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17구간 (방광 - 오미)

carmina 2013. 8. 18. 23:08

 

2013. 8. 15일

 

2009년부터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벌써 몇 차례에 걸쳐서 줄기차게 둘레길 전체를 돌고 있다.

틈만 나면 내려가야지 내려가야지 하면서도 쉽게 내려 갈 수 없는 먼길이라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다가 올 여름은 1년전부터 계획한 처갓집 전체 여름휴가도 포기할 만큼 바쁜 업무를 하느라 다 포기했는데 마침 업무일정이 조금 지연되고 광복절 징검다리 휴일이 끼었기에 얼른 예약을 서둘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긴 장마가 끝나고 이제껏 한국에서 겪어보지 못한 폭염이 걱정된다. 떠나는 일정을 잡고 날씨 예보를 보니 내가 가는 날의 전남 지방 온도가 한낮에 37도를 예보한다.

올 초에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갔을 때 사막한가운데 그늘 아래 온도계를 놓았더니 40도였고 햇빛 아래에서 온도를 재니 50도였다. 우리 나라도 거의 아열대 기후로 변화되는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에 전화를 걸어보니 되도록이면 폭염기간 중 걷지 말라는 당부도 있고 해서 제일 쉬운 코스를 찾아보다가 둘레길 15, 16 그리고 17구간을 즉 방광-오미-송정-가탄구간을 역으로 걷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번 걷기를 한 후 2 번만 더 걸으러 내려가면 완주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둘레길을 간다 했더니  6살 여자아이가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완주하여  둘레길에서는 유명인사인 걷기가족인 짱아네 부부가 동참한다고 나섰다. 그간 인터넷이나 카톡으로만 연락했었는데 이제 마주칠 기회가 생겼다.

 

저녁 퇴근시간 되자마자 배낭을 메고 남부터미널에서 전남 구례로 날아간다.

늦은 밤에 구례터미널에 도착해 바로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한 방광마을에 도착하니 일찍 잠들었던 관리인이 부시시 걸어나와 마을회관에서 자라며 문을 열어 준다.

 

커다란 당산나무가 2그루가 있는 텅빈 마을회관 내부.

이불 몇 채. 구형 TV, 대형 선풍기.... 그게 전부네.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고 혼자 뿐이라 잠시 밖에 나가 맑은 하늘에 별을 좀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큰 확성기 소리에 잠을 깼다.

동네 이장이 주민들에게 알리는 방송.

오늘 대청소날이니 모두 지금 나와서 동네청소하라고 하고

광복절이니 태극기 모두 달라하며 오늘 동네에서 마을 잔치 있다는 공지사항을 알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5시 반 정도.

밖이 궁금하여 삐쭉이 문을 열고 보니 전깃줄에 제비들이 줄을 지어 앉아있다.

 

도심에서는 한 마리도 보기 힘든 제비들이 무리지어 나란히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식사가 근처 식당에서 된다기에 여기까지 와서 식당식사가 싫어

가지고 온 빵과 커피로 아침을 대신했다.

 

동네 사람들 모여 음식도 해 먹고 낮잠도 잘 수 있게 만든 정자 옆에

500년 수령의 당산나무 옆에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신기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을로 들어 오는 택시에서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짱아네부부가 도착.

사진으로는 자주 보았지만 실제 보니 참 멋진 모습의 부부.

비록 짱아는 너무 더워 못 데려왔지만 오래 만난 친구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뜨거운 세멘트길을 웃음소리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정표를 보니 오미마을까지 12키로.

내가 잘 가는 강화나들길 같으면 12Km 정도는 거의 가장 짧은 코스인데

오늘같은 폭염의 날씨라 쉽지 않을 것 같다.

 

멀리 낮은 산에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는데 태양은 뜨겁고 벼가 익어간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나무 밑에 노부부가 그늘을 찾아 앉아 계시기에 인사하고 뜨거운 열기가 푹푹 찌는 냄새가 날 정도로 가득한 세멘트 길을 걷는다.

 

길가 옆 오래된 집의 돌담장에 덮혀 있는 푸르른 담쟁이가 평소같으면 무척이나 멋있게 보았을텐데 오늘은 그 마저 마치 더운 날 더벅버리를 한 총각을 보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그리고 마을 뒤 언덕 위에 지그 재그로 얽혀 있는 소나무들까지 빈틈없는 푸르름에 가득차 있어 답답한 하늘을 보는 것 같다.

 

거기에 어느 집 담벼락에 재미로 붙여 둔 낙서판에 써 있는 무수한 글 들조차 그 앞에 서서 천천히 읽어 보고 있기가 귀찮을 정도로 오늘은 폭염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오늘 내가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길 걷는 곳 곳에 가끔 누군가가 이런 낙서판이나 나무의 자연미를 살려 밀집모자를 쓴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아 길 걷는 이가 미소를 짓게 한다.

 

길가의 집들조차 인적이 전혀 없다. 수한마을을 지나는 데 길가의 집들은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집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성한 것은 마당의 풀들 뿐이다.

이미 이 길을 걸어 본 사람과 같이 걸으니 그런 자연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들었다.

그리고 짱아네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 관심의 코드가 같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세멘트 마을길을 가다가 문득 어느 집 옆의 산길로 접어 드는데 그 집 앞의 조그만 개울에 빨간 플라스틱 의자 두 개를 놓아 발을 담고고 쉴 수 있게 해 놓았다. 길 걷는 목적이 아니라면 저 개울에 발 담그고 쉬다 가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숲길을 조금 지나니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오르고 멀리 지리산의 마을들과 골짜기들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바람은 불지 않아도 눈으로 시원함이 가득 들어온다.

이런 맛에 걷는다. 손으로 소유하지는 않아도 눈으로 소유하고픈 욕심들...

풀 잎에 매달린 작은 벌레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들, 흙을 파헤친 두더지 흔적들..

이런 것들에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다면 어느 정도나 할까?

 

이 곳은 유난히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많은 곳인지 산길 따라 긴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수로가 있어 그냥 땅 속으로 흘러내려가는 소중한 지하수와 빗물들을 농사용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당촌마을에도 커다란 당산나무가 눈에 보인다. 당산나무는 토속신앙의 중요한 심볼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임장소가 되고 한가한 쉼터가 되고, 마을의 이정표가 된다.

 

길가의 벼들이 미동도 하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없다.

이렇게 더운 날 바람이라도 있으면 조금 걷기가 수월할텐데 너무 더워 머리에 땀이 줄줄 흐른다. 멀리 마을이 보이는가 싶더니 얼마 걷지 않아 금새 화엄사 입구에 도착했다.

 

원래 화엄사에는 점심때 쯤 도착해 요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다. 시간을 보니 1시간 반도 안 걸린 것 같다. 우리가 걸음이 빠른건가? 아니면 시간 계산을 잘 못한 건가?

편의점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즐기며 일부러 여유를 보인다.

나는 짱아네에게 나들길 손수건을 선물로 주고 짱아네는 내게 둘레길 손수건을 주었다.

 

당초 내 계획은 첫 날은 방광마을에서 오미까지만 걷는 것으로 계획했다.

걷기 힘든 여름이라 천천히 쉬고 기왕 화엄사 온김에 경내 구경도 하며 시간 보낼까 했는데 오미에서 민박을 구하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오늘 하루 송정까지 두 구간을 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래서 화엄사 경내 관광은 포기하고 길을 나서, 둘레길 코스로 가는 길목에

지리산의 곰을 복원시키기 위한 종복원기술원이 있어 둘러 보니 지리산의 야생동물에 대한 소개와 곰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결과들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고 하루에 두 번씩 곰을 보여 주는 행사도 갖는다고 하는데 시간이 안 맞아 그냥 지나쳤다.

 

기술원이 있는 계곡에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고 있고,

우린 본격적으로 그간의 밀린 이야기 보따리들을 주고받으며 길을 걷는다.

서로 비슷한 환경과 취미 그리고 생활패턴과 꿈 등...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길가의 감나무나 밤나무처럼 주렁 주렁 열리고 있다.

 

징검다리를 지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걷는다.

숲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야생 벌레들이 우리들을 환영한다.

메뚜기, 잠자리, 애벌레, 하다 못해 달팽이같이 생긴 긴 곤충.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미드 CSI 처럼 스마트폰을 옆에 놓고 사진 찍으니

누가 봐도 제법 그 크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숲길. 그늘을 피할 곳은 어쩌다 크게 자란 길가의 나무 그늘 뿐이다. 이전 둘레길 걸을 때마다 이정표가 더 잘 되어 있어 길 걷기가 편해졌다. 매 코스의 목적지 마을까지 몇Km 남아 있는지 거리를 표시해 주고 있어

조급하고 답답한 나그네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실망시키기도 한다.

 

길 옆 숲에 커다란 구멍 2개가 뚫려 있다. 이게 무슨 구멍일까?

거의 개 한마리 들어갈 만한 큰 구멍이고 두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 두 마리를 위한 구멍으로 보이지만 자극하고 싶지 않아 사진만 담아 두었다.

 

오미마을까지는 그다지 가파른 언덕이나 높은 재가 없어 걷기에 편하다.

오늘 점심은 오미 마을에 있는 들녘밥상집에서 하기로 하고 길을 걷는데

상사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이 곳에는 터가 좋아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별장을 짓고 살려고 한다는 짱아아빠의 설명과 함께 숲 속에 있는 그럴 듯한 집을 가르킨다. 저런 집 하나 사 두면 좋겠다고..

 

전국에 여기 저기 길을 걸으면서 이런 욕심을 가질 때가 자주 있다.

가는 곳마다 여기에 집하나 짓거나 혹은 시골농가를 하나 사고 싶다는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어느 곳에선가 숲 속에서 물이 쏟아지는데 마치 폭포수같이 거센 물줄기가

계곡으로 흘러 들어 가고 있다.

저 쏟아지는 거센 계곡 물 아래 서서 물줄기를 온 몸으로 맞고 싶다.

 

멀리 잘 정비된 오미마을의 한옥민박촌이 보인다.

이 곳에 오늘 예약 손님이 많고 민박은 되도 식사가 안된다 하여 그냥 지나치기로 한 곳이다.

숲 속에 잘 다듬어진 기와집들이 길 가에 즐비하고

잎이 넓은 채소같은데 근대인지 담배잎인지 잘 모르지만 눈에 자주 보인다.

이제 말라가는 논 구석에는 커다란 논우렁이 슬금 슬금 기어가는 것을

갑자기 우렁된장이 먹고 싶다.

 

하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느티나무 옆 정자에 동네 노인들이 많이 모여 쉬고 있기에 노인들과 이야기하고파 일부러 그 옆으로 가서 쉰다.

진한 전라도 사투리고 노인분들이라 발음이 부정확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분간이 안되지만 우리 보고 더위에 걷는데 힘들겠다고 걱정을 해 주시는 것 같다.

어느 한옥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는 홍살문이 높게 걸려 있고

잘 다듬어 놓은 우물이 있어 물한모금 마실까 하고 가 보았지만

물이 흐르는 것 같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길가 도로에 잡초가 가득 자란 이상한 흙무더기. 아마 누군가의 무덤인데

비석도 없지만 연고가 있는지 그대로 둔 것 같다.

하사마을 작은 저수지는 파란 물에 하늘의 흰 구름이 투영된 명경지수다.

 

길가에 조금씩 색깔이 변하는 감들과 가시가 단단한 밤, 서서히 이삭이 패이는 벼를 보며 걷다 보니 큰 도로가 있고 그 옆에 몇 개의 찐빵과 옥수수를 파는 집과 그럴듯한  식당이 있지만 운조루를 비롯한 즐비한 기와집들이 있는 곳의

오미 마을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부지런히 열기 가득한 길을 걸어

들녘밥상집에 식사를 위해 반가움에 신발끈부터 풀고 들어 갔지만 그만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예약 손님이 많아 우리에게 식사 제공이 어렵단다.

넓은 홀에 손님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만 겨우 한 테이블에서만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비어 있어 우리가 예약된 손님들 오기 전에 얼른 먹고 가겠다고 했지만 그 마저 거절당하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 구례안내센터에 전화를 걸어 물어 보니 판두리까지 가서 식사해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판두리쪽으로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방울토마토를 팔기에 한 봉지 사서 허기를 달래며 걷다가 짱아아빠가 길가에 한옥민박 자연그대로 라는 민박집 마당 평상에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 것을 보고 들어가 혹시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부탁하니 개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주머니가 우리 모습을 보고 측은했던지 마침 3명 정도 먹을 밥이 있으니 먹고 가란다.

 

이 처럼 고마울데가 있을까? 즉석에서 차려 온 밥상이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우리 입맛을 돋군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이건 시장 빼고라도 충분히 맛있어 보이는 묵은 깻잎, 멸치조림, 묵은 김치, 고사리 그리고 즉석에서 따온 풋고추와 시골된장. 거기에 먹음직한 흑미 잡곡밥.

평상 아래로 냇물이 흐르는 곳에 앉아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커피 한 잔도 마시고 비용을 지불하고자 했으나 그 분은 돈 받기를 극구 사양하신다.

이렇게 고마울데가...정이 가득 담긴 친절을 고마움이라는 댓가로 치루기로 했다.

 

번듯한 식당에서 완전 푸대접을 받아 안좋은 추억을 가질 뻔한 지리산 둘레길 오미마을에서 나그네의 어려움을 미소와 함께 기꺼이 도와 주는 마을 주민의 친절로 기쁜 마음으로 변해 다음 코스로 길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