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가탄 - 기촌)

carmina 2013. 10. 15. 12:31

 

지리산 둘레길 (가탄 - 기촌), 2013. 10. 12

 

원부춘에서 가탄 넘어와 화개장터에서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은 포기했다.

시간상 화개장터에 다녀오면 기촌마을 도착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다

오전에 만난 할아버지가 화개장터에 보신탕 잘하는 집이 있다 해서 보신이나 할까 했었는데..

가탄 마을을 나와 화개천이 흐르는 위로 가탄교를 넘어서니 바로 유명한 쌍계사 벚꽃길이

양 옆으로 이어진다.

 

기촌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법하마을을 지나 작은재를 넘어 약 4Km를 걸어야 한다.

점심을 조금 참아야 하기에 배낭속의 간식으로 조금 허기를 줄이고 걷는다.

법하마을은 바로 다리 넘어에 있고 여기는 여느 시골풍경과 조금 느낌이 다르다

집이 다닥 다닥 붙어 있고, 약간 도시풍이 난다.

집집마다 인기척이 있고, 일을 하고 있는 집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느 집은 얼핏 보기에도 답답하게 작은 집도 있다.

 

그러나 마을을 조금 벗어나니 예쁜 꽃이 돌담 사이로 피어 있는 집도 있고 마을 정자도 보인다.

한 낮이 되니 더워서 정자에서 옷을 여름옷으로 모두 갈아 입었다.

그런데 정자에 작은 택배 물건이 하나 개봉하지도 않은 채로 놓여 있다.

워낙 착한 시골인심이라 누군가에게 배달된 물건을 택배기사에게 정자에 놓고 가라고 얘기했나 보다.

마을 끝에서 다시 산길로 접어 든다.

 

3일째 걷고 있으니 힘이 들어 이젠 산길을 올라갈 때 스틱 2개를 모두 사용한다.

산길을 구비 구비 돌아가는데 앞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등에 짐을 잔뜩 지고 내려오시기에

지나치며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채취한 밤이라 하는데 자루의 크기로 보아 거의 50키로는 됨직하다

실례인줄 알지만 연세를 물으니 무려 82살. 세상에.. 이렇게 건강하실 수가..

육체 노동은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젊게 만드는 것 같다.

 

산길로 올라가는 양쪽 계곡의 나무들이 무척 울창하다.

삼나무와 소나무가 죽죽 뻗어 있어 멀리서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부드러운 흙길이 좋고 금방이라도 숲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 것 같은 시누대 밭이 좋다.

특히 이 곳은 산소를 파헤쳐 이장하는 곳이 몇 군데 보였는데 아마 무슨 사정이 있나보다.

작은 재로 올라가는 적당히 경사진 언덕길의 부드러운 흙이 걷기에 딱 좋다.

 

이제까지 걸어 올라가던 산길은 조금 위압을 느꼈는데

이 곳의 산길은 올라가고픈 욕심이 생길 정도로 친근해 보인다.

예쁜 산길이라고나 할까?

산 그늘도, 돌로 만든 계단도 그림처럼 이쁘고,

적당히 자란 풀과 나무들이 뒷산에 올라가는 느낌이다.

적당히 땀이 나고, 적당히 힘들어야 올라갈 수 있는 곳.

 

그러나 이 곳도 산은 산이라 구비 구비 올라가는 것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

다른 곳에 비해 힘들지 않게 작은재에 오르니

이 언덕마루가 경상도 하동과 전라남도 구례의 경계선이다.

이 곳은 내가 올라온 길과 내가 갈길, 화개장터 그리고 촛대봉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다.

 

기촌마을로 가는 둘레길은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 곳의 능선길은 둘레길을 위해 정비한 듯

길이 돌둑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간혹 물이 고이는 낮은 지대는 돌로 징검다리를 해 놓아 다니기 편하게 해 놓았으며

어떤 곳은 우천시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빗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나무로 길도 내 놓았다.  

그래도 비가 조금만 오면 통행하지 못할 길로 변해 버릴 것 같다.

능선길을 돌아 돌아 가니 멀리 구례읍이 보이고

아주 큰 밤나무 농장이 있는 길로 더 내려가니

내가 이번 여행의 종착지로 생각한 기촌마을의 펜션이 보인다.

 

마을근처에 거의 다 왔을 때 큰 밤나무 농장에서는 수확을 끝낸 수없이 많은 밤송이들이

농장 구석에서 쌓여 있는데 이 밤송이들의 처리방법이 궁금하다.

그냥 두고 썩힐까? 아니면 다른 곳에 옮겨서 처리할까?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운동화와 반바지 차림으로 산을 올라가는 젊은이에게

밤가시에 강아지의 발이 아파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 했다.

이미 강아지가 발을 다쳤는지 작은 돌도 올라가기 힘들어 하고 있다.

 

마을 근처에 많이 보던 열매가 있어 길가 아주머니에 물어보니 산수유 열매라 한다.

이게 그 유명한 남자에게도 좋다는 산수유구나.

 

외곡교회 앞으로 해서 큰 도로로 나왔다.

이제 이번 둘레길 여정이 끝났다.

지난 번 식사를 했던 곳에서 점심을 먹고 구례가는 버스를 탔다.

 

이번은 조금 긴 여정이었다.

우선 적당히 휴가를 쓸 수 있는 기간이 있었고

여름휴가를 가지 못해 회사에도 핑계가 될 수 있었고

휴가를 가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던 일도 잘 마무리 되어 마음도 편했다.

 

무척 힘들었던 코스도 진행방향을 잘 선택해서 피해 갈 수 있었고

날씨도 밤중에 내린 비를 피해가서 다행이었고

시즌이 아니라 민박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아직 단풍이 덜 들어 가을의 정취는 덜 했지만

끝없이 이어진 탐나게 익은 감들과 무수히 발에 밟힌 밤톨들이

나를 가을 속에 푹 빠지게 했다.

모든 것이 매일 매일 감사의 조건이다.  

 

이제 남은 길은 어디인가?

주천에서 방광가는 2개의 코스,

오미에서 난동가는 중복코스,

그리고 굳이 안가도 둘레길 다 걸었다고 할 수 있는 2개의 지선코스중 한개.

 

올해 안에 다시 내려 올 수 있을려나.

달력을 보니 12월까지 여유가 없다.

 

그러나...뜻이 있으면 길이 있으리라..

 

잘있거라 지리산 둘레길아... 내 다시 오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