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산동 - 주천간

carmina 2014. 5. 4. 11:40

 

 

2014. 5. 2

 

지리산 둘레길 산동 - 주천간

 

방광마을에서 오전내내 걸어와 산동면사무소 옆의 화단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앞으로 갈 길을 준비한 자료로 미리 검토를 해 보고 숙소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또 어떤 높은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면사무소 옆 도로를 지나는데 지나가던 승용차가 내 옆에 서더니

수락폭포로 가는 길을 몯는다. 내가 배낭을 멘 것을 보면 이 곳 지리에 익숙치 않은 여행자인 줄 알텐데 그 여자운전자는 참 센스도 없네.

차라리 동네 사람에게 물어 볼 것이지...

 

길 옆의 도로에는 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만 하는 코스를 가다보니 도로 길이 여기 저기로 갈라진다.

그래도 갈 방향을 정해 준 희미한 이정표를 찾아 걷는데 

옆 길의 삼성교 앞에 어떤 여자 둘이 차를 세우고

계곡 옆 나무에 매달려 무언가를 따고 있어 멀리서 물어 보니 뽕나무란다.

아하...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따는구나. 길을 가도 자연을 잘 알면 먹을 것이 생긴다.

 

길가에 표시된 둘레길 지도에 송정과 오미사이의 둘레길 지선인 목아재-당재간의 짧은 코스가 자꾸 시선이 간다. 한 코스로 적당치 않은 짧은 거리일 뿐 아니라 교통이 불편하고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걸어서 나와야 하는 길이라

일부러 작심하고 그 길을 걷기 위해 나서지 않는 한 어려워 진즉 포기했다.

 

길을 가면서도 비록 차는 안다니지만 지금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속도로를 따라  계속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마침 동네에서 일을 하는 아저씨에게 다음 목적지인 현천마을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이 길이 맞다기에 멀리 보이는 산을 가르키며 천왕봉이 어디인지 물었더니 여기서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산들은 모두 지리산 줄기들인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한다.

 

집 뒤의 골목안에 있는 사당 대문에 커다란 태극마크가 이상해 물었더니

마을의 효자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란다. 그런 것에 호기심을 가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숲 속의 흑염소들과 서로 눈싸움을 하고

고속도로 밑의 지하 차도를 지나 커다란 돌로 마을 이름을 표시한 현천마을로 향했다.

 

다시 한적한 마을 언덕 포장길로 올라가니 집집마다 농사일로 바쁘다.

비록 농촌이지만 이 곳의 집들은 모두 깨끗해 보이고

집집마다 잘 다듬어 놓은 넓은 정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 농사가 아닌

기업형의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 같았다.

 

마침 어느 집에 문을 열어 놓고 가족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인사하고 들어가 하는 일을 물었더니 취나물을 말려서 깨끗하게 포장하여 전국에 배송하고 있다며 박스를 열어 보여준다. 요즘은 택배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 시골에서도 이런 농작물을 판매하여 도시민들의 수입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여유있게 살고 있다.

 

현천마을의 쉼터인 듯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반대편에서 걸어 온 듯한 나이든 부부와 서로 인사를 하며 정보를 교환한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갈 길을 묻고 그 들은 내게 그들이 갈 길을 묻는다.

그들은 하루에 어느 정도 걷고 먹을 곳 숙박 할 곳을 미리 알아 두어야 하는

장거리 트레킹의 원칙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도심처럼 아무 곳이나 가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고 돈만 내면 잘 수 있는 줄 아는가 보다.

 

내가 지난 밤에 마을 회관에서 돈을 내고 잤다 하니 제주도올레길은 마을회관 숙박은 공짜인데 왜 돈을 받는지 의아해 한다. 나는 왜 올레길은 돈을 안받는지 되묻는다.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 적정한 비용을 내는 것은 당연한 법인데...

그 들에게 둘레길 안내센터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 도움을 청하라 했다.

 

맑고 깨끗한 작은 저수지가 있고 냇물이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 저수지 둑길로 해서 다시 숲길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 좁고 아기자기하여 이런 길을 만들어 준 둘레길 기획자가 고맙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농부들이 기르는 농산물을 함부로 따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한 무례한 행동이 집앞길, 개인 소유지의 밭길과 산길을 내준 마을 주민들을 화나게 하여 자꾸 계속되면 어느 순간 모든 길을 닫아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술길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며 가는데 모퉁이를 돌아가니 멋진

나무 두 그루가 연관마을 입구에 몇 백년 풍상을 견뎌 낸 듯한 거목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참을 서서 나무를 바라 보며 감탄했다. 마치 부부의 삶을 보는 것 같다.

 

나무는 몇 백년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면 길을 지나는 동네의 마을집들은 거의 폐가 수준이다. 아무도 살지 않은 집들도 보이고 정리하지 않아

거의 쓰레기더미처럼 버려진 창고도 있다.

 

계척마을로 가는 소롯한 숲길을 간다. 사람들보다 짐승들이 더 자주 다녔음직한 숲길에는 솔잎들이 하얀 세멘트길을 덮어 더욱 운치가 있다. 세멘트 길을 걸어도 이런 길을 걷는다면 좋을 것 같다.

 

숲이 우거진 그늘 모퉁이길 나무 옆에 돌무더기가 잔뜩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음직한 흔적이 보인다.  

우거진 나무들의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듬성 듬성 길에 무늬를 새긴 산길을 걷고 어느 작은 공간의 나무는 누군가 가운데 부분의 껍질을 의도적으로 깨끗하게 벗겨 놓았다.

 

벗긴 껍질이 나무 아래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봐도 나무를 죽이려는 것보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 고육지책의 방법을 쓴 것 같다.

벗겨 낸 부분이 깨끗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왜 그랬을까?

혹시 나무를 말라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무수히 많은 나무들 중에 불과 2 그루만 그렇게 해 놓은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지리산은 넓은 임야를 이용하여 멋진 산소를 만들고 아주 큰 나무를 심어 이정표로 삼은 곳이 자주 보인다. 산에 올라가서 보면 마주 보이는 산 중턱의 한가운데쯤에 나무를 베어내고 커다란 가족묘를 조성한 것을 자주 본다. 계척마을로 가는 곳에도 그런 묘가 있다.

 

숲을 빠져 나와 마을 앞 저수지가 보이는 길을 걷다가 그만 발길을 멈추었다.

길가에 움직이지 않는 작은 뱀 한 마리.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고 가만히 보니 머리를 살짝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스틱으로 건드려 볼까 하고 망설이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셔터 소리에

머리를 틀어 서서히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수지 한 구석에 낚싯대 여러개를 드리운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수면을 응시하고 있고 길 옆 집 마당에 할머니 한 분이 평상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계시기에 인사하며 마당에 들어가 평상에 앉았더니 어디서 왔으며 왜 혼자 걷느냐는 둥 묻는다.

마당의 수돗가에 스테인레스 요강과 비닐로 항아리 입을 꼭 막아 둔 작은 장독대가 어린 시절 우리 집 같았다. 그 시절에는 비닐이 없으니 삼베보자기를 덮어 놓았었다.

 

이 동네는 특이하게 각 집집마다 돌담에 커다란 풍뎅이 모형을

붙여 놓았다. 호기심에 스틱으로 툭 쳐보니 뚜껑이 열리며 전기 배관이 보였다. 아! 이 풍뎅이 모형이 밤에 골목길 가로등을 대신하는구나. 참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마을을 지나가는데 넓은 마당이 있는 집 앞에 머리칼이 은빛같이 하얀 할머니에게 머리칼이 너무 아름답다고 인사드리니 예쁘게 웃으시는데 얼핏 문패를 보니 혼자 사시는 것 같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이 아직 살아 계시다면 아마 이 모습일 것 같다. 

길을 가다 멈추고 나는 마치 동네 사람처럼 할머니랑 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 두런 나누었다. 

 

계척마을 입구 게시판에 이 곳이 봄이면 산수유축제로 유명한 마을임을 알려 준다. 축제 기간 중 사람들이 꽃 구경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행사를 가질 수 있도록 공원도 조성해 놓고 편의 시설도 만들어 놓았다.

 

예정된 숙소로 찾아가는 도로 한가운데 흙 더미에 이상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혹시 곰 발자국이 아닐까? 만약 이게 개발자국이라면 여러개의 발자국이 찍혔을텐데 군데 군데 찍힌 것으로 보아 개 발자국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근처 동네에 이렇게 큰 개를 기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개발자국이 이렇게 크지도 않고 발자국과의 거리도 개의 몸길이보다 훨씬 길으니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이건 곰발자국일 것이다. 산속 길을 걸으면서도 가끔 곰이 보일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길가에 거대한 나무가 있기에 안내판을 보니 수령 600년인데 나무이름이 무척이나 생소한 푸조나무라 한다. 이제껏 길을 많이 다녀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아무도 없는 체육공원은 깨끗해 보였고 주위의 화장실도 독특한 외관으로 보기 좋았다. 이 곳 옆에 펜션에 들어가 혹시 주인에게 학생들이 와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오지 않았단다. 이상하다. 아까 탑동마을에서 나보다 먼저 떠났을텐데..

 

샤워로 땀을 씻어 내고 넓은 펜션 주위를 구경하고 뒷산의 편백나무 숲을 한바퀴 돌고 오니 그 사이 도착한 학생들이 내게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남은 시간을 학생들과 얘기하고 그 들이 식사하는 사이

나는 아저씨와 같이 저녁을 먹으며 요즘 세월호 침몰 사태로 취소된 각종 행사들로 무척이나 경영에 힘들다는 불평을 듣고 늦게 들어 오니 어두워졌다.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조용해진 시간에 밖으로 나와 보니

어제 밤에 보지 못한 별이 하늘에 가득하다. 펜션의 여기 저기 켜 놓은 불을 끄면 더 많은 별을 볼 수 있을텐데 조금 아쉽다.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어제 걷기를 중단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 산으로 올라갔다. 편백나무 숲으로 올라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라서 얼마 오르지 않아 등산복을 가벼운 것으로 바꿔입어야 할 정도로 땀이 흘렀다.

 

20만평의 대지에 50년전 땅 주인이 편백나무를 심었다는데 그 울창함이

거대하여 입을 딱 벌릴만 하다. 숲의 중간 중간에 벤치와 평상을 놓고 쉬어가게 만들었고 누워서 나무를 삼림욕을 할 수 있도록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비스듬한 의자도 있다. 여기 저기 숲을 돌아다니며 볼 수 있도록 나무계단으로 만들어 놓아 이 곳에 소풍을 와 정자같은 곳에서 푹 쉬면서도 충분히 지리산의 명소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편백나무는 피톤치드가 제일 많은 나무라 하여 인기가 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둘레길은 큰 도로 밑의 계곡길로 이어진다.

거의 사람의 통행이 없음직한 계곡 숲길은 그 어떤 길보다 트레킹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옆에 오랜 세월 갖은 풍상을 견디며 쓰러지고 상처 입으면서도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꿋꿋이 살아서 푸른 잎을 하늘로 뻗고 있는 거대한 나무가 있어 한참을 바라 보고 사진을 찍었다. 때론 아치형 대나무 숲을 지나기도 하고 때론 계곡물에 발을 담고 싶을 정도로 자연의 멋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긴 계곡의 터널을 지나 밤재로 올라 가는 길에 예쁜 집 옆에 집주인이 주변에

농약을 뿌리고 있다. 아마 잡초를 제거하는 듯 하다. 집 주위를 철쭉으로 장식해 놓아 집은 꽃동산이고 그 옆의 어떤 가옥은 사람이 없는 빈집같다. 이런 곳에서 살며 민박이나 할까?

 

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차가 들어 오는 넓은 길이 있을 것이라고 아저씨에게 밤재가는 길이 힘드냐고 물으니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 왜 이 길의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되었을까?

트레킹 시간도 무려 7시간이나 책정되어 있고..

 

밤재로 올라가는 길을 누군가 일부러 꽃길로 만들려 작정했는지 색깔이 다른 철쭉꽃이 아름답게 줄을 지어 피어있어 카메라의 셔터를 계속 눌러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언덕위로 올라가며 내려다 보는 산 아래에 커다란 차도가 시원하게 뚫려서 먼 곳으로 이어진다. 차를 타고 달리면 이런 멋진 풍경이 있는지나 알까?

그러나 지리산 둘레길을 마지막으로 걸으면서 나중에 시간되면 차를 가지고 내가 다녔던 길들과 마을들을 다시 찾아가고픈 바램이 생긴다.

 

여기까지 걸어 오니 주천에서 출발한 사람들과 한 두팀이 마주 친다.

밤재 정상에서 백두대간으로 향하는 견두산 갈림길에는 화장실도 있고

물이 나오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수도꼭지도 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산꼭대기 정자에서 길게 누워 낮잠을 청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에 자리를 피해 주고 내려가는 곳에 지리산둘레길의 의의가 담긴 긴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있고 시인 박남준씨가 쓴 지리산둘레길 시가 적혀 있어 즉흥적으로 그 시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불러 보았다.

 

노래를 부르고 산을 내려 오며 '내가 흥얼거린 멜로디를 스마트폰에 녹음 좀 해둘걸' 하는 후회를 했다.

 

맞은편에  밤재와 주천을 오가는 순환코스가 있음을 설명해 주는 안내판 앞에

이제까지 보아오던 것보다 조금 모양이 다른 둘레길 이정표가 있다.

빨간색과 검은 색으로 방향을 일관되게 표시해 주는 날개가

다른 것보다 조금 작다. 왜 그럴까?  그 의문은 내려가면서 더 짙어졌다.

 

대개 이정표의 번호는 출발 점부터 시작하여 종착점까지 일관되게 이어지는데 다음에 마주친 이정표에는 번호가 밤재가 시작점이 아닌데도 1번으로 되어 있다. 그제서야 지금 보이는 이정표는 지역 순환코스를 알리는 다른 이정표임을 알 수 있었다.

 

큰 길로 내려가다가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누군가 이곳까지 올라왔다가 더워서 잠시 벗어 둔 옷을 그냥 잊고 올라갔는지 웃도리 하나가 나무에 걸려있다.

 

가파른 산속 언덕을 내려간다. 고요한 숲속, 이름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 길을 내려가면서 다른 길과 무언가 다른 것을 알았다.

 

대개 둘레길은 기존 숲길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내가 지금 걷는 길은

최근에 만든 새로운 길이다. 불도저 한대가 충분히 지나갈 만한 넓은 길에

산을 깍아 낸 자국에 아직 풀들이 덜 자랐고 길을 닦느라 밀어 놓은 흙도

아직 잡초들이 덮혀 있지 않았다.

 

내가 알기론 둘레길 코스 중에 이 곳이 제일 늦게 이어 진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억지로 길을 만드느라 중장비를 동원했고

다져 놓은 다른 곳에서 퍼온 잔돌을 덮어 놓아 비가 와도 흙이 쓸려가지 않고

걷기 편하도록 해 놓았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길을 내려가는데 길 옆에 검은 묘비가 묘지도 없는데 세워져 있기에 자세히 보니 묘지 입구를 알리는 비석이다. 아마 길을 새로 내느라 묘를 찾아 가는 길이 변경되어 일부러 세워 놓은 것 같다.

 

이 길은 방향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방향이 꺽어지니까

이야기에 정신팔려 아차 하고 지나가면 나중에 전혀 다른 길로 가야만 한다.

 

길가에 애기똥풀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아마 다음 달 쯤엔 이 곳도

여러가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을 것 같다.

 

내려 오는 길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쪽에 지리산유스호스텔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비록 내려오는 길이긴 하지만 거의 한 시간을 쉬임없이 내려 왔더니 힘이 든다.

 

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지나가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노래의 잔향이

내가 터널을 빠져 나와도 그대로 남아 맴도는 것을 즐겼다.

 

큰 길을 나와 걷는 방향이 다시 ㄷ 자 모양으로 꺽어져 터널 밑으로 들어간다. 무슨 길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둘레길을 걷는 이들이 유스호스텔측 앞을 통과하는 것을 합의하지 못했는지 옆 숲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공중걷기, 체험 학습관 등 각종 체험도구가 보이는 유스호스텔엔 평소같으면 사람들로 가득할텐데 최근의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이 곳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하다.

 

밤재를 내려왔을 때는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호스텔 옆으로 난 가파른 길로 다시 산을 오른다. 그래도 세멘트 임도를 걷는 것보다 힘들지만 이런 숲길이 더 좋다.

 

이 곳에는 숲속 여기 저기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더 자주 보인다.

계곡의 비탈길에 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계곡을 잇는 자연적인 외나무다리가 되어 버려도 쓰러진 나무 끝에는 여전히 파란 나뭇잎이 자라고 있다. 나무들은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어 길을 걸어도 외롭지 않았다.

 

언덕이 끝난 뒤 평탄한 숲속 오솔길이 이어진다.

계곡물은 상수원으로 쓰고 있다기에 일부러 손으로 물을 퍼서 마시고

얼굴의 땀을 씻어냈다. 

 

숲길에 바람에 날려온 꽃씨들이 무더기가 되어 큰 벌레처럼 이리 저리 움직여

살아있는 미물들처럼 보이고 길바닥에 죽은 곤충에 떼거지로 달라붙어

집으로 운반하는 개미들의 모습도 또 다른 볼거리다.

 

무너미계곡을 지나 고여있는 작은 물웅덩이에 바람에 날려온 송홧가루가

커다란 노란 띠를 만들고 있고 풀밭에는 노란 애기똥풀이 이어져 세상은

온통 노란데 멀리 보이는 소나무 숲에서 또 한번 바람에 휘날리는

거대한 노란 송홧가루 구름이 피어난다.

 

정문동 골짜기를 지나 가는데 조금 특이한 단독 고택이 하나 보인다.

입구에 말라 죽은 커다란 배롱나무가 있고 고택 옆에는 비석을 보관해 둔

작은 비각이 있다.

비석에 새겨있는 한문들을 대충보니 효자비인 것 같은데 천정 밑에

사람들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고택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듯 하여 마당에 잡풀이 잔뜩 자란 마당으로 들어가 사람의 손때가 모두 사라진 됫마루에 앉아 본다.

집의 형체를 오랜 기간 비어 있어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구석 구석 모든 물체에 빛을 잃었고 찢어진 문의 창호지와

굳게 잠가 놓은 방문의 자물쇠도 녹이 슬어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다.

 

무슨 사연이 있는 집일까? 집 주위에 커다란 대나무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귀양 온  선비의 집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냥 내 추측이다.

선비의 집이라면 하인들이 살던 별채가 있어야 할텐데 별채는 사라졌을까?

 

마당의 커다란 돌확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바닥에는 먼지만 쌓여 있었다.

만약 이 고택이 몇 십 년 전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면 하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선비가 이 마당을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택 옆에 별도로 만들어 놓은 비석을 보고서야 제대로 알았다.

이 곳에 유배 온 안동김씨가 살던 곳임을...

 

재뜰 앞의 넓은 저수지가 시원해 보인다. 특이하게 폐타이어로 축대를 쌓아

만든 집이 눈길을 끌고, 이름도 재미있는 내용궁마을의 조용함이 정겹다.

 

이제 길이 거의 끝나간다.

길 옆의 밭에는 인적도 못 느낀 채 밭일을 하는 부부에게 인사를 드리며

안경낀 도시형 얼굴의 아주머니에게 덥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괜찮다 하신다.

누군가 이 곳에 사시는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 마을 앞에

커다란 돌 비석을 세워 놓고 '어머니의 품같은 고향'이라고 크게 적어 놓았다.

 

밭에 손을 갖다 대면 찔릴 것같이 날카로운 잎을 가진 청보리가 익어가고 있다. 외평마을의 집 담에는 예쁜 색깔들의 꽃들이 피고 학교 마당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고요함만 가득차 있다. 학교 옆에 이상하게 생긴 돌 비석이 있다. 이건 어느 지방 풍습일까? 생전 보도 못한 이상한 모양이다.

 

예쁜 동네를 지나는데 나의 둘레길 완주를 축하해 주는 듯

빨간색 노란색 아치를 만들고 집의 담에는 누군가 꽃다발을 잔뜩 그려 놓았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0.8 Km, 0.5 Km, 03 Km 그리고 0.1 Km  드디어 골인이다.

마라톤 42.195Km보다 더 긴 약 280Km의 둘레길 대 장정을

5년동안 9번이나 내려와서 약 18일간을 걸어서야 끝이 났다. 

 

지선까지 합해서 전체 22개 코스인 지리산을 감싸며 도는 하트모양의 둘레길 중  내륙으로 향하는 교통이 불편한 목아재 코스 외에는 모두 걸었다.

지리산 둘레길 내 사랑.

 

5년전에 나보고 왜 쓸데없이 그 먼길을 걸을려 하느냐며 걱정하던

남원의 택시기사가 내려 준 주천골의 냉면집과 처음 길을 물었던 파출소가 반가왔고 새로 생긴 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와 출발점을 알리는 커다란 표시가 반가왔다. 안내센터 앞에 만들어 놓은 타임캡슐 우체통이 반가왔고

그 옆에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건물이 반가왔다.

 

이제 이 곳을 다시 찾는 것은 누군가 내게 길 안내나 동행을 요구하지 않는 한 힘들 것 같다. 

 

이제 대장정을 끝냈다. 끝냈다.

 

다음 목표는 제주도 올레길 일주며, 그 다음 목표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다.

내 목표를 위해 힘들어도 다른 즐거운 일을 조금 덜하더라도 성취하고 싶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