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부천시립합창단]베토벤의 합창음악

carmina 2014. 10. 31. 17:05

 

 

2014. 10. 30

 

지난 3월 부천시립합창단의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로 폴랜드 작곡가

구레츠키의 환상적인 합창에 취해서 오랜동안 구레츠키 앓이를 하고

씨디를 사서 들었는데 이번엔 또 베토벤으로 나를 뜨겁게 해 줄

조익현 지휘자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부천시립합창단의 합창을 느낀다.

그리고 이번 합창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연주되어 일반 합창곡과

더욱 베토벤 합창의 숭고함을 보여 줄 것 같다.

 

베토벤.

누가 감히 그 음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할까?

마치 저 북쪽나라의 존엄이라는 단어처럼

베토벤의 이름에는 존엄이라는 단어를 뛰어 넘어

악성이라는 호칭으로 당연히 불리워 진다.

 

음악의 성인, 루드비히 반 베토벤.

특히 교향곡 9번을 통해서 합창이라는 단어마저 베토벤의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다.

공연 전에 지휘자의 짧은 해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시대의 작곡가.

그래서 더 힘들었던 작곡과 합창의 어려움.

익히 알던 것을 탈피하고 새로운 음악에의 조류를 따라 가기 위해

많은 곡으로 시험을 했을 것이다.

 

불멸의 베토벤, 카핑 베토벤 등 몇 몇 베토벤 전기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격이 불같아서 음악도 그렇게 불같다는 설명이 재미있다.

 

나이 30세부터 시작된 난청이 그의 노후를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마치 아픔을 겪어야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진주처럼

그의 장애는 오히려 음악을 더 성인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했다.

난청을 앓기 전까지 들었던 자연의 소리는 평생 그의 머리에 머물렀고

그 이후는 느낌으로만 그 소리를 재생해 내고 아름다운 곡으로 풀어 썼다.

 

첫번째 곡은 Mass in C Major, 4명의 독창자와 합창

전통적으로 Kyrie로 시작된 합창은 그 고요함을 잠시도 못 넘기고

피아니시모에서 금방 메조피아노 포르테로 급상승한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머리를 숙이기보다는

신에게 바로 얘기를 거는 것 같다.

이미 듣지도 못하는 지경이니 차라리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일까?

Kyrie를 넘어서 Gloria에서는 현악기의 경쾌한 피치카토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기쁨이

합창과 함께 힘차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다같이 힘을 모아 극적인 아멘으로 마무리한다.

 

두번째 유명한 D장조 장엄미사.

베토벤의 말년에 작곡된 곡으로 이미 자신의 인생의 말년을 생각한 듯

Sanctus를 4명의 독창자와 웅장한 남성합창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도 바이올린을 제외한 비올라, 첼로 그리고 콘트라베이스만을

이용하여 거룩함의 색깔을 더 짙게 바르고 있다.

그리고는 다시 악장이 홀로 나와 독창자처럼 바이올린 솔로를 하고 있다.

베토벤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참으로 베토벤다운 발상이다.

그리고 팔레스트리나풍으로 무반주합창까지...

 

3번째 큰 교회에서 가끔 연주하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위의 그리스도'

통상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에서 예수역이나 하나님역은 베이스가 맡는다는데

이 곡은 테너가 예수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웬지 아쉬움이 들었다.

첫음부터 우렁차게 터져나오는 베드로 역할의 베이스에 무척이나 기분좋았는데

예수 역할을 맡은 테너의 성량이 베이스와 너무 비교되어 합창과 같이 연주될 때는

테너의 소리는 중간쯤 앉은 내게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하실 때 5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라 생각해서 위안을 삼았다.

비록 오늘은 연주되지 않았지만 이 곡에서 마지막부분에 있는 할렐루야는

명성가집에 포함되어 있어 일반 교회에서 많이 연주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곡을 작곡하면서 혹시 베토벤이 선배 작곡가인 모짜르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도 당신처럼 오페라 작곡할 수 있어. 내가 할 줄 몰라서 안하는거 아냐."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베토벤도 저런 오페라를 작곡했나 할 정도로

모짜르트의 오페라와 흡사한 곳이 많다.

비록 평생 오페라라고는 피델리오 한 곡 밖에 없지만

이 곡에서 여타 다른 오페라에서 들을 수 있는 색깔들이 독창자들의 노래와

합창의 부분 부분에서도 자주 보인다.

소프라노의 뚜렷한 R발음에서 독일노래들의 매력을 느끼며 혼자 즐거워 했다.

 

인터미션 후 장송곡으로부터 시작된다.

황제 요셉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죽은 자를 노래하기에 소프라노 아리아의 선창이 조용히 큰 선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밝은 화음들이 합창으로 이어진다.

문헌을 찾아보니 이 곡은 베토벤이 젊은 시절에 작곡했지만

생전에 연주되지 못하고 사후에 15년정도 지나서 초연된 것으로 나온다.

1790년에 죽은 요셉2세 황제를 위해 바로 작곡을 했지만 연주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혹시 황제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비화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은 황제를 위한 노래가 당시의 시대상황에 미운털로 비쳤을까?

어찌되었던 죽은 황제를 빛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베토벤의 희망이

이루어지 않았다.

 

늘 음악을 들으면서 책처럼 행간을 읽으면 음악을 듣는 재미가 있다.

어느 곡이던 사연이 있고 어느 곡이던 개인이나 혹은 사회 혹은 문화의

배경이 있다. 내가 가진 음악관련 책도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이 많다.

 

이어지는 슈테판 왕의 노래.

슈테판왕은 헝가리의 왕이다. 그런데 베토벤이 작곡했다.

독일의 속국인 헝가리의 민심을 위해 작곡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헝가리인의 기상을 세워주기 위해서 합창도

역시 남성합창의 우렁찬 소리로 시작된다. 그러나 멜로디가 귀에 익다

이 멜로디 풍을 어디서 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가 많이 부르는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온

독일 노래 '가우데 아무스'의 노래와 흡사하다.

심플한 멜로디 그리고 군대가 행진하는 듯한 통상적인 정통 화음.

노래의 가사도 그렇게 끝난다. 만세 만세 우리 자손 만세.

히틀러가 살아나서 외치는 것 같다.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칸타타 중 Meere sstille und Gluckliche Fahrt

잔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라는 뜻이다.

가사를 보니 선원의 절망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파도하나 없는 적막한 바다를 바라보며 한숨짓는 선원.

어느 날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면 어느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그건 아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가두는 것일 것이다.

3평짜리 공간에서 단지 하루가 지나는 것을 느끼면서 지나는 세월이 이러진다면..

죽음보다 더 한 공포. 그 공포를 바다에서는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을 때 일 것이다.

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겠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ㅇ

이대로 영원이 지속된다면....

그런 선원의 마음을 합창단이 노래하고 있다. 절망속의 피아니시모 음악들.

 

그러나 바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다의 신인 에올루스 신이 도와주고있다.

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존재를 느낀다. 

멜로디가 춤추기 시작한다. 단원들의 몸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육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환희.. 환희..

살아 있음의 행복함.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베토벤에게 적막감속에서

희망은 이렇게 표현되었을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해 보았다.

주위의 모든 이에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지만

난 세상의 사막의 홀로 떨어져 있는 기분이다.

만약 내게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베토벤처럼 노래할 것이다.

 

피아니스트 김민교수와 협연한 유명한 코랄 판타지.

베토벤은 이미 심포니 9번의 멜로디를 코랄 판타지를 작곡하면서 구상해 놓았다.

피아노의 솔로 선율을 귀기울여 들으면 나인 심포니의 멜로디가 간간히 들린다.

한참을 이어진 피아노 솔로 뒤에 그 선율을 플륫이 받고 피아노가 반주한다.

그리고 오보에가 이어받고 바로 클라리넷과 바순이 이어받는다.

거기서 끝나는가 싶더니 비올라가 그리고 첼로가 이어받는다.

아...너무 좋다.

그러더니 다시 바이올린 솔로가 화려하게 이어받아 합창을 시작한다.

참으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작은 곡 하나에 한 시간 가량의 심포니 전곡을 압축해 놓은 듯 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곡의 편성이다.

나인 심포니의 주 멜로디를 더 자세하게 나누어 합창이 연주하고 있다.  

마치 재즈음악을 들을 때 각 악기가 자신의 취향껏 연주하고 다른 악기는

반주하는 격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아마추어인 내게도 약간 어긋나는 것이 얼핏 보인다.

아까 연주 시작 5분전에 급히 악기를 가지고 들어가는 여단원의 모습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이 오케스트라는 늘 호흡을 맞추는 단체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필요한 단원을 보충하여 연주할 것이다.

이 곡을 부천필이 연주를 같이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앵콜송으로 관객에게 베토벤의 대표곡인 심포니 합창교향곡의 4악장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악기를 입으로 흉내낸 노래로 또 다른 변형을 주고 있다.

그 노래를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 합창교향곡,

인류가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꼽으라 할 때 이 곡이 제일 먼저 생각하지 않을까?

 

도살장이 있는 서울 독산동에 있는 고깃집을 가면 소 한마리를 주문할 수 있다.

남들이 들으면 몇 사람이 소 한마리를 어떻게 먹느냐 하지만

한 접시에 소의 등심, 안심, 등골, 천엽 등 소의 각 부분을 조금씩 먹을 수 있는

정육시장이 있어 저렴한 가격에 여러가지 고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오늘 음악을 듣고 나오면서 베토벤의 음악 중 거의 모든 장르를 조금씩 맛본 기분이다.

성악곡, 종교곡, 가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심포니, 콰르텟, 등등...

만원짜리 한 장으로 이렇게 여러가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이런 선곡을 해 준 부천시립합창단의 노력이 고맙기만 하다.

 

다음에는 어떤 작곡가의 합창을 들을 수 있을까?

내년을 기약해 본다.

 

베토벤이여 영원하라

음악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