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3일 금요일 저녁에 눈이 온다.
물론 뉴스에 눈소식이 있었기에 당연히 올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퇴근 무렵 전철에서 내리니 조금씩 시작한 눈 발이 금방 굵어진다.
올 겨울 들어 제일 먼저 몸으로 맞이하는 함박눈이다.
금요일 저녁이면 교회의 심야예배를 가는 아내가 눈발이 굵어지니
가다가 돌아 와야 할 정도로 퍼붓는 눈발.
눈을 핑계삼아 오랜만에 가족들과 낮에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한
처남댁의 세아들과 길거리로 나가 눈싸움을 하고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뉴스에 내일 날씨가 춥다며, 최근 사망한 김정일의 심근경색을 예로 들어
10가지 고질적인 질병을 얘기하며 이 중 2개 이상이면 내일 활동을 자제하는게 좋다고 권장한다.
그 때부터 아내와 딸이 내일의 나들길 걷기를 거의 협박 수준으로 적극 만류한다.
밤 거리는 이미 눈 때문에 도로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차들이 길게 늘어 서 있다.
할 말이 없어진다. 내일 상황봐서 하자고 우선 설득해 놓고..
크리스 마스 이브.
아침에 눈을 뜨니 도로에 눈이 녹아 주행하는 차들도 막힘이 없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도 있는 걸로 보아 날씨가 푸근해 눈이 많이 녹은 것 같다.
자 이젠...거대한 벽을 뚫어야 한다.
협박에 가까운 만류를 나도 협박 수준으로 대응해 겨우 겨우 집을 나오니
눈 덮힌 나들길을 걸을 수 있다는 기분에 아침의 상쾌함까지 더해 하늘을 날 것 같다.
강화로 가는 길의 벌판에 수확을 끝내고 갈아 엎은 논에 흰눈이 덮혀 있는데
마치 처음부터 하얀 흙을 엎어놓은 것 처럼 부드러움으로 다가 온다.
아침 햇빛이 벌판에 비스듬하게 비치니 대지를 덮은 흰 눈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빛난다.
늘 보던 얼굴들이 강화터미날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올해는 나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며 반가워한다.
이젠 모두 정이 들대로 들어 무언가 서로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
오늘은 모두 두터운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하고 신발에 스패츠를 덮었다.
약 30명의 길벗들이 행군을 위한 완전 군장 완료.
차 하나 다니지 않은 나들길 6코스의 시작은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로 길을 연다.
일부러 앞에 사람들 발자국이 없는 눈 길을 골라 걸으며 겨울길에서 나만의 즐거움을 찾는다.
길을 가다가 길 옆 집의 마당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조그만 강아지들이 길벗들을 맞이한다.
한 6마리 정도 되는 비슷한 모습의 강아지를 모두 품에 안으며 즐거워 한다.
산길로 접어 드니 작은 언덕임에도 길이 미끄럽다.
약수터에 물을 마시지 않고 그냥 지나칠리 없는 나이지만 너무 찬 물에 이빨이 시릴 것 같아 참았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가득한 숲 속으로 들어가니 하늘은 구름한 점 없지만
나무 가지에 쌓여 있던 눈들이 바람에 날려 숲 속에선 함박눈이 내린다.
이렇게 좋을 수가..
모두 탄성을 지른다.
지난 수요일 걸을 때는 눈을 맞으며 걸었다며 더 멋있었다고 자랑하는 다른 길 벗들.
눈이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제 새로 산 스패츠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 올 정도다.
며칠 전만 해도 낙엽을 밟으며 와삭거리는 소리에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은 눈을 밟으며 뽀드득 거리는 소리에 더욱 즐겁다.
아침에 급히 나오느라 카메라를 챙기지 못한게 무척 아쉽다.
눈이 좀 더 많이 왔더라면 나무 가지에 쌓인 눈들이 무척 소담했을텐데
아무래도 눈 많이 오는 날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다.
감기와 연이은 송년회 때문에 일주일 동안 무척 힘들었는데 너무 오고 싶어서 무리를 해서 왔다는
길벗 한 분이 별로 걷지 않았는데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잠시 쉬면서 따뜻한 음료를 나누어 먹고 나들길 최고의 간식 술빵을 나누어 먹는다.
무척이나 추울 것 같아 잔뜩 껴 입었던 방한복들도 나무가지위에 쌓인 눈처럼 한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 3대가 온 나들길 열성파 가족도 무척 즐거워 한다.
해가 조금씩 높이 솟으면서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빛이 들어와
바람에 흩날리는 눈가루를 비추니 마치 지난 해 히트한 3D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같다
그 장면이 너무 멋있어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한 명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로 길고 흰 날개를 가진 천사가 강림할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이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한 빛일까?
6코스 최고의 길은 선원사를 향해 가는 능선이다.
오늘로써 이 길을 벌써 3번째 걷지만
완만하게 구불거리고 평탄한 좁고 길게 뻗은 길이 매번 걸을 때마다
내 나름대로 이 곳에 평점을 10점 주고 싶다.
마주 오는 2명의 아가씨에게 인사하고 어디서 왔느냐 물으니 이 길을 왕복하고 있다 한다.
아..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멋있는 길을 왕복하면 자꾸 엔돌핀이 솟을 것 같다.
언덕길을 흰 동앗줄을 잡고 내려 갈 때는 동앗줄보다 비닐 비료포장용지가 아쉽다.
이 언덕에서 포장용지를 엉덩이 밑에 깔고 앉으면 내가 영화 ET의 아이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선원사에 도착하니 부처님이 자리를 이동하셨네.
텅빈 공간에 혼자 좌정한 모습이 쓸쓸하셨을까?
선원사내 황소 모형의 배에 눈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버려
그만 소가 소변보다가 얼어버린 것 같아 한참 웃었다.
기분이 좋으면 날아가는 새 똥구멍을 보고도 웃는다 했는데 오늘 내가 그 꼴이다.
선원사를 지나 마을길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11시 방향의 논둑에서 무언가 바삐 뛰어 달아난다
작은 고라니 한 마리가 우리의 발걸음에 놀라 논둑 몇 개를 순식간에 넘어가더니 시야에서 사라지는
저편에 멀리 수많은 가창오리떼가 하늘을 뒤 덮으며 날아 오르더니
우리가 지나가는 하늘 위로 끼룩대며 날아가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우리 앞길로 해서
멀리 사라진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나무와 바다 그리고 하늘만이 아니고
자연이 창조한 동물들까지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한다.
늘 옆으로 지나치기만 하던 오래된 집하나.
오늘은 일부러 내부를 담 넘어로 보니, 무슨 서원이더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곳이 서당이었음을 알려 준다.
아이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읊어대는 천자문 소리가 오래 전에 이 곳에 가득했겠지?
그런 서당의 기운을 받아서일까?
서당 뒤에는 유행가의 가사를 작사하는 분의 작가쉼터가 있고
오늘도 예외없이 길벗들 지나는 길에 사탕과 커피와 버너와 컵라면까지 가져다 놓아
길벗들을 즐겁게 한다.
아마 소수인원이 걸으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고 갈 법도 하다.
어느 날은 무언의 그 성의를 거절하지 않으리라.
눈 덮힌 길이 잘 다듬어져 있다.
누군가 아침 일찍 눈 길을 치워 놓은 듯 하다.
강화에서는 각 마을의 이장에게 일정액을 지원하여 이렇게 눈이 오면
트랙터에 고무막대를 달아 마을의 신작로에 쌓인 눈을 치운다 하며
같이 걷는 강화군청에서 나온 나들길 담당자가 설명해 준다.
다시 숲속으로 이어지는 나들길.
여전히 솔솔 부는 바람이 나무에 걸려 있던 눈들을 쓸어 내리고 있다.
눈이 날린다.
오래 전 청년 시절 강화에 있는 어느 교회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주 이 곳에 왔던 어느 겨울에 김소월의 시로 작곡한 이런 노래를 가르친 적이 있다.
눈 오는 저녁
바람자는 이 저녁
흰 눈은 퍼 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 눈타고 오시네
저녁 때 흰 눈은 퍼 부어라
눈이 나린다.
하늘에 구름한 점 없는데 눈이 나린다.
오늘 같은 날 강화 시골집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하루를 지내고 싶다.
오늘은 나들길 송년회라 오전만 걷고 나들길 쉼터에서
식사를 다 같이 하고 여흥 시간을 갖기로 했다.
명색이 크리스마스 이브라 내가 작은 프로그램을 하나 준비했다.
모두들 아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다 같이 불러 보기로..
쉼터 주인이 미리 구워 놓은 고구마를 먹고
맛있는 닭도리탕을 나누어 먹고 노래를 부른다.
흰 눈사이로 썰매를 타고
루돌프 사슴코는
창밖을 보라.
겨울이 깊어 간다.
누구나 가슴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만큼이나 가슴 설레는 나들길을 길벗들과 같이 걷고
다같이 어깨를 마주하고 노래를 한다.
이 나들길 쉼터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다 해 조금 아쉽다.
참 좋은 장소였는데..
그렇게 올해 하루가 저물어 간다.
올 한해 나들길로 인해 즐거웠고,
그 어떤 해 보다 토요일이 기다려 졌고
걷는 즐거움에 폭 빠졌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올해는 제주도 올레길, 강원도 바우길, 동해안 해파랑길의 일부인 영덕 블루로드,
지리산 둘레길, 시흥의 늠내길 완주 등등 다니면서
비록 비 때문에 혹은 먼 길 때문에 힘들게 걷는 날도 있었지만
그 힘든 것조차 기쁨과 만족으로 표현하기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같이 걷는 나이 많은 분들이 부럽다.
나도 그렇게 나이들어 오래 오래 걸을 수 있을까?
혹시나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걷는게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지?
Carpe Diem
내일은 내일이다
하쿠나 마타타
오늘은 나 만의 지상 최고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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