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2013년 메시아 싱어롱 참석

carmina 2013. 12. 17. 11:32

 

2013년 12월 16일

 

모테트 합창단 주관 메시아 싱어롱

 

가슴이 뛴다.

헨델의 메시아 중 마지막 곡인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첫 마디를 부를 때

첫곡인 '주의 영광'으로부터 이제까지 이어온

주옥같은 헨델의 음악이 여기서 대미를 이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멘 송.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끝없이

아멘을 부른다. 아멘 아멘.

 

서울모테트합창단이 매년 주관하는 메시아 싱어롱

9년전 처음 예술의 전당에서 할 때와 그 다음 해에 참석하고는

장소를 일산 아름누리로 이전한 뒤로는 참석 못하다가 다시 올해

예당으로 온다 해서 달력에 체크해 두었다.

 

메시아 전곡을 우리 부부합창단에서 두 번 연주했었다.

한 번은 한국어로 또 한 번은 영어로..

그래서 이런 대곡을 무대 한 번 서서 공연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안타까와

가끔 어느 단체에서 메시아 연주에 지원요청이 오면 가서 부르기도 하고

부천시립합창단에서 부천필과 함께 메시아 시민참여 공연 때도 가서 연주했었다.

 

내게 메시아 합창의 역사는 무려 거의 30년 전으로 흘러 올라간다.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교회 성가대에서 할렐루야를 부르긴 했어도

이 것이 메시아의 일부인 줄은 몰랐었다. 그다지 관심도 없었으니..

 

결혼 후 바로 해외현장에 나가 있었던 1년 동안 긴 긴 밤을 즐겁게 해 준 것이 메시아였다.

씨디가 아직 보편화 되지 않았던 시절.

영국의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하고 몬테베르디 합창단이 연주한 메시아 연주 씨디를 사서

씨디 플레이어가 없으니 테이프 3개 분량으로 복사한 전곡을

현장 숙소에서 악보를 보며 들어보기를 1년.

나중에는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까지 듣고 거의 전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릴 경지까지 즐겼다.

그러나 이 곡을 크지 않은 교회 성가대에서 하기는 무리이기에 기회가 없다가

몇 년 뒤 부부합창단에서 이 곡을 올해의 연주곡으로 하기로 투표로 결정한 뒤

한 해 내내 연습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뒤 이번에는 원어로 부르자 해서 또 한 해 연습하여 공연.

 

이런 경험을 그대로 묵히기 아쉬워서 매년 어느 단체던지 참여하여 부르고 싶은 욕심에

올해도 어느 합창단에서 메시아 객원단원을 모집한다 해서 문의했더니 나이가 많아서

안된다고 거절. 서러워라. 내가 젊은 사람들보다 낫단말야..

 

자주 하지 않은 음악이기에 일부러 시간있을 때 마다 녹음된 공연실황을 틀어 놓고

악보를 보며 혼자 연습도 했었다.

그러나 메시아는 악보마다 가사가 달라 오랜동안 연습한 악보가 아니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오늘도 역시 그럴 것이다.

 

예당 로비에 사람들이 모인다.

대개 교회사람들인 듯 서로 호칭이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이다.

외투와 가방을 맡기고 로비에서 안내를 맡은 아저씨에게 무늬있는 나비넥타이를

건네주며 내 목에 달아 달라 했더니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며 당황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나만의 공연이지만 그래도 메시아를 연주하는데

복장이라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이렇게 혼자 나비 넥타이를 맸다.

지난 번에 이 공연 참여했을 때도 어느 나이 지긋한 분이 그렇게 하고 온 것이

무척 보기 좋았기에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었다.

 

서울 모테트합창단은 우리나라 개인이 운영하는 독보적인 프로합창단이다.

공연을 볼 때 입장권을 구매하기보다는 초대권이 있어야만 가는 우리나라의 문화의식으로

예술가들은 힘들고 어느 음악의 장르보다 합창은 사람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에

한국에서 프로합창단이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80년대 중반에 윤학원씨가 만든 대우합창단이 몇 년동안 반짝 인기를 누리다가

그만 내분으로 사라지고 난 뒤 프로합창단은 창단되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년 뒤 외국에서 공부한 박치용씨가 창단한 모테트합창단은

다른 시립합창단과 다르게 품격있는 곡들만을 선정하여

진정한 고급 합창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로 인정받고 이제는 합창계에서 알아주는

연주단체로 꼽힌다.

 

특히 모테트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로서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발전한 14세기의 다성음악으로 각 선률이 독립적으로 진행하기에

화음만을 강조하는 그 어느 종교음악보다 훨씬 고급 음악에 속한다.

 

결혼 전에 시온성합창단이라는 곳에 입단하여 1년을 노래했는데

당시 지휘자가 우리나라 합창지휘의 선구자격인 이동일교수님이셨다.

이 합창단에서는 주로 무반주로 노래하는 모테트를 연주하고

악보도 주로 외국에선 원본을 구입하여 연습후에는 반드시 다시 수거하였다.

 

나는 합창을 거의 40년을 했지만 이제까지 합창을 한 기억 중에

시온성합창단에 있을 때 부르던 모테트 음악들을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최고의 합창으로

얘기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영정앞에서 이 노래들을 들려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이다.

 

무대에는 오케스트라와 쳄발로, 모테트 합창단 무대 그리고 가운데 솔리스트들

객석의 1층은 4개 구역으로 나누어 합창석, 2층과 3층은 관객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남편이나 아내 혹은 가족이 노래하는 곳에

같이 있고 싶어하기에 1층의 합창석에도 여자 남자가 섞여 앉아 있다.

 

첫 해는 테너 베이스를 노래하는 남자들이 무척 많았는데

이젠 인기가 시들해 졌는지 테너와 베이스는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소프라노 앨토는 거의 100명정도 되는 것 같은데 테너와 베이스는 각각 30명 정도 된다.

 

곡 중에 메리시마가 나오는 '깨끗게 하시리라'를 시작할 때는

지휘자가 객석으로 돌아서 사람들에게 메리시마를 편하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다.

메시아는 헨델이 작곡하고 영국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하였을 때

그다지 대규모의 합창단이 연주하지 않았다.

약 20~30명 규모의 소규모 합창단이 연주하였기에 지금도

메시아 원전연주를 하는 단체에서는 각 파트당 4~5명 정도의 인원으로 합창단을 구성해

노래하기도 한다. 나도 몇 년 전 이런 원전연주 단체에 객원으로 참여하여

원전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적이 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악보도 없이 내 옆에 앉아 있고

왼편에는 나처럼 제대로 차려입은 내 나이또래의 사람이 악보를 들고 있다

테너의 아리아로 시작된 메시아.

첫곡은 어렵지 않게 넘어갔지만 두번째 곡 부터는 쉽지 않다.

더욱 힘든 것은 내가 부부합창단에서 공연하여 입에 붙은 가사와

여기서 공연하는 악보의 번역이 조금씩 달라 애를 먹는다.

또 예술의 전당의 조명이 그다지 밝지 않아 희미한 악보를 보는 것도 힘들다

내 옆의 사람은 이런 일을 예상했는지 조그만 후레쉬를 준비하여 악보를 보다가

안내하는 사람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2주동안 감기가 들어서 기침도 많이 해서인지 메리시마 하는 부분에

목소리가 매끈하게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간다.

 

악보없이 앉아 있는 노인들이 음악이 별로라며 투정한다.

오늘 공연의 성격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오늘은 모두 연습없이 즉석에서 공연하니 당연히 다듬어진 합창을 들을 수가 없다.

그걸 가지고 불평하고 있으니 오늘의 공연 취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곡들은 무난히 넘어가는것 같은데

느린 곡에서 오히려 잘 맞지 않는다.

아마 지휘자의 지휘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그렇게 엇박자가 나는 것 같다.

 

싱어롱은 내가 음악을 남들 앞에서 노래하게 된 최초의 말이다.

중 3시절 교회의 친구의 권유에 이끌려 찾아간 인천 YMCA Sing Along.

학생들과 청년들이 모여 새로운 노래들을 배웠다.

외국 민요와 가곡,  번안가요들 그리고 국내의 포크송 가수들의 노래들을

기타 반주로 한소절 한 소절 따라하며 배웠고

목소리가 조금 컷던 나는 가끔 리더가 그 날 배운 노래들을 앞에 나와 불러보라는  

권유에 이끌려 남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단골 손님이었다.

 

6남 1녀의 형제들중 4남으로 자라면서 형들과 동생들 틈새에 끼어 소심하게 자라던 내게

처음으로 남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좋았던 모임, Sing Along.

믿음 좋은 교인이 주일 예배 빠지지 않듯이 꾸준하게 모임을 참석하여

내가 입대하기 전에는 그 모임의 리더가 되기도 했다.  

며칠 전 이사를 하며 그 당시 일주일에 한번씩 손으로 그린 악보를 등사하여 판매한

30원짜리 악보들을 묶은 바인더안에 노란 갱지의 악보 모서리가 부서질 정도로 낡아

먼지가 켜켜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이 신기해 한 적이 있었다.

아빠 결혼 전에는 그게 보물 1호였다 라고 얘기하니 아들도 무척 신기하게 보았다.

지금도 그 악보만 있으면 기타와 함께 밤을 새워 노래할 수 있다.

 

싱어롱.

요즘 미국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에 나오는 노래도 싱어롱 한다 하던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 정도의 수준은 안되는 것일까?

 

공연을 마치고 나오면서 모두 삼삼오오 몰려서 웃으며 소회를 이야기하는데

나는 구석에서 나비넥타이 빼고 바바리 걸치고 퇴근길 복장으로 바삐 예당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내겐 기쁨과 음악에의 포만감을 가득 채운 날이었다.

 

해마다 한 번.

이런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친구들과 여럿이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지만 사람 없다고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안타깝다.

그리고 이 멋진 찬양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런 공연을 즐길 것이다.

 

음악이 없는 내 인생을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내 생애 최고의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