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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결혼식 운동에 대한 소망

carmina 2014. 7. 19. 11:51

 

 

<<이젠 결혼한 지도 4반세기가 넘었으니 이런 글을 써도 아내가 뭐라 하지 않겠지..>>

 

요즘 호화 결혼식에 대하여 매스컴마다 한 마디씩 하고  조선일보에서는 특집으로 이 칼럼을 전면 배치해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있다.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의 식사 대금으로 1억원을 지불해야 하고

자녀 결혼식을 위해 부모는 또 빚을 져야 하고

노후를 준비해야 할 시기에 평생 저축한 노후자금을 아들 딸 결혼을 위해

모두 내 놓아야 하는 현실이 잘 못 되었다는 이제서야 깨닫고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작은 결혼식에 대해 사회적 인사들이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나도 2~3 년 안에 아들을 결혼시켜야 하는 나이로서 내 노후를 위해 대비를 못하고 있는

월급쟁이 가장으로서 결혼식이라는 것이 제일 부담된다.

가끔 아들에게 잘못된 요즘의 결혼풍습과 아빠가 어덯게 결혼을 했는지 알려주며

작은 결혼식을 유도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혼을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하고, 남을 초대해서 보여줄만한 결혼식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내게 자녀의 결혼식은 여전히 큰 산맥을 넘는 것과 같다.

산맥을 넘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 때부터 또 다른 빈곤에 시달려야 하고..

 

내게 요즘의 결혼식은 물론 이전의 결혼식 풍습은 모두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다.

1985년 직장생활 시작한지 5년째.

결혼을 결정할 만한 지금의 아내를 만났지만 내게는 이미 작은 결혼식을 오래 전부터

꿈꾸고 있었기에 결혼을 위해서 부모님과 결혼 자금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직장생활 4년 째 사우디에서 근무하는 해외 현장 생활을 통해

일반 급여보다 약 2.5배나 더 많은 급여를 받아 결혼을 결정해야 할 시기에

약간의 저축된 자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서울의 위성도시에 허름하고 작은 아파트 하나 전세를 얻으면

남는 돈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내의 가족도 가난한 개척 교회의 목사님 딸로 이제 막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해

겨우 작은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고..

교회도 상가 2층을 빌려 반은 살림집으로 쓰고 반은 예배실로 쓰고 있는 환경이었기에

결혼을 한다고 신부측에서 도움 받을 것은 꿈에도 생각 안했다.

 

그래도 내게 전세금 정도는 있기에 부모님에게 호언장담했다.

결혼 때 한 푼도 도와 주지 않아도 된다고.. 

유난히 아들이 많은 우리 가족이기에 이미 3명의 형님과 누님 한 분을 결혼시킨 상태라

나까지 결혼하겠다고 도와 달라고 손 벌릴 입장은 되지 못했다.

형님들과 형수님들에게도 모두 정식으로 공포를 했다.

아무 도움 받지 않을테니 대신 예단 같은 것도 바라지 말라고..

결혼하면 당연히 신부는 상대방의 가족에게 양복과 한복을 해 줘야 하고

신랑은 예단 바구니에 비싼 옷감들과 보석들을 챙겨 보내야 하는 당시의 풍습.

 

늦가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결혼하자고 결정한 뒤에 결혼 준비를 서둘렀다.

당시에 형제들 결혼은 모두 집 안의 며느리들이 맡아서 해야 하는 사회 풍토였기에

내 결혼식은 형수님들이 준비해야 하지만 나는 그 마저 거부했다.

남은 의식하고 준비해야 하는 결혼식이 싫어 내가 모두 결정해서 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이런 내 결정을 신부 가족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내 결정을 존중해 준 신부의 부모님이 고맙기만 했다.

 

우선 결혼식 준비 일정을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스케쥴관리기법을 이용해 작성하고

내가 준비해야 할 것들을 모두 챙겨 보았지만 제일 대책없는 것은 결혼 비용이었다.

가지고 있는 자금은 직장생활 4년 반동안 모은 750만원. 당시 내 월급은 약 35만원 정도

(이 글을 쓰면서 평생 내가 모은 월급명세서를찾아 보니 85년 8월에 35만 4천원이었다)

몇 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 생활이 불편한 어머니에게  내 직장생활 뒷바라지를

부탁드리는게 부담스러워 자취생활을 위해 미리 부천 중동에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나왔다

13평 주공 아파트 전세 자금이 700만원. 나머지 자금 50만원.

50만원을 들고 결혼을 준비해야 하는 막막함.

결혼식이 겨울철이니 신부에게 선물해야 할 겨울코트도 미리 신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름에 백화점 겨울의류 세일할 때 신용카드로 미리 사 놓았다.

 

제일 비용이 많이 드는 것 중의 하나인 신혼여행.

당시는 거의 모두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는게 일반적이라 그 비용을

적어도 몇 십만원은 지출해야 한다.

그래서 제주도를 포기하고 철도청에서 막 시작한 신혼열차를 타기로 했다.

그것도 절약했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는 한 술 더 뜬다.

모 화장품에서 나온 화장품셋트를 사면 더 할인해서 살 수 있단다.

 

주례는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 부탁해 놓았고

기도는 내가 어릴 때 처음으로 나를 교회로 인도한 청년이 목사님이 되어 부탁했고

축도는 아내 측에서 목사님을 모셔왔다.

결혼식 음악은 음악을 전공한 아내의 대학친구들과 내 음악 친구들 2 팀이 준비했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큼은 풍성하게 준비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나는 같은 생각을 한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서로에게 잘 맞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종교와 취미.

내겐 이 두 가지가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했다.

물론 그 외의 것으로 인해 불화가 생길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두 개의 조건은 오랜 삶을 살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나처럼 누구에게도 지원을 받을 만한 형편이 안되었기에

내 검소한 결혼에 동참해 주고, 서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결혼을 준비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당시 결혼에는 누구나 당연히 하는 백금반지나 다이아 반지는

서로의 이니셜을 새긴 18K 금반지로 대신했고

내가 받아야 한다는 고급 손목시계는 내가 결혼 전 해외 현장 근무시절에

모양이 이뻐서 사 놓은 일제 전자시계를 결혼시계로 간주하기로 했고

아내의 목걸이나 시계 등도 해외 장기 근무 동안 사 놓았던 것으로 대신했다.

 

이런 나의 생각은 해외 장기 근무시에 외국인으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었다.

현장 생활 중 어느 날 독일인 기술자가 잠시 출장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내가 배웅을 했는데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가방을 뒤져 무엇을 찾기에 물어보니 결혼반지를 찾는단다.

그래서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보니 장식하나 없고 큐빅하나 없은 무척이나 심플한 금반지가

결혼 반지라며 꺼내 보여 준다.

그 것을 보고 얼마나 쇼크를 받았던지..

우리네 결혼은 백금이나 다이아 반지를 낀 손을 자랑스럽게 결혼 예식 후 몇 달간 끼고 다니다가

부끄러워 모두 빼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특히 전철을 탈 때 사람들의 손을 보면 결혼 반지 낀 사람들이 별로 없는 걸 보면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안다.

현장 근무 후 귀국해서 그런 내용을  사보에 기고했더니 후에

장인어른 될 분이  그 글을 보고 딸에게 얘기했단다.

"얘야, 아무래도 비싼 반지를 받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라"

 

나는 지금의 아내를 직장 상관이 처제를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소개해 주기 전에 교회를 다니고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먼저

자기 집에 초대해서 내 노래를 들어 보고 난 후에 처제를 소개주었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조금 쌀쌀했던 결혼식 날

교회에 난로를 때우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여서 추운 교회에서 하객을 맞이했다.

멀리 전라도에서 올라 온 신부측 하객들은 우리 교회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는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에서 피로연을 준비했으니

날씨가 추워 내 손님들도 교회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게 결혼식을 끝내고 좁은 집에서 신혼살림을 하다가

내가 다시 해외 현장으로 나가야 하는 바람에  두 달만에 우린 헤어져

다시 1년을 살았다.

 

그러나 이젠 나도 해외수당을 포함한 제법 두툼한 월급을 받고

아내도 피아노 학원을 계속할 수 있었기에 비로 1년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생활에 부족함은 없었다.

 

귀국 후 다니던 직장을 옮기고 나서 부서 내에서도 대리 직급을 가진 내가 승용차를 

제일 먼저 구입했고, 전세들어 살고 있던 집 주인이 부도나서 집을 경매한다고 해서

억지로 살던 집을 그대로 우리가 구입하기는 했지만 결혼 2년 만에 내 집을 갖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우리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기대어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미국이나 유럽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기 힘으로 대학다니고

부모 지원없이 결혼하는 것을 당연시 안다고 하는데

왜..우리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너무 남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고,

자녀들 말이라면 무엇이던지 다 해주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의식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가 그렇다고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정말 자기 형편에 맞게 결혼을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혼일 것이다.

내 형편이나 부모님의 형편이 안되면 줄일 것은 다 줄여야 한다.

결혼식 한 번을 위해, 의례적인 절차를 위해 생략할 수 있는 것은 다 생략해야 한다.

진정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은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다.

이 다음에 돈 벌어서 다 갚을께요 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이 다음까지 부모님이 살아 계시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해 늘 아내와 부딪히고

모두 다 요즘은 세태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고집을 부리고 싶다.

어려운 생활을 알아야 삶이 소중한 법이다.

할 수 만 있다면 내 아들 딸이 남의 눈을 의식치 않는

소박하지만 멋진 결혼식을 가지길 권한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사는 법만 가르쳐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유럽의 부모들처럼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앞길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현재까지 모아 놓은 자산은 나의 여생이나 남을 위해 쓰고 싶다.

 

정말 간절히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