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나들길3코스]비오는 진달래길

carmina 2012. 4. 22. 01:21

 

2012년 4월 21일

 

합창단의 지휘자님이 노래를 가르칠 때마다 하시는 말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정말 맛있다고 감탄을 하는 것처럼 노래해라.

그렇게 요구하시지만 실제로 내가 노래하기를 무척 즐거워해도

그렇게 감탄하며 노래하는 것은 참 어렵다.

 

우리가 살면서 감탄하면서 사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전 카카오톡 동영상으로 아크로바틱 서커스를 보면서

잠시 몇 분동안 감탄한 적이 있었지만 그간 단지 몇 분에 불과하고...

 

오늘 비오는 나들길 3코스

꼬박 4시간을 걸으면서 비를 주룩 주룩 맞아도

눈에 펼쳐지는 진달래 무리의 아름다움과

비를 머금은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보면서

수없이 '좋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아마 이렇게 엔돌핀이 터져나오는 날도 인생살면서 얼마 없으리라.

 

지난 해 8월 처음 나들길 길벗들과 떠나본 3코스 능묘가는길.

그날도 그렇게 비가 내리더니 오늘 8개월만에 2번째로 걷는 3코스에도

여전히 비가 많이 내렸다. 무슨 인연인가?

 

평소에는 적어도 20명이 넘던 나들길 걷기도 오늘은 궂은 날씨라

12명의 조촐한 구성으로 출발.

 

시작하는 지점이 지난 번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

일부러 마을 골목을 지나가게 만들었는데

골목 초입부터 길바닥과, 전봇대 그리고 낮은 담벼락에도

재미있는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이전엔 마을사람들만 지나던 길인데 이젠 외지인들이 많이 다니는 길로 변했으니

무언가 새로움을 주어야 한다.

밋밋한 시골 담벼락이 강화도 사투리가 섞인 말로 길벗들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시꺄?.  '이랬으꺄 저랬으꺄' 식의 '겨'나 '꺄"로 끝나는 독특한 대화.

 

이런 사투리가 이전에 조선시대에 왕족들이 많이 피난와서 살다보니

원주민들이 존칭도, 낮춤말로 아닌 어정쩡한 말로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담벼락들과 정겨운 대화를 사진을 모두 찍고 싶었으나

비가 워낙 많이 와 우비를 뒤집어 쓰니

사진을 찍기 힘들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골목에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영양탕냄새.

 

도로를 가로질러 곧 활짝 핀 진달래꽃 뒤로 성공회 건물이 보인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영국의 성공회가 지은 교회.

지난 해 왔을 때는 보수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대문이 크게 열려져 있다.

 

카톨릭이 처음 우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을 때

그들은 집례할 때도 한복을 입었고, 성당도 한식으로 지었다.

성공회도 역시 그러했을 터이니 지금 남아 있는 성공회 성당도

우리나라 용인민속촌에서 볼 수 있는 관아같은 건축물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당 뒤에 넓은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흰색의 현대식 성당 건물이

이전 성당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성당을 나와 마을길의 질퍽한 도로들을 지나가며 멀리 진홍색으로 뒤덮힌 

진달래 군락들이 아름답고 어느 집 돌담 위에 흐르러지게 핀 벚꽃과

토종 벚꽃, 백목련, 자목련들, 개나리들이 참 아름답다. 

 

지난 해 가본 길이랑 약간 다른 코스지만 나들길 관계자들이 형편에 맞게

조금씩 코스를 수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외지인들끼리 다니면 그냥 리본식 이정표나 화살표를 보고 걸어가니

때론 유적지나 멋진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도 있지만  강화주민과 같이 걸으니

두루 두루 볼 수 있어 좋다.

 

오늘도 지난 번에 보지 못했던 길정 저수지의 시원한 모습을 즐길 수 있었다.

넓은 저수지에 비가 쏟아진다.

빗방울이 수면에 닿을 때마다 순식간에 모든 빗방울을 담아 버린다.

 

저수지 뚝길을 가로 질러 가는 코스

넓은 뚝위,  지난 겨울 태워버려 시커멓게 변해버린 잔디 사이로

새로운 풀들이 파릇 파릇 자라고 있다.

 

자연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가끔 산불로 시커멓게 다 죽어버린 나무에도 봄이되면

여지없이 나무 틈 사이에서 파란 싹이 돋아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이 뚝위에서 팔을 벌려 하늘로 날라가고 싶다.

 

같이 걷던 길벗 한 명이 뚝 저 편에 있는 마을을 보며 걱정한다.

혹시 뚝이 터지면 저 마을이 모두 수몰될것 같다고..

그럴 수 도 있겠지.  그러나 가능성만 가지고 세상을 사는건 아니다.

세상 살면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은 10분의 1도 발생되지 않는다.

그러니 하쿠나 마타타..  세상 너무 걱정하며 살지 말자.

 

걷기 시작한지 1시간이 넘은 것 같아 쉴 곳을 찾았으나 마땅치 않다.

지난 해에는 이규보 묘에서 닫혀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잠시 비를 피했는데

이 곳은 다른 길이라 마땅치 않다.

 

그러다가 마침 어느 펜션앞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들어갈려 하다가

남의 사유재산에 무작정 들어가는 것도 모습이 안 좋아 포기하고

낚시터에 구석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선 채로 잠시 쉬며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길은 질척거리고 등산화 사이를 비집고 조금씩 비가 스며들고 있다.

 

숲을 벗어나 오늘 점심도시락을 먹기로 한 권능교회.

교회의 옥외에 있는 장소에 비를 피할 수 있고

그곳에 낮은 평상이 있어 좋았지만 아무래도 먼저 양해를 구해야 했다.

 

교회 옆 사택 문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지만 아무도 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실례를 하기로 하고 자리를 마련하는데

집에서 목사님인 듯한 분이 우산쓰고 나오시기에 나들길 걷는 사람들이라며

양해를 구했더니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이신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이 곳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지저분한 흔적들을 남긴 것 같다.

 

비가 워낙 오니 목사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식사하라며 들어가시더니

조금 후에 뜨거운 물과 일회용 커피 그리고 컵을 내오신다.

너무 고마운 배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내 입에서 찬송이 흐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곳 교회의 시설들을 이용할 때는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깨끗하게 이용해 주기를 바란다.

 

도시락을 풀어 놓으니 각자 싸가지고 온 갖가지 메뉴들.

어느 길벗이 새벽에 일어나 준비했다는 주먹밥을 비롯하여

다른이가 준비한 충무김밥, 떡, 샌드위치, 빵, 과일 등등...

오병이어의 기적이랄까?

이렇게 도시락을 싸 오라 하면 늘 충분히 먹고도 남는다.

 

먹은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다시 출발.

 

석릉으로 가는 나들길이 그만 주변에 집을 새로 짓느라

길이 없어져 버렸다. 누군가 준비해 둔 작은 사다리로 길을 통과

 

석릉에서부터 3코스의 종착지인 가를까지 이어지는 길은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진달래 숲과 나무들.

멀리 보이는 큰 나무들이 바람에 통째로 흔들 흔들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저러다 2년전 곤파스 태풍때 처럼 나무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가끔 진달래 나무 밑에 떨어진 꽃잎들을 보며 모두들의 입에서 노래가 절로 흐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낙엽쌓인 작은 오솔길들.

큰 소나무들이 비에 젖어 검은 빛으로 변해 버린 숲길 사이로

색색의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은 길벗들의 모습이 또 다른 봄꽃들로 보인다.

 

어느 집의 뒷뜰에 세워놓은 작은 조각품

남녀가 서로 마주보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비스듬히 새겨진 여자의 눈에서 행복이 보인다.

그러나 나무에 빗방울이 젖어 눈물처럼 보이니 행복의 눈물인가?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선 채로 휴식시간을 가지고 누군가 가지고 온

막걸리 한 잔씩 나누어 마시며 목을 축인다.

막걸리 안주에는 먹다 남은 김밥이 최고라며...

 

하지만 우리들의 정겨운 모습 주변에는 누군가 버린 양심들이

깨끗한 숲속에서 평생 썩지 않고 남아 있다.

먹고 버린 같은 종류의 드링크제병이 꽤나 많은 것을 보니

누군가 고의적으로 이 곳에 버린것 같다.

아주 아주 꽤씸한 사회의 독약같은 사람들..

 

진달래 숲 속에 들어가니 도무지 더 가고 싶지 않아

누군가의 제의로 노래를 하고, 다 같이 쌍팔년도에 행락철에 소풍나온

아줌마부대들처럼 진달래를 배경삼아 비스듬히 줄서서 단체 사진 찰칵.

 

비가 내린다.

진달래 꽃비가 내린다.

나들길 벗들의 정감들이 꽃비속에 흘러 내린다.

 

비에 촉촉히 젖은 가릉에서 내려와 허브향기 찻집에서 완주스탬프를 찍고 우비를 벗으니

옆으로 스며든 빗물에 옷들도 배낭도 모두 젖었다.

 

오늘은 종일 비에 젖고 추억으로 젖은 날이다.

종일 비에 대한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걸었고

종일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들길을 걸었다.

 

비가 오는데 그냥 돌아오라는 아내의 부탁도

내가 행폰을 받지 않아 빗속에 묻어버렸지만

나에게는 오늘이 참으로 행복이 가득찬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