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16구간 (오미 - 송정)

carmina 2013. 8. 20. 20:20

 

2013년 8월 15일

 

낯선 집에서 맛있는 점심과 챙겨주는 얼음물을 넣고 다시 뜨거운 태양을 우산삼아 걷는다. 길가의 호박잎들도 더위에 축 늘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큰 호박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오미마을을 나와 별로 걷지 않았는데  하죽마을 이정표가 길게 고통받는 십자가처럼 서 있다.

길가에 작은 분재같은 소나무들이 기묘하게 춤을 추고 있고 그 밑에 하얀 잎을 가진 풀잎이 깨끗한 배색을 이루고 있다.

밋밋한 도로에 이런 자연미를 가진 디자인도 좋은 아이디어다.

거기에 군데 군데 과실나무도 심어 놓았다.

걷는 우리는 뜨거울지 몰라도 긴 장마끝에 신음하던 과일들과 곡식들을 뜨거운 태양빛에 살 판 났다.

그리고 우리의 끝없는 얘기도 오늘은 보따리가 터질 판이 났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걷다 보니 또 언덕.

그래도 언덕에 올라가면 실바람이라도 불어서 좋다.

멀리 푸른 지리산 산맥에 흰구름도 하늘빛깔처럼 곱다.

그 밑에 펼쳐지는 작은 마을들.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둘레길만큼이나 좋은 것이 끝없이 마주치는 마을들을 보는 것이다.

원래 지리산의 둘레길의 목적은 지리산을 빙 돌아가는 것이지만

골짜기의 마을 마을 마다 방문하며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보고 배우며 걷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 높지 않은 길을 올라가다 보니 재미있는 마을표시가 있다.

솔까끔 마을.

"어느 마을에서 오셨어요?"

"솔까끔 마을이요?"

"무슨 까꿍이요?"

"까꿍이 아니라 까끔이요.."

재미있다. 마치 제주도의 방언처럼 이런 정겨운 마을이름이..

그리고 군데 군데 쉼터로 만들어 놓은 숲속 공간.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머피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걷다가 힘들어 길바닥이나 돌 위에 앉아서 쉬다가 조금 더 가면

여지없이 제대로 쉴 공간이 나타난다.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고 매번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정표 옆에 또 다른 이정표가 있다

백의종군로. 성웅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걸었던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두 개의 이정표가 완전한 언밸런스한 모습이다.

하나는 지극히 자연 친화적이고 또 하나는 돈을 많이 들여 세운 튼튼한 이정표다.

아마 이정표 세우는 관청이 서로 달랐나 보다.

내게는 둘레길 이정표가 훤씬 다정다감해 보인다.

마치 인생의 지표를 알려 주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이니 내 눈에 콩깍지가 끼었나 보다.

 

서서히 마을이 멀어지면 또 다른 마을을 향해 산길을 걷는다.

이전에 마을 사람들은 이웃마을을 다니기 위해 이렇게 힘든 길을 허리구부리며

나무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다녔겠지.

 

그런 오랜 세월에도 버티고 있는 나무가 하나 있다.

주위의 모든 밤나무가 푸른 잎으로 덮여 있는데 유독 그 밤나무만은

모든 잎이 죽은 갈색인데도 그 끝에 간신히 작은 밤이 열리고 있다.

마치 죽음 앞에서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는 노인들 처럼

"나 아직 살아 있어"라고 외치는 처절한 나무를 본다.

 

허위 허위 언덕을 올라 갔더니 작은 정자하나가 우산쓰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쉬어 갔을까? 주위에 초코렛 껍데기가 보인다.

그 정자 밑으로 거의 45도 정도 되는 비탈길이 보인다.

나야 쉽게 내려가겠지만 올라오는 사람은 힘들었겠다.

그러나 그 비탈길 끝에는 다시 비슷한 기울기의 언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이 이 언덕만 지나면 끝날 줄 알았다.

 

그렇게 힘들어도 고개 위에서 멀리 산들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들을 보면 마음이 편했다.

어느 정도 걸었던가.

산 속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노인요양원

그 옆으로 지나쳤지만 인적이 없었다.

하긴 이런 날 노인들 나오면 열사병에 쓰러질 가능성이 높다.

어느 해인가 여름휴가를 일부러 농촌에 가서 일 돕는다고

고추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그만 너무 힘들어 쓰러질 뻔 했었다.

 

언덕을 넘어 차도로 나와 조금 걷다가 다시 마을길로 들어간다.

밭이 있는 언덕을 지나가는데 오늘 처음으로 마주 오는 둘레꾼을 만났다.

중년의 남자인데 첫 눈에 한 쪽 팔이 조금 불편해 보인다.

아마 중풍환자인 것 같은데 어제도 구례로 오는 버스에 중풍이 걸려 걷기 힘든 나이 든 분이

배낭을 메고 등산복 차림으로 지리산 행 버스를 탄 것을 보고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산에 가고픈 욕망은 막을 수 없나 보다 생각했다.

 

지금 마주친 이 분에게 우리 일행에게 사진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처음으로 짱아네랑 만남의 사진을 찍었다.

 

걷다 보면 군데 군데 둘레꾼을 위해 마련된 정자와 평상 그리고 의자가 있어

때로는 그 곳에 누워 한 잠 자고 싶을 때도 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저 언덕 끝에는 바로 하산길이 시작될거라 생각하지만

그 기대는 늘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그건 단지 또 다른 언덕의 시작이니까..

 

어느 숲길을 걷다보니 나무들의 밑둥이 처참하게 불에 타 검게 그을렸다.

그래도 여전히 위에는 잎이 나고 나무의 본질인 푸르름의 뜻은 막을 수 없다.

산불을 이겨낸 나무들이 하늘로 쭉 쭉 뻗어 있어 보기 좋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

경사가 조금씩 급해지고, 어디에도 언덕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가다 쉬기를 반복한다.

오늘은 절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같이 걷는 길벗은 이 방면에서는 베테랑이다.

나처럼 배도 나오지 않은 날씬한 몸매와 늘씬한 키에

이 정도의 언덕쯤이야 언덕도 아닐 것 같은 강골이다.

 

이 언덕은 어느 정도일까?

지도를 보니 의승재. 높이가 약 350 미터 정도로 표시되어 있다.

뭐 이 정도야 했는데 이상하게 갈수록 힘이 든다.

가다가 언덕만 보이면 쉬었다.

 

쉴 때마다 머리가 아득해 진다.

오래 전 설악산 종주할 때 이런 현상이 있었다.

쉴 때마다 졸리운 현상. 이건 내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는 얘기다.

급기야는 내 모습이 안타까왔는지 짱아아빠가 내 배낭을 들어주기도 한다.

지난 번 어천 운리 간의 웅석봉보다 더 높은 것 같다.

끝날 것만 같은 언덕이 다시 비탈로 이어지는데 갑자기 앞서 가던 짱아아빠가

새끼 멧돼지가 있다하며 걸음을 멈춘다.

긴장의 시간이 흐른다. 새끼가 있으면 어미도 가까이 있을 것이다.

자극하지 말자. 등산 스틱을 굳게 잡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생전 처음 산길을 가다가 멧돼지를 만난 셈이 된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다.

 

허위 허위 올라가는데 산길의 바위 계단이 조금씩 사람 손이 닿은 듯한 곳에

이르러서야 이제 정상이 다가옴을 느꼈다.

도대체 물을 얼마나 많이 마신거야.

오늘은 가방에 물을 4병이나 챙겼는데도 물이 모자람을 느꼈다.

 

오미와 송정 사이가 10키로 정도이니 한 3시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코스인데

아까 점심을 먹은 이래 거의 5시간이나 걸려서 의승재를 넘어야 했다.

대개 이제까지의 지리산 둘레길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시간보다 1시간 정도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렇게 벌었던 시간을 다 까먹고 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는데 그 시간에 마주 오는 둘레꾼이 있다.

지금 이 시간에 오미까지 갈려는 계획일까?

숲길이 긴데 목적지까지 도착하기 전에 어둠이 가득찰 것 같기에 조심하라 했다.

 

내려가는 길도 너무 길어 중간에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들었다.

우리가 예정보다 늦었더니 민박집에서 전화가 왔다.

산 언덕 끝에서 도로로 나가는데 아주머니 몇 명이 올라 갈려 하고 있다.

설마 이 길을 올라가지 않겠지.

 

도로 저 편에 둥근 지붕의 황토방. 오늘 우리가 잘 곳이다.

황토방 쪽으로 가는데 계곡에서 몇 가족이 모여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우리 모습을 보더니 측은했던지 이동식 냉장고에서 얼음물을 한 개씩 꺼내준다.

순식간에 그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황토방 주인집 노부부.

이 곳에서 민박도 경영하고 일 없을 때는 서울 집으로 가신단다.

식사를 하고 짱아네는 아는 분들이 인근에 수련회를 왔다고 자고 온다며 가고

나는 혼자 둥근 황토방에 들어갔더니 방에 무언가 날개가 큰 것이 날라다닌다.

박쥐란다. 얼핏 보니 2마리다. 내게 빗자루를 가져다 주며 때려 잡고 자라기에

빗자루를 들고 날라다니는 박쥐들을 잡으려 했지만 너무 빨리 날라 박쥐를

잡는 것은 어림 반푼어치도 안되었다. 

불을 끄니 조용하다. 혹시나 내 잘 때도 날라다니지 않을까 해서

불을 끈 채고 소형 랜턴으로 어둠을 비추니 움직임이 없다.

 

시간은 8. 너무 피곤하다. 박쥐와 씨름할 힘도 없다. 에라 그냥 자자.

 

오늘은 내 생애 제일 힘든 걷기를 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