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번외코스 (삼화실 - 하동읍)

carmina 2013. 8. 21. 19:40

 

2013. 8. 17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을 에둘러 가는 약 300Km 의 긴 길이다.

그런데 그게 한 선을 따라가는 원형이 아니고 중간에 약간 번외코스가 있다.

오미에서 난동으로 가는 길이 산으로 가는 길과 섬진강을 끼고 가는 길이 두갈래 있고

오미에서 당재 가는 짧은 길 그리고 삼화실에서 하동읍으로 가는 짧은 길이 있다.

 

대개 둘레길 일주를 하는 둘레꾼은 여기서 고민을 해야 한다.

번외코스까지 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한 바퀴 돌면 되는 건지..

원칙은 없다. 그냥 하고픈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꼭 코스별로 돌 필요도 없고 중간에 빼 먹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이가 없다

그냥 자기 만의 다짐이다.

 

오늘 내가 걷기로 한 길도 일명 짜투리 길인데 일부러 시간이 남아서 걷거나

혹은 짧은 일정에 걷고 싶을 때 걸으면 된다.

 

삼화실에서 대축으로 가는 길의 서당마을에서 하동읍으로 가는 등급 "하"의 코스가 있다.

오늘은 너무 더우니 그 낮은 등급의 길을 선택해서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기로 했다.

식사 전에 마을 앞에 몇 개의 비닐하우스를 기웃거려보니 모두 취나물을 재배하는데

자동으로 물을 뿌리는 장치가 있어 비닐 하우스의 내부가 산에 걸린 안개보다 더 진하게

물방울이 퍼지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 말씀이 이 동네는 벼농사보다 이런 취나물, 감, 고사리, 블루벨리 재배등으로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어제 그제 물 때문에 힘들었으니 오늘은  물병을 4개나 챙겨 넣었다.

민박집 마당에 빨간 고추가 탐스럽게 태양빛에 선탠중이고 장독이 서서히 달구어지고 있고 마을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다.

지난 밤 마을 입구 정자와 텐트에서 잠을 잤던 아이들이 부시시 일어나 어슬렁 거리고 있는 사이를 지나가는데 길에서 할머니가 근대를 차곡 차곡 널고 있어 인사드리고

큰 길에서 바로 언덕으로 오른다.

 

아침부터 땀 흘리게 생겼네. 바로 경사진 세멘트 언덕

그래도 그제처럼 힘들지는 않아 다행이다.

길 옆에 넓은 마당에 갖은 야채를 기르고 있는 아주머니가

멧돼지가 고구마밭을 다 파 헤쳐서 먹어 버렸다고 투덜거리고 있다.

 

이 길은 서당마을로 향하는 길이다.

그런데 지도를 보니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거의 3.6 Km

거기에 서당마을에서 하동읍까지 7 Km 가 넘으니 쉽게 넘길 만한 코스가 아니다.

다음에 일주를 위해서는 서당마을부터 걸을테니 저축해 두는 셈 치자.

 

언덕을 한 참 올라가는데 나보다 체력 좋은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서 올라가고 있다

이 저질 체력...

어디선가 발동기 소리가 들리기에 이 더운 날에 이른 벌초를 하는지 숲의 잔디를 깍고 있다.

 

남들이 단숨에 올라가는 언덕을 두세번 쉬며 허위 허위 올라가

이제 능선길 걷나보다 하고 안심하면 다시 언덕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다시 곧고 평탄한 길이 나오면 얼마나 고마운지...

 

언덕위에 작은 쉼터가 있는데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힘이 남아서인지

누구도 쉰 흔적이 없다. 나는 쉬고 싶지만 벤치가 지저분해 포기하고 다시 산길을 오른다.

 

산길에서 나를 앞질러 갔던 두 젊은 사람들이 저만치 앉아서 쉬고 있다가 내가 가니

다시 길을 떠난다. 오늘은 어차피 홀로 걷는 길이다.

내가 저 사람들과 같이 걷는 것은 민폐끼치는 일일테니...

 

오늘은 편하게 길을 걷다가 산길 위에 누워 하늘을 보기도 하는 여유를 부린다.

10Km 정도야 뭐 3시간, 늦어도 4시간이면 가겠지.

 

내려 가는 길도 어제처럼 가파르지 않아서 좋다.

천천히 숲을 밟고 내려가는 길.

엄지발가락이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발톱빠지는건 아닐까?

지리산의 대나무 숲 사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분다.

대나무의 마른 잎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1시간을 족히 걸었으니 서당 마을이 나올만도 한데, 아직도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내가 다른 길로 온 것은 아닐까?

이 곳의 둘레길 이정표는 색깔이 좀 다르다.

보통 둘레길을 시계방향으로 가면 까만 화살표, 역방향으로 가면 빨간 화살표를 보고 걷지만 서당마을부터 하동읍까지 가는 화살표 색깔은 순방향 역방향 모두 녹색이다.

길을 잃어 버릴 염려는 없지만 걷다가 혹시 내가 서당마을을 지나 대축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가질 때도 있다.

 

2시간 정도 걸었나? 멀리 집들이 한 두채씩 모습을 드러낸다.

서당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몇 마리 개들은 내가 옆으로 지나가도 짖지도 않는다.

너무 더위에 지쳤나? 그 아래에 아주 오래된 집과 바로 그 뒤에 제대로 지어진 집이 있다.

오래된 집 처마 밑에 나무를 가지런히 잘라 놓은 모습이 이색적이다.

주인의 부지런함이 보인다. 마당도 깨끗하고

물이라도 보충하고파 길가에 나와 있는 아저씨에게 인사하니

자기도 고향은 이곳에지만 도심에 나가서 30년을 살다가 다시 들어왔단다.

얼굴은 까많게 그을렸지만 머리를 뒤로 땋아 가지런히 묶은 것이 장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인적없는 서당마을. 여기서 대축으로 가는 길과 하동읍으로 가는 길이 갈라 진다.

그 갈라지는  곳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정자가 있어 또 한 번 길게 누워 하늘을 본다. 오늘은 신나게 여유있게 걷는 날이다.

 

논 뚝을 따라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고

들에 빈틈없이 자라는 벼와 콩과 옥수수가 보기 좋다.

더구나 도로에는 고추를 말리고 있고...

 

나는 한가하지만 농부들은 무척 바쁜 계절이다.

이 뜨거운 태양 빛에 과일들과 곡식들을 잘 건사해여 수확을 많이 올릴 수 있기에...

 

이제부터는 평지를 걷지만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없다.

걷다가 나무 그늘이라도 있으면 잠시 쉬며 모자를 벗어 열기를 식히고

바람이도 조금 불면 서서 온 몸에 가득 쌓인 열기를 날려 보냈다.

길가에는 저절로 떨어진 밤송이들이 뒹굴고 있지만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지

떨어진 그대로 말라가고 있다.

 

어느 창고 옆을 지나는데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빈 공터에 보신탕용 개를 키우는지 많은 개들이 우리 안에서 시끄럽게 짖어댄다.

 

태양빛이 뜨거워 세멘트의 색깔도 거의 백색으로 보인다.

마치 중동지방의 모래빛 같은 색들...

평지도 이제 2시간을 넘게 걸은 것 같다. 물론 쉬는 시간을 포함했지만..

 

큰 나무 밑에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쉬고 있으려니 반대편에서 걸어 오는 젊은이가

땀을 뻘뻘 흘리고 지나가며 하는 소리에 기가 죽었다.

"조금 더 가면 무척 힘든 언덕이 나올 겁니다.

아마 1 Km 정도 올라 갈겁니다."

 

그 때부터 고민.

그제 한 2Km 의 산을 올라가는데 초주검 되었는데

오늘 또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닌지..

 

넓은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율곡 마을의 정자에서 쉬며 한 참을 생각했다.

이제 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점심먹을 시간도 되었는데 밥 먹을 곳은 없고 만약 올라간다면

배도 무척 고플 것이고 혹시 오미 송정구간의 의승재처럼 올라가다 힘들어 잠이라도 들게되면 하동에서 버스를 놓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양말을 벗고 엄지발을 보니 발갛게 부은 것 같아 누르니 아프고

엄지 발톱의 일부 색깔이 누렇게 변해가는 것 같다.

 

아직은 그다지 통증이 심하지 않으면 무리 했다가는 발톱이 빠질 상황까지

갈 수 도 있다는 걱정에 마을 뒤의 높은 산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안되겠다. 오늘은 여기서 걷기를 마치자.

이틀동안 폭염 속을 걸은 것만 해도 내게는 대단한 노력이었고

당초 목적했던 둘레길의 3코스도 넘어 걸었고

또한 이제 남은 6개 코스를 두 번에 나누어 가을 쯤에 걸으면 된다고 마음으로 결정하니

모든 것이 편해 졌다.

미련을 갖지 말자.

할 만큼 한거다.

가을을 기약하자.

감들이 탐스럽게 익은 지리산길을 기대하자.

올해 안에는 둘레길을 끝내야지....

 

그래서 택시를 불러 하동읍으로 휑하니 와 버렸다.

 

힘들었던 지리산 둘레길 여름 여행.

몇 십년 만에 전국이 폭염으로 뜨거울 때 이 길을 걸었다.

2년전에는 지리산에 폭우로 입산금지 했을 때도 걸었는데...

추억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열악한 조건에서 더 깊게 각인되는 추억들...

 

2013년도의 여름 지리산 둘레길 여정을 이렇게

노루꼬리만큼 길을 남기고 마친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