일 저녁,
예배마치고 승용차안에서 여행옷으로 갈아입고
먼 영덕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출발.
 안동을 거쳐 쉬임없이 어둠에 묻혀 달려간 4시간 반.
 
한 밤중 11시경에 터미날에 도착하여 출발점인 강구항으로 택시를 타고 찾아갔으니
영덕행 버스가 휴게소에 들르지 않아 저녁요기를 못해 배가 고프다.
 
숙소도 문을 닫은 곳들이 있어 몇 군데 찾다가 겨우 한군데 발견.
그것도 문 앞에 붙인 전화로 주인을 호출해야만 했다.
일요일 저녁 그것도 늦은 밤이라 거의 철시한 상가들을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저녁거리를 찾았지만 가끔 손님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치킨집들 뿐,
그러나 우연히 물회를 파는 집이 불을 켜고 있어 평소에도 즐겨하던 물회에 폭 빠져 버렸다.
 
아침 일찍 신발끈을 굳게 매고 출발.
환한 거리로 나오니 강구항의 재미있는 모습들이 펼쳐진다.
영덕의 상징물인 영덕대게가 마치 외계인처럼 작은 마을을 휘감고 있다.
거대한 대게의 모습들이 식당들 간판대신 자리잡고 있고
빌딩의 한 구석을 와전히 대게의 다리 하나로 커다란 장식물을 만들어 놓은 집도 있다.
 
관광을 왔다면 여기 저기 그런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내 목적은 걷기 위한 것이라 우선 블루로드 시작점을 확인해 주는
‘대게종가’라는 이름의 식당에 들어가 이름을 적고 블루로드 지도와 여권을 챙긴다.
 
이제 서서히 잠을 깨는 조용한 도시마을을 지나
블루로드 이정표가 알려주는대로 교회옆으로 난 길을 따라
처음 목표인 고불봉으로 향하는 산길로 올라간다. 
산길에도 여기 저기 대게의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다.
 
가파른 언덕길. 아직 발이 안 풀려서인지 작은 언덕인데도 가뿐 숨을 몰아 쉰다.
그러나 곧 언덕위의 평평한 길이 이어지고 눈 아래로 펼쳐지는 강구항 마을. 
 작은 마을에 바다가 깊숙히 들어와 있고,
오래된 듯한 다리와 새로 지은 듯한 현대식의 다리가
급하게 변해가는 마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고불봉까지는 7.4키로로 표시되어 있다. 상당히 먼거리다.
대충 산세를 보건대 그다지 험하지 않고 높지 않은 산이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니 편하게 갈만한 코스는 아닌 것 같다.
 
급한 경사길마다 버팀목으로 잘 다듬어 놓았다.
양 옆으로 고불 고불거리며 자란 소나무들이 자연미가 물씬 풍긴다.
이 곳에서는 작은 동산일텐데 산책코스로 인기일 것 같다.
 
길을 천천히 가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앞서가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배가 고파 벤치에 앉아 싸가지고 온 초코파이와 물로 아침을 때우는데
아까 내가 지나쳤던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가던 할아버지가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간다.
 
이 코스에서 유난히 눈에 자주 뜨이는 것은 길가에 떨어진 수많은 솔방울들.
여느 소나무밭을 가도 이렇게 솔방울이 많이 떨어진 것을 볼 수 없었는데
이 곳에선 유난히 솔방울이 많다.
 
소나무 숲이 너무 좋아 자꾸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댄다.
캠코더도 가지고 갔지만 아무래도 캠코더 보다는 카메라가 좋을 것 같아 진즉 포기해 버렸다.
 
삼림욕으로 적당한 코스라고나 할까..
소나무에서 뿜어내는 피토치드의 향긋한 숲내음이
아침부터 코로 들어오니 발걸음도 가볍고 기분도 더 상쾌하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파란 동해바다,
여유롭고 한적한 항구와 멋진 다리. 도무지 내 입에서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일부러 먼 곳까지 떠나온 나그네가 보람을 느낀다.
 
낮은 언덕길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길을 가는데...
어 이것봐라?  더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도로 때문에 나그네 발걸음이 끊이지 않도록
겨우 사람 한 두명이 지나갈 수 있는 예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산을 깍아 길을 만들 때 동물의 이동을 위해 다리를 놓는 것은 자주 보는데
사람을 위해 이렇게 간이 다리를 만들어 놓는 것도 보기 좋다.
 
다리 건너편 작은 공간에서는 벌통을 가득 쌓아놓고 관리하고 있다.
저 벌들이 혹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워낙 소나무 길이 좋다보니 시간 가는줄 모르고 걷는데
앞에서 마주 오던 이가 하는 이야기가 던져 주는 말.
'고불봉 너무 멀어요. 새벽 5시 반에 나왔는데 이제야 돌아갑니다.'   
하긴 1시간 반 정도를 걸어왔는데 이정표는 이제야 반정도 왔음을 알려준다. 
이정표가 '힘들면 강구항으로 돌아가' 라고 놀리는 것 같다.
 
싸리꽃으로 보이는 하얀 꽃잎의 나무와, 철쭉과, 작은 제비꽃,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핑크빛의 꽃나무들..
 
유난히 긴 겨울을 지내고 나온 녀석들이라
여느 해 보다 색깔이 더 진해진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아마 측은지심일 것이다.
 
거기다 군데 군데 소나무의 밑둥이 시커멓게 불타있는 것을 보면,
근간에 이 곳에 산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아픈 상처를 입었는데 여전히 봄이면
자신의 살을 찢어 잎을 내미는 걸 보면 이 보다 더 깊은 모성본능은 자연계에 없어 보인다. 
 
소나무 숲속 한가운데 넓은 평상이 있어 그 자리에 편히 누워 낮잠을 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대로 한숨 자다갈까?
 
쭉 쭉 뻗은 소나무가 너무 아름다워 스마트폰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려 놓았다.
 
소나무숲이 사라질 때마다 보이는 시원한 동해 바다
그리고 앞길에는 멀리 고불봉이 보인다.
그야말로 고불 고불 돌아가는 길이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대충 보아도 언덕을 몇 개 넘어야 한다.
 
오늘 원거리만 걱정하는 편한 여행 좀 할려 했더니
이런 작은 산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래도 좋다.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자주 있겠냐..
 
언덕길에 계단으로 만든 오래된 통나무 밑에
작은 제비꽃이 나무와 흙을 비집고 자라고 있다.
칡나무 등걸이 나무를 휘휘 휘어감으며 버티고 있고.. 
정말 끈질긴 자연의 생명력이다.

정말 다행인 것인 이 곳에선 다른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계의 깡패 가시박이 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순간 나를 섬뜩하게 하는 노란 경고글씨. '멧돼지 출몰지역'
아.. 산악지팡이를 가지고 올걸. 그거라도 있으면 안심될텐데..
그 시간부터 나는 멧돼지가 오면 도망갈 나무를 유의깊게 보며 걷는다.
 
그런데 앞에서 마주오던 4명의 여자들이 갑자기 화들짝 놀란다.
방금 자기들 앞으로 뱀이 지나갔다고..
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떤다.
 
시야가 확 트일 때 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조형물.
풍력발전을 위한 거대한 바람개비.
이 곳이 블루로드라 했을 때 단지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이라 해서
블루로드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푸른 바다외에도 해송들이 즐비하고,
블루에너지인 풍력발전의 3박자가 잘 맞아 블루로드라 하나 보다.
 
고불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잠시 주춤.
고불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게 보이고
풍력발전소로 가는 길은 우회해서 가게 되어 있어 발걸음을 잠시 주저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가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정말 깔딱고개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정도로 아주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행주치마같은 옷에 무언가를 잔뜩 싸 들고 오고 있다. 
주머니를 열어 보여 주는데 봄나물이 가득하다.
 
고불봉에 올라가니 몇 개의 운동기구가 있고 
오른 편으로는 멀리 거대한 풍력발전, 왼편으로는 작은 동네가 저 멀리 보인다.
 
이 곳은 저 아래 동네 어른들의 좋은 산책코스일 것 같다.
 
이제 오전 A 코스의 겨우 반을 온 셈이다.
그런데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었다.
다른 이들이 써 놓은 여행기에는 A코스가 끝나는 해맞이 공원까지는
점심 먹을 곳이 없다하니 급히 서둘러야 한다.
 
아침도 변변찮게 먹었는데..점심이나 잘 먹어야지..
 
시장기에 발길을 재촉한다.
 
산의 7부 능선쯤으로 난 길을 따라 길게 구비 구비 돌아서
멀리 산너머 아득히 풍력발전소 쪽으로 걸어간다. 
산을 내려와 한적한 도로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바로 앞에 폐차장쪽으로 이정표를 따라간다.
아직도 쓸만해 보이는 차들이 버려져 있다.
소비도 미덕이라 하지만 때론 우리 국민들의 차량 교체 주기가 너무 빨라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차는 10년 이상을 타야 한다고 강조한다.
 
폐차장에서 걷기 불편한 아스팔트 고개길을 따라 주욱 따라가니
폐기물재생처리장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뜨거운 물 좀 구걸하니,
일하는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며, 커피도 한 잔 하고 가란다.
고마운 분들.  마호병에 뜨거운 물 가득 채우니
이제 아스팔트길이 곧 끝난다고 알려주며 배웅해 준다.
 
폐기물 재생처리하는 곳이 이제 막 만들어진 곳인지
거대한 공간에 이제 조금 쌓인 폐기물들을 일꾼들이 정리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불길. 가끔 나물을 캐는 할머니 무리들이 지나가고,
때론 자가용으로 나물캐기 위해 이동하는 아줌마들도 보인다.
오가는 사람 없는 한적한 길이 좋다.
그 길에서 발견한 500원짜리 동전 하나.
흠. 이건 내 저금통용이다. 내 책상에 저금통 하나 있는데
어쩌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10원짜리와 50원짜리는 거의 모두 이곳으로 들어가
연말에 자선기금으로 낸다. 이런 횡재도 역시 그곳으로 보내어진다.
 
아득히 보이던 바람개비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크기가 어마 어마하다.
평지를 걷는 것도 힘이 들때 쯤 정자 하나가 보이는 것으로보아
이 것도 나같은 나그네들을 위해 지어놓은 것인가 보다.
며칠 전 삼발이에 카메라를 놓고 셀카 찍을려 하니 잘 안된다.
마침 지나가는 나물캐는 아주머니에게 사진 한 장 부탁드렸다.
 
거대한 바람개비가 모여있는 곳 가운데로 들어가니 주변을 제법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디자인 감각이 있는 벤치들과 나무들 사이에 흰 밧줄로 경계를 만들어 여러가지 다른 화초를 심고,
쉴 수 있는 의자도 많고 멀리 보이는 곳에는 단체 여행객들이
쉴 수 있는 커다란 정자도 보인다.
 
이런 시설물들은 자칫 주민들이나 환경단체들과의 마찰을 없애기 위해
주변 시설물에 대해 특히 신경을 쓴다.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소리가 날카롭고 크다.
그런데 어느 멈추어 서 있는 바람개비의 꼭대기에 사람이 한 명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는 두려움이 얼마나 클까?
물론 안전장치야 있겠지만 금방이라고 바람이 불면
떨어질 것 같은 고소공포가 올라 가 있는 사람보다 보는 내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그렇게 이정표를 따라가다가 그만 넓은 곳에 나오니 갑자기 방향을 잃었다.
오른 편에 해맞이캠핑장으로 가는 길이 있고 전방은 황량한 언덕. 
어디로 가야하나?  이럴 때는 전화로 물어보는게 최고다.
영덕군청에 물어보니 직진하란다.
혹시 이 근처에 식당이 있느냐 물어보니 조그만 가면 휴게소에서
먹을 것을 팔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준다. 고마와라. 
 
그 황량한 비포장 도로끝에 바로 아주 잘 지어진 풍력발전관리 사무소가 있고
그 아래 바람개비라는 휴게소빌딩 이층에 입맛을 다실만한 메뉴가 적혀있다.
칼국수, 오뎅, 냉면, 떡볶이.  냉면만 빼고 다 먹어야지.
아..너무 배고파..
아침도 초코파이로 때웠고 지금 시간도 거의 2시가 다 되어가니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날만하다.
 
바람개비가 끝나는 곳에 발전소 관리건물이 있어 발전현황을 알려준다. 
총 24개의 바람개비와 높이 80미터. 그리고 발전용량 약 4만키로와트.  
이 정도면 2만명의 인구가 년간 사용할 수 있다 한다.
영덕군 인구가 얼마나 될까? 
 
휴게소 일층에 기념품과 과자 파는 곳을 지나 2층 식당으로 올라가니 문이 닫혀있다.
어? 이런..  아래로 내려와 점원에게 물어보니 평일엔 손님이 없어 영업 안한단다. 
이 곳 풍력발전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오는데 식사하는 이는 없어 보인다.
 
배가 고프니 어쩌나..  얼마나 더 가야 식당이 있느냐 물어보니
한 30분 내려가면 하나 있다 한다. 못 참겠어.
 
먹을 것을 물어보니 컵라면, 핫도그 그리고 어묵이 있다.
컵라면 큰걸로 주고 어묵도 주소. 배가 고픈데 우선 아무거라도 배를 채워야겠다.
 
이 곳에 야간에 별을 보는 산책 행사도 있는지 주변에 깨끗하게 만들어진 시설이 많다.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교회버스로 보이는 대형버스 중형버스들이 도착하고
계속 노인들을 차에서 즐거운 얼굴로 빠져 나온다.
 
언덕 아래로 향하는 세멘트길을 조금 가니 오른편 숲속 길로 표시가 나있다.
그 아래 들어서는 순간 양 옆에 화려한 꽃나무가 꽃을 활짝 피운 채 도열하고 있다.
이게 무슨 꽃이냐. 매실같이 생겼는데 색깔이 무척 진하다.
검색해보니 홍매실. 이렇게 화려할 수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어 둔 버팀목이 거의 썩은 수준이다.
얼마나 오래 된 길이기에 이렇게 버팀목을 받쳐주는 철사만 남았을까?

원래 도로의 굽은 길에서 승용차를 위해 있어야 할 야광용 화살표가 이런
산속의 사람다니는 길에 세워놓은 걸 보아 이것도 트레킹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다.
거기에 태양열을 이용하여 밤에도 비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한 참을 내려가니 큰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식당하나..
할머니 한 분이 미역을 널고 있다. 미역 말린지가 조금 되었는지 색깔이 희게 변하고 있다.
이거 먹을 수 있느냐 물어보니 저 쪽에 미역귀가 있으니 먹어보란다. 
좋지.. 금방 바다에서 따 온듯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미역귀를 씹으니 아드득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이 곳이 A코스의 종착점인 해맞이 공원이다.
하얀 기둥으로 받쳐든 빨간 등대를 거대한 대게의 발이 감싸고 있다.
마치 SF 영화에서 보는 외계동물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차를 멈추게 한다.
 
여기 저기 그런 조형물이 많고 조금 더 가니 밤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밝힐 루미나리에 장식이
언덕 아래 준비되어 있다.
 
그런 인위적인 조형물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 쉬지 않고 길을 걷는다.
길 바닥의 노란원속의 화살표가 드디어 해변쪽으로 인도한다.
 
해변 아래에 방파제에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고
길 한편에는 익살스럽게 남성의 성기모양을 한 천하대장군 모형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아마 짖궂은 아줌마들 단체로 지나가면 한 번씩 쓰다듬고 지나갔을 법한 모형들..
 
해변의 바위들 옆으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듯한 길이 만들어 져 있고
그것도 위험해 보이는 지역은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좋다 좋아.
 
파도가 심히 치는 날이거나 비가 올 때는 걷기 힘들겠지만
오늘 같이 맑은 날은 산길보다 이 길이 더 구미가 당긴다.
 
바닷가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긴 장대를 가지고 바다에 집어 넣고 무엇을 건지고 있다.
무엇일까? 가만히 보니 장대 끝에 갈고리가 달려 있고 미역을 건지고 있다.
그런데 바닷가 곳곳에 저렇게 개인이 미역채취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으니
저 행위는 불법이다.

곳곳에 해안을 감시하는 초소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전에는 이 곳 통행이 금지되었는데
블루로드 조성을 위해 어느 정도 군부대와 양해를 구한 것 같다.
 
위장막을 두른 초소에 사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낮에는 보초가 없고 밤에는 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 길, 때론 바위 위를 걷기도 하고
때론 모래 사장을 걷기도 한다.
아직은 길을 조성한지가 오래 되지 않아 훼손된 곳이 별로 없다.
 
이런 둘레길의 갈림길에서는 늘 방향표시가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발견한 길 바닥의 방향표시는 나그네를 헷갈리게 한다.
직진과 우회전을 동시에 그려 놓았다. 그것도 겹쳐서…
What shall I do?  그래도 마을로 들어가는게 낫겠지?

가끔 지나 치는 마을 곳곳에 미역이 널려 있고, 개울가엔 오리도 먹이를 찾고 있다.
 
어느 마을에 할머니들이 미역을 다듬고 계시기에
"할머니 사진 좀 찍어도 되요" 하고 물었더니 찍지 말란다.
지난 번 누가 내 모습을 찍은 걸 아이들이 인터넷에서 보고
할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했더란다. 
아..그럴 수도 있구나..
할머니 대신 할머니 이마같이 쪼글 쪼글한 미역더미만 찍었다.
 
한참을 진행하다가  두번째 도장을 받아야 할 석동횟집을 찾았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도장 찍어주는 할머니가
몸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해 계신단다. 
그 옆에 동백꽃이 시들하게 말라가고 있다.
 
블루로드 이정표에는 시간이 없고 지도도 형상화만 해 놓았기에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어 다시 영덕군청에 전화하니
B코스의 종점인 축산행까지는 앞으로 4시간을 더 걸어야 한단다.
그 때 시간이 4시가 넘었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시간 정보는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멀었던가?
별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도 지도에 표시된 소요시간보다 더 걸리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중간 기점인 대게마을까지 가서 하룻밤 자는 것으로 생각하고
너무 많이 걸이 힘이 들지만 계속 진행.
 
너무 힘들어 빨리 대게마을까지 가서 여장을 풀고 푹 쉬어야겠다.
아침 8시 20분부터 걸었는데 지금 거의 10시간째 걷고 있다.
 
원조대게마을이라 해서 무척 큰 마을인 줄 알았는데
집 몇 채 있고 민박과 모텔하나 있을 뿐. 
 
모텔로 들어가니 문도 닫혀있다. 전화로 주인을 불러 겨우 방 하나 얻고 씻지도 않은 채로
인근에 대게파는 식당에 들어가 대게 2마리와
대게 뚜껑의 국물로 만든 밥 한 공기로 허기를 채우고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비추어 주고 있다.
 
바닷가 정자에 올라가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도 부르고 
총총한 별을 보다가 모텔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 푹 담그고 피곤한 몸을 녹여본다.
이렇게 힘든데 내일 아침에 또 걸을 수 있을까?
 
아침에 해돋이를 보고 싶어 바다 근처에 숙소를 정했는데
새벽부터 우르릉 쿵쿵. 번쩍 하며 비가 뿌린다.
 
새벽의 옅은 잠에 트레킹을 계속해야 될지 말지 고민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혼자 고민한다. 스스로 자꾸 핑계를 만들 생각만 하고..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다지 많이 오지는 않기에
계속 가자 하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우비를 덮어 쓰고 우산을 받쳐 들었다.

도저히 못 걸을 줄 알았던 내 다리도 언제 아팠냐는듯 힘차게 걸음을 재촉한다.
 
블루로드의 노란 이정표는 나보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라 하지만
아무래도 비가 오기에 산이 위험할 것 같아
축산항 이정표를 확인하고 차다니는 도로길을 택했다.
어차피 축산행에서 만날 것이 확실하니까..    
 
그러나 차길보다는 농로가 좋을 것 같아 확실하지 않지만
논뚝길을 한참 가다가 보니 길이 막혀 다시 되돌아와 다시 걷기도 했다.
 
낮은 산들이 비안개로 덮혀 동양화같은 풍경을 만든다.
 
비가 오고 아침이라 차도 별로 안 다니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차가 오는 방향을 보고 걷는다. 
 
산으로 올라갔으면 한참 고생하고 많이 걸었을텐데,
도로로 걷다보니 편하게 한참 걷다 보니 축산항 입구 표시가 보인다.
 
멀리 보이는 죽도산 유원지에 하얀 등대가 선명하게 보인다.
일부러 동네 뒷길로 해서 길을 가다가 보니
멋진 다리가 산에서 내려 오는 길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발견한 노란 블루로드 이정표.
 
일부러 이정표를 거슬러 가 보았다.
멋지게 만들어 놓은 다리는 일부러 나그네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겨우 사람 한명이 지나다닐 만한 좁은 다리.
가운데쯤 오니 다리가 출렁인다.
 
다리 끝에 가니 바닥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시야를 높게 드니 그 화살표는 바닷가 모래밭을 통해서 오고 있다.
그 옆에 깨끗한 화장실 건물. 
 
원래 코스로 왔으면 심히 고생했을 것 같다.
등대로 올라가자. 이정표도 올라가라 한다.
등대로 올라가는 계단은 최근에 만든 것인지 거의 손상이 없고,
나사 하나까지 금방 박아놓은 듯 윤이 난다.
 
등대가 있는 죽도산은 이름대로 대나무가 작은 섬 전체를 뒤덮고 있다.
아침도 안 먹어서인지 많은 계단을 올라가는게 무척 힘들다.
 
허위 허위 정상으로 올라가 등대로 들어가니
이제 막 만든 작은 휴게소 같이 보이는데 문은 열려있기에 들어가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물로 일회용 커피를 타서 초코파이 한개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등대 난간으로 나가니 비오는 동해의 맑은 물이 끝없이 내 발아래 펼쳐져 있다.
 
등대에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신나게 바다 노래를 불렀다.
가만히 보니 이것은 전망용 등대이고 실제 등대는 조금 아래에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반대편으로 길로 해서 등대 아래로 내려 오니 바로 항구가 나오고
아침에 어부들이 유리등이 주렁주렁 달린 오징어잡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제대로 된 아침을 먹어야지.
대개 횟집전문이지만 아침 식사가 되는 식당에 들어가
정식을 시키니 반찬가 모두 해물로 만들었다. 
 
멸치, 미역, 도루묵, 작은 쥐치포, 그리고 아구사촌이라는 정시로 끓여낸 맑은 국. 
정시는 아침 배로 들어온 것으로 끓였다 한다.
 
조금 전 깊은 바다에 노닐던 생선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내 입으로 들어와 버렸네.
 
정말 맛있는 아침을 먹고 3번째 도장받는 식당에서 도장 꽝 찍고,
길을 나서니 C코스로 향하는 이정표는 다시 산길로 안내한다.
길을 따라 걷자.
무리하지 말자.
 
바다를 끼고 돌아가는 길에 위험하지 않게 나무로 발판을 만들어 놓고
운전하는 이들이 항구의 도시에 온 걸 알 수 있도록
산사태를 막아주는 방패막에 여러 가지 물고기 장식품으로 벽을 디자인했다.
 
해변을 따라 걷는 재미가 좋다. 어제는 해변의 바위 옆을 걸었는데
오늘은 깨끗한 해변길을 걷는다.
 
빗방울은 거세어지고 회색빛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바다의 넉넉함을 보며
내 입에선 김민기의 '친구'라는 제목의 노래가 흐른다.
 
검푸른 바다위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
 
길가의 작은 펜션도 이쁘고, 마당의 나무에 걸어 놓은 그네도 정겹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끝없이 길을 걷고 있다.
어느 정도나 걸었나? 
 
가다 쉴 곳이 없어 버스정류장에 잠시 들어갔는데 이빨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남루한 옷차림의 할아버지가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고 계신다.
웅얼거리시는 사투리로 무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동문서잡의 대화를 나누고
“할아버지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인사하고 다시 출발.

비가 어느 정도 그치고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이들이 가끔 보인다.
 
항구에 몇 명의 아줌마들이 이제 막 도착한 배에서 걷어 올린 그물에서
게를 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물 속에 걸려 있는 게를 사진 찍으려는데 찍지 말라 한다.
이런 게는 잡으면 안되는데 그물질에 어쩔 수 없이 잡힌 것이라 한다.
그렇구나..그런 제한도 있구나.
 
그런데 신기한 것 발견. 소라가 그물 옆에 있는데
그 소라 속에서 가재가 빠져 나올려 기를 쓰고 있다.
가재의 모습도 무척 신기했다.
아주 큰 앞발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앞발이 투명한 보랏빛 색깔을 띠고 있다.
빈 병 있으면 담아오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가재였다.
 
몇개의 방파제를 지나고, 작은 공원에 영덕대게를 크게 형상화하여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그 옆 빨간 등대로 들어가는 길은 길에 크게 원을 그리는 디자인과
가드레일도 멋있게 해 놓았는데 큰 파도에 밀려왔는지 아스팔트가 손상되었고
쇠로 된 가드레일도 심하게 부서져 있다.
 
이런 파도가 갑자기 밀려 오면 아마 사람도 그대로 떠밀려 내려 가 버릴 것이다.
 
대진해수욕장이 있는 인근 식당에서 4번째 도장을 받으며
최종 목적지인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바로 코 앞이란다.
에이 설마... 지도상으로도 한참 먼데..코앞이라니..
 
대진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고래불대교를 막 지나자 마자
오른 편 백사장으로 내려가니 거대한 소나무 숲이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길 안내도 그 소나무 숲의 한 가운데로 나 있고.. 볼 수록 잘 만든 트레킹코스다.
 
빼곡한 소나무 밭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난 우비를 뒤집어 쓴 채 감탄하고 있다.
마치 소나무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배병우작가가 이 곳을 모델로 피사체를 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한 여름에 해수욕객들이 이 곳 소나무 방풍림에 들어와 즐기는 상상을 하니 
불현듯 어느 해 한 번 이 곳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고 싶다하는 욕심이 생긴다.
 
그렇게 긴 소나무숲을 지나 다시 아스팔트로 나와
마지막 종점을 향해 힘있게 걷지만 이젠 발이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이미 먹을 것 다 먹어 가벼워진 배낭도 더 무겁게 느껴진다.
 
드디어.. 커다란 고래상이 보인다.
 
은빛 고래. 몸체와 꼬리만 밖에 나와 있다.
아마 맑은 날은 고래가 반짝 반짝 빛날 것 같다.
그리고 고래 머리에서 물구나무서기하는 예쁜 아가씨 모습.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드는 마무리네.
 
그런데 마지막 도장 받는 고래동상 옆 식당이 문이 닫혀 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요기는 해야겠기에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전화를 다시 해 보니
오늘 영업 안하지만 마침 잠시 들어왔단다.
밥 먹다 말고 서둘러 나가 확인 도장을 받았다.
 
식사 후 버스정류장으로 가다가 발견한 길가에 떨어진 물체 하나.
누가 통통한 멍게 하나가 아스팔트에 떨어뜨리고 갔네.. 
비닐봉투에 넣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먹고 싶었으나 아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만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까와라.
 
그렇게 이제껏 몇 번의 트레킹 중 가장 멋진 길을 힘들게 걸었다는 보람에
혼자 싱글벙글하며 복숭아꽃이 잔뜩 핀 영덕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또 다른 먼길 떠나는 꿈을 꾸며..
 
내 꿈은 스페인의 까미노 순례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