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인생의 큰 만남

carmina 2014. 5. 7. 15:03

 

 

2014. 4. 26

 

아들 6명 딸 하나인 우리 형제들.

이웃집에 서해의 풍도가 고향인 선한 모습의 부부와 외동아들이 세들었는데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아들많으니 나를 지목하며 양자로 삼고 싶다 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러마라고 흔쾌히 승락하고 나도 그 분을 늘 어머니로 생각하고

친한 이웃으로 지내던 어느 여름.

 

그 집 아들이 인천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와 내동생 두명을 데리고

여름성경학교가 열리는 교회라는 곳을 처음 데리고 갔다.

 

처음으로 배운 요셉의 이야기

넘겨가면서 보는 괘도에 가사만 써있는 찬송가들.

그리고 커다란 풍금, 책장에 책이 가득했고..

 

요셉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도록 본만 뜬 작은 책자를 집으로 가져와

그 형님의 집 마루에 앉아서 그리기도 했다.

당시 내겐 그림보다 책장에 있던 동화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런 내게 그 형님은 늘 그 책들을 빌려 주셨고

다른 곳에서도 책을 빌려 주곤 하셨다.

만화책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내게 동화책은 또 다른 세계였다.

지금도 나는 그 당시의 읽었던 동화들을 많이 기억한다.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내 동생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고 나만 열심히 다녔다.

매일 시험을 보고 틀린 점수만큼 손바닥이나 다리 혹은 허벅지를 맞아야만 하는 학교생활과

늘 혼만 나는 형들의 울타리를 벗어 난 새로운 세계가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리고 제일 큰 시련은 중학교 입시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가던 때라 입시를 앞에 두고

교회나가는 내 모습을 부모님이나 형들이 그냥 두지 않았다.

그 때부터 몰래 몰래 교회를 다니고, 무사히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중학교 올라가니 교회친구들을 모두 그럴 듯한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다녔다. 내겐...단지 졸업선물로 받은 기드온 재단에서 나온 작은 성경책 하나..

초등학교때는 괘도를 보며 찬송을 불렀는데 중학교 올라가니

괘도 없이 찬송가를 펴놓고 부르는데 나는 없으니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집에 감히 찬송가를 사 달라는 이야기를 꺼내지지도 못하는데

내 불평을 들은 누님이 어느 날 자는 내 머리맡에 찬송가를 하나 선물해 주셨다.

 

이 때 이웃집 형님도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부모님이 신앙이 없는데 외동아들이 신학대학을 가겠다니 청천벽력..

그러나 결국 그 형님은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셨다.

 

나도 교회생활하는 것에 대한 가족의 반대가 심하여

교회갈 때 찬송가 성경을 가지고 나가면 못가게 하니

찬송가 성경을 두터운 양회푸대 종이에 싸서 교회가는 언덕의 좁은 골목길의

남의 집 굴뚝 밑 흙을 파서 집어 넣었다가 교회 갈 때 꺼내 쓰고 올 때

다시 묻어두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밤에 비가 와 아침에 달려가니

그만 찬송가의 앞 뒤 표지가 젖어 너덜 너덜 한 것을 붙들고 얼마나 울었던지.. 

 

내가 중등부에 다니던 어느 해부터인가 그 분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가시고

그 분도 교회를 다른 곳으로 이사가셨는지 안 보였다.

나는 그 뒤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대학 1학년 시절.

그 분은 신학 대학 졸업 후 전도사가 되어 강화의 어느 마을에서 목회를 하는데

우리 청년부에서 그 교회에 여름성경학교를 열어주고 그 교회에서 하계수련회까지 가졌다.

당시 수련회 후 마니산 중턱에 커다란 일반 산장이 있어 그 곳에서도 아름다운 별을 보며 1박을 하고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에 올라가 둘러 앉아 예배도 보곤 했다.

 

그 해 겨울 어느 주일 오후에 교회로 내게 전화가 왔다기에 가서 받아보니

강화의 신현교회에 (교회 이름을 잊었다가 최근 그 분이 알려 주었다.) 중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나보고 강화로 오라기에 두말 않고 가겠다 했다.

우리 어머님도 이웃집의 청년이 목회하는 곳이니 반대는 하지 않으셨고

당시 교회에서 어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내가 늘 기타치며 노래를 리드했기에

시골의 교회학생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랬었다. 

 

한 밤에 혼자서 강화 불음면에 내려 신현리를 찾아가는 길은 눈이 덮혔고

나는 눈 길을 헤치며 기타를 하나 들고 산길을 가는데 저 앞에 웬 사람이 마주오고 있다.

산에서 사람 만나는게 제일 무섭다는 것을 많이 들어왔기에 겁을 먹고 그 자리에 섰는데

그 사람도 나를 보았는지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그러다가 내가 조금 앞으로 가면 그 사람도 앞으로 오고..

겁이 더럭 나고 등에 땀이 흘렀다.

안되겠다 싶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싶어 열심히 찬송가를 크게 부르며 걸어가다 보니

내가 사람으로 보이던 그 물체는 소나무였고 나는 그 때 부터 더 겁이 나서

멀리 불빛이 보이는 교회까지 눈에 발을 푹푹 빠지며 달려갔다.

 

그 때 그 곳 교회의 학생들에게 가르친 노래가 김소월의 시로 만든

'눈 오는 저녁'이란 노래였다. 당시는 복음송이 없기에 이런 노래를 주로 교회에서 불렀었다.

 

내가 군 시절, 부대 안에 교회를 짓기 위해 대대 군종과 나를 포함한 중대군종 몇 명이

여름 내내 땀을 흘려 화학창고로 쓰이던 콴세트 건물을 교회로 개조하는 작업을 한 후

군대에서 지원되지 않는 교회 내부 비품구입비용을 지원받기 위해

여기 저기 아는 교회를 찾아 다녔을 때도 이 분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 봉헌식에도 와 주셨었고...

 

몇 년 뒤 내가 군대 제대하고 난 뒤, 그 분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경기도 군자쪽에서 목회를 하니 나보고 주말마다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성가대 지휘를 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두말 하지 않고 승락했다.

이때가 내가 처음 성가대 지휘를 시작한 것 같다.

 

그 때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면 나는 기타를 메고 수인선 열차를 타고 군자로 가서

넓은 벌판의 한 구석에 있는 교회에서 저녁에는 학생들과 성경을 읽고 노래를 가르치고

주일이면 오전에 성가대를 이끌었다. 당시 인근 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성가대 지원을 나오곤 했다.

 

그 교회는 큰 농장을 경영하는 장로님이 후원을 하고 있었는데

돼지를 많이 키우고 있어서 매주말이면 돼지를 잡아 시장에 팔기도 하여

내가 갈 때마다 돼지고기를 많이 집에 가지고 오기에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이웃집 살던 형님이 목회하는 곳이고 학교 복학 전이라 주말마다 나가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매주 겨울까지 다니다가 내가 복학할 때 쯤 다닐 수 없게 되어 소식이 끊기고

그 뒤로 나도 졸업 후 직장을 다니고, 내 결혼식때 그 분에게 축하기도를 부탁드리고

결혼 후 몇 년 후 내가 사는 곳 가까운 곳의 교회에 부목사님으로 오셨다기에 방문간 김에

그 분 딸을 아내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도 데려가 가르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해, 우연히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그 분의 두 아들 중 작은 아들이 지병으로 사망해 각막과 시신 기증을 하셨다는 기사를 보고

수소문해서 연락을 드렸더니 아들 잃은 충격으로 도심교회를 떠나 경기도 여주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신다고 해 위로의 전화만 드렸었다.

 

그 뒤로 다시 몇 년. 그 분 소식이 궁금하여 여주교회에 전화드렸더니 그 분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혹시 감리교목회자 명단에 있을까 싶어 친구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는데도 찾지 못하던 중

우연히 풍도에 아직 그 분 아버님이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풍도가 고향인 우리 형수님에게서 듣고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은퇴후 경기도 안산의 대부도에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겨우 찾았다.

 

토요일 아내와 함께 대부도를 찾았다.

 

염전 옆에 별장같은 집에 사시는 두 분.

사연을 들어보니 여주에서 목회 후 구미로 가서 다시 목회했는데 은퇴 후 갈 곳이 없이

부친이 가까운 곳에 계시는 이 곳까지 오셨단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와 다정한 어투. 그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 했던지..

서로 보자마자 꼭 끌어안았다. 그 분도 나처럼 반가왔을까?

전세로 살고 있는 집도 내년 4월이면 이사가야 한단다.

주인이 별장용으로 쓰는 집이라니 아마 큰 가구들도 모두 다른 사람 소유일 것 같다.

집 앞에 족구장만한 넓은 마당에 각종 채소를 심어 보지만 염전 가까운 곳이라

잘 자라지 않는다며 웃어 버리신다.

 

하나 남은 아들도 목회자고 그리고 딸 둘 모두 목회자의 아내로 살고 있단다.

염전땅같이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그 분의 신앙의 뿌리는 이제 굳이 열심히 키울려 하지 않아도

대를 이어 갈 것이고, 다른 목회자들이 그다지 다루지 않는 성경의 한 장을 열심히 연구하여

또 다른 분야에서 인정받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신다.

 

틈틈히 공부하여 지난 해에도 외국의 신앙서적을 번역하여 출판도 하시고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생각하고 계시는 그 분이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힘들지 않은 생활을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다.

도심의 큰 교회 목사님처럼 되지는 못해도 인생을 가장 선하게 사신 분.

그 분의 손을 잡고 처음 찾은 내 신앙.

 

내게는 인생의 가장 큰 만남이다.

 

일부러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대부도의 제일 잘하는 칼국수집을 소개해 달라 해서

같이 맛있는 저녁을 즐기고 멀리 라스베가스처럼 오이도의 화려한 불빛이 보이는 

시화 방조제길이 참 아름다왔다.

 

내게 인생의 큰 길을 만들어 주신 분이 또 한 명 있는데

지금 먼 타국에 계시니 후에 그 분을 찾아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