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15코스 (송정 - 가탄)

carmina 2013. 8. 20. 21:53

 

2013. 8. 16

 

송정 가탄

 

새벽에 눈이 떠졌다.

밤새 무릎부분이 따끔했다. 혹시 박쥐가 물었을까?

그러나 워낙 피곤해서 그런 것을 생각할 기운도 없었다.

새벽에 나가서 지리산의 새벽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그 마저

피곤이 나를 황토방 매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밖으로 나와 아침 지리산의 고즈넉함에 한참 동안 마당에 앉아 있었다.

작은 아침 구름이 산을 천천히 넘어가고 있고, 계곡의 물빛도 어제보다 더

맑게 흐르고 있다. 황토방 바로 밑에 누군가 대형 텐트를 쳐 놓고 자고 있다.

 

아침에 짱아네가 시간 맞추어 왔다. 오늘 새벽 4시 반에 잠들었다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다.

 

길을 시작하자마자 목아재의 언덕으로 오른다.

오늘 가탄까지 가는 코스는 500미터 높이의 목아재와

400미터 높이의 큰재가 있다

목아재를 오를 때 어제 같았으면 몇 번을 쉬면서 올라갔을텐데 푹 쉬어서 그런지

이 가파른 언덕은 그다지 힘든 줄 모르고 조금 올라갔다.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산이 서서히 아침 안개에 덮여가고 있다.

아침 안개는 그 날이 무척 더울 것이라는 예보다.

오늘도 죽을 각오를 해야겠구나

 

언덕을 한참 오르는데 그래도 목아재는 어제의 의승재처럼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언덕은 아니고 가끔 능선을 걷기도 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제에 이어 시즌 2로 넘어간다.

 

언덕을 오르고 가파른 능선길을 지나가는데 마주쳐 오는 나이든 아저씨

아침 일찍이 기촌마을에서 출발하셨단다.

이제 오미까지만 가면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한다며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아저씨의 머리띠를 맨 이마와 얼굴에는 땀이 송골 송골 맻혀 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저씨의 목소리에는 설레임과 힘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즉시 1회용 냉커피를 타서 우리에게 대접한다. 고마운 사람.

너무 힘들지 않게 오미까지 무사히 가시라고 인사드린 후

길을 가는데 갑자기 앞에 보이는 산길 바위 위에 하얀 개 한 마리가

우릴 보고 있다. 우리 셋은 깜짝 놀랐다.

이 높은 곳에 웬 개? 혹시 누가 데리고 오지 않았을까 하고

인적이 있나 찾아 보았는데 아무도 없고

배 부근의 털이 듬성 듬성 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집에서 기르다 길을 잃은 개가 틀림없다.

개도 우리를 경계의 눈치로 보고 있다.

 

배가 고픈 것같이 보여 아까 아저씨가 준 과자를 주었더니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런데이 개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어느 정도 따라오다 말겠지 하고 길을 가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 오다가 때로는 맨 뒤에 오는 짱아네 엄마의

다리를 건드리기도 하여 짱아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안 되겠다 싶어 스틱으로 바닥을 치며 가라고 소리치면 무서운 듯

조금 멈추어 있다가 우리가 가면 어느 순간 뒤에 따라와 있었다.

때로는 멀리까지 쫓아 버렸지만 다시 또 따라 붙는 집잃은 개.

 

개 때문에 온 신경이 그 곳에 쓰여, 주변 환경을 볼 틈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정신 팔려 걷다 보니 문득 멀리 섬진강이 보인다.

짱아네는 이 길을 겨울에 와서인지 길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단다.

그러다가 산길에 나무로 만든 가이드레일을 보고 나서야 기억을 한다.

가이드레일로 이어지는 길은 모두 흙길이다.

그 길을 걸어보니 만약 비가 오면 비가 모두 그 길을 따라 흘러내려서

걷기 힘들었을 것 같다.

 

목아재를 넘어 당재로 갈라지는 삼거리 쉼터에서 한참을 쉬며

개를 멀리 쫓아 버렸다고 생각하고 가탄으로 가는 숲길로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 우리 뒤를 따라 붙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두 남자에게 인사하고 가다 보니

우리를 따라오던 하얀 개가 더 이상 따라 오지 않는다.

잘 된 건가? 미안한건? 하얀 개는 그 남자들을 따라 간 것 같다.

차라리 어느 마을까지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계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길을 내려간다. 워낙 높은 곳으로 올라 왔더니 내려 가는 길도 상당히 가파르다

한참을 비탈길을 내려가니 발이 밑으로 쏠려 엄지발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한다.

일부러 천천히 걸으러 노력해도 발의 쏠림은 막을 길이 없다.

 

구비 구비 산과 산 사이로 골짜기가 흐른다.

그 옆에 간간이 마을이 보이고 저 멀리 강이 흐른다.

지리산은 평범하게 걷는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거의 모든 코스가 하루에 북한산 족두리봉 정도의 산을 2개 정도 넘는 강행군이다.

 

그 비탈진 언덕의 끝에 인적없는 절이 하나 있어 텅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절 옆의 집에 붙은 문패의 주소를 보니 피아골로. 여기가 피아골이구나.

절인데 쉼터에는 빈 소주병이 뒹굴고 있다. 그 옆에 민가에 사는 사람이 마셨겠지.

설마 스님이 곡주를 소주로 드셨을까?

 

길을 걷다가 보면 한적한 집들이 많다.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인적 없는 집들. 그런 집의 싸립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에서 낮잠이나 자다 가고 싶기도 하다.

 

출발한지 3시간이 지났으니 이 정도 거리면 가을 같았으면 벌써 목적지에 도달했을 시간인데

우린 이제야 작은 내를 건너 기촌마을에 도착했다.

 

점심이나 먹고 큰재를 넘어 가탄으로 가자 하고 시내로 들어와 시골밥상집에 앉아

음식을 시켰는데 산속에서 터지지 않던 전화에 문자가 와 있다.

급한 일로 회사에서 전화. 아무래도 빨리 올라와서 작업을 해야 한단다.

 

가탄까지 거리상으로 멀지 않은 길이지만 힘든 산 하나를 넘어야 하니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오늘의 일정을 아쉽지만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 구례로 와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물색하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다시 전화로 직원들과 통화해 급한 일을 지시하고 남는 하루를 어디를 걸을까

고민하다가 지리산 둘레길의 번외코스인 서당마을에서 하동읍으로 걷기로 했다.

 

급히 지리산 안내센타에 전화를 걸어 민박을 부탁했더니 서당마을에는 민박이 없고

이정마을에 가야 한다기에 하동으로 날라가 이정마을의 예정되지 않은 민박집에

하루의 여정을 풀었다.

 

이 곳에 와서 보니 지난 번 아내와 하동호에서 삼화실을 걸었을 때 종착지가 이정마을이었다.

이정마을의 입구에 있는 정자와 마당에는 발달장애자 학생들이 무리지어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식사를 한 후 저녁에 지리산 자락의 별을 보고 고단한 나그네인 내 몸을 작은 방에

집어 넣고 하룻밤 푹 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