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소프라노 서예리 콘서트

carmina 2014. 10. 4. 08:26

 

 

2014. 10. 3

 

실로 놀랄만한 콘서트였다.

이제껏 한국인 성악가중 조수미만 최고로 여겼는데

여기 또 다른 성악가의 콘서트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스스로 서예리에게 그런 칭호를 주고 싶었다.

Yeree Amadeus Suh

신이 사랑하는 서예리.

 

매스컴에서는 요 며칠 동안 온통 서예리의 공연을 칭찬하고 홍보하는 글에

온갖 미사여구를 다 집어 넣었다.

천년을 아우르는 목소리로 고음악과 현대음악을 노래하는 천사.

홍혜경과 견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한국성악가.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고음악과 현대 음악은 발성이 달라

성악가들이 두 장르를 모두 소화하기 힘들텐데 하면서 의아했다.

 

마침 누군가 내게 자신이 구매한 티켓을 전해 주었다.

아내도 꼭 보고 싶다 해서 마침 매진이 안되었기에 한 장 구해 주었다.

 

LG아트센터 휴일 저녁.

아침부터 강화 나들길을 땀흘리며 걷고 서둘러 옷을 갈아 입은 후

공연장으로 가면서 혹시 내가 졸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입이 딱 벌어지는 음악회로 존다는 것은 황금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무대에는 피아노와 포지티브올갠 그리고 예쁜 색깔의 쳄발로가 놓여져 있다.

시간이 되고 불꺼진 무대에 갑자기 긴팔 티셔츠에 진바지를 입은 소녀가

들어와서는 악기 뒤로 가기에 무대셋팅하느라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이 소녀 좀 보소.

객석 앞으로 나오더니 뭐라고 들리지 않는 소리로 쉼없이 입을 종알거리며 중얼거린다.

그제서야 얼굴을 보니 서예리였고, 극 중 의상을 입은 것을 알았다.

곡도 현대의 전위음악 작곡자인 루치아노 베리오의 세쿠엔차 III 

 

종알거리며 가끔 노래같지 않는 노래를 하는데 음역이 하늘과 땅을 오간다. 

근데 어쩌면 그리 마이크하나 없이 노래를 하고 말을 하는 소리가 그리 또렷이 들릴까.

입을 막고 노래하는 소리도 소리의 전달에 문제가 없다.

 

쉴새없이 종알거리고 다양한 소리를 내며 노래하기를 반복하는데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치 여러가지 악기를  목소리로 혼자 연주하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니 공연 전 나누어 준 대사를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이어지는 순서는 서예리가 노래한 첫 곡의 난잡함은 잠재우려는 듯

쿠프렝의 곡을 은은한 쳄발로 솔로 연주하며 잠시 무대를 무대를 숙연하게 한다.

 

다음 서예리가 노래할 곡은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 영국의 헨리 퍼셀의 오페라 중

<디도와 아에네아스> 중 디도의 탄식. 헨리 퍼셀의 합창곡들은 내가 즐겨 모으고 있다.

 

하얀 드레스로 차려 입는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가 숙연하게 무대를 흐른다.

정통적인 고음악 발성이 얼마 전에 본 바흐솔리스텐서울 연주시 바로크 합창중 솔로를

듣는 듯 하다.

 

노래를 하며 곡의 가사처럼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가수가 곡에 몰입하니 관객들도 숨쉬는 소리 하나 없이 곡에 몰입하고 있다.

가수와 관객의 혼연일체. 이거야 말로 가장 완벽한 무대아닐까?

 

다음 곡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인 진은숙 씨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진은숙씨는 서울시향의 전속작곡가로

시향에서 진은숙의 아르노바라는 타이틀로 몇 년 째 새로 작곡된 곡을 연주하고 있다.  

 

오페라 중 앨리스의 복장을 차려입고 리본으로 토끼 귀를 맨 서예리의 모습이

조금 전 하얀 드레스에 비통에 찬 노래를 부르던 이미지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5곡의 노래 전달을 온갖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감탄이 날 정도다.

마치 연극 무대의 모노드라마처럼 각양각색 역할로 무대를 휘어 잡고 있다.

그것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귀에 익은 정통 성악가의 발성은 온데 간데 없고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노래하는 창법으로 부르는데 어찌 저럴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진다.

 

그리고 만인의 귀에 익은 노래.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잠깐 사이 앨리스의 복장을 바로크 풍의 고급 귀부인 드레스로 바꿔 입고 나왔다. 

대개 이 노래는 어느 가수나 이 곡의 본문부터 노래하는데

서예리는 오페라 중 이 노래가 나오기 바로 전 부분의 노래부터 시작하여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러다가 귀에 익은 첫 가사가 나오는데 객석에서 작은 탄성이 터진다. 

 

영화 파리넬리에서 카스트라토가 힘차게 불렀던 그 노래풍이 아니고

정말 비통한 노래를 부르는 고음악 창법으로 노래하고 오페라처럼 연기를 하는데

내 옆의 관객은 안경을 벗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중에 들으니 다른 자리에서 관람한 아내도 울었다 한다.

그 한 곡만 들어도 오늘 연주의 기대 가치는 모두 보상된 것 같았다.

 

인터미션 후 객석으로 돌아오니

무대에 커다란 7개의 초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가수가 다시 흰 드레스를 입고 들어와 천천히 초에 하나하나 불을 밝힌다.

그리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악보를 들고 노래하는

쿠프렝 작곡의 르송 드 테네브르 (어둠의 낭송)

 

가수가 악보는 들었지만 악보를 보기 위해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성당에서 성수요일의 예배를 위해 독창자가 나와 혼자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초를 하나씩 입으로 불어 끄며

7곡을 연주하는데 이 작은 퍼포먼스로 관객을 숨도 못 쉴 지경으로 압도하고 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촛불을 끄고 그대로 퇴장하는데

관객에게 박수 칠 만한 분위기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피아노가 솔로로 윤이상 작곡의 피아노로 불협화음의 현대음악을 연주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유명한 친북작곡가 윤이상.

한 때 국내에서는 윤이상의 곡이 연주되는 것을 금지하다가

이제는 윤이상 축제가 열리고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서는 매년 국제 음악제가 열린다.

때로는 강한 불협으로 때로는 쉴새없는 건반의 트릴로 그리고 아주 조용히 연주되기도 하고

피아노의 가장 높은 둔탁한 마지막 음까지 두드리며 음악을 표현한다.  

 

윤이상의 곡이 끝나는가 싶더니 바로 이어지는 서예리의 마지막 무대는

다시 복장에서부터 남다른 현대음악으로 관객을 놀랍게 한다.

경찰복장에 권총을 차고 회초리를 든 서예리

아까 그 성스러운 모습은 어디갔을까?

 

죄르지 리게키의 오페라 <거대한 종말> 중 '마카브르의 신비'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다.

쉴새없이 무언가 혼자 지껄이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소리의 표현에 놀라고 있다.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도 무언가 쉴새없이 중얼거리고

때로는 약간 익살스러운 한국어로 '뭐라고?' 하고 가수를 향해 외친다.

반주자가 발을 바닥으로 구르며 소리를 내기도 하고 호르라기를 불기도 한다.

참 재미있다.

목소리와 연기와 곡들이 쉴새없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문득 객석의 손님들을 보니 거의 모두 의자에서 등을 뗀 채 음악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음악을 어찌 의자에 깊숙히 기대어 들을 수 있을까?

가수가 객석의 관객들보고 올라오라고 손짓만 하면 금새 무대로 뛰어 올라갈 분위기다.

 

끝없이 이어지는 앵콜과 기립박수

앵콜할테니 잠시 옷을 갈아 입을 시간을 달란다.

누구하나 움직임이 없다. 대개 본 공연이 끝나면 앵콜듣지 않고

바쁘다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은 모두 그 일정마다 포기한 것 같다.

 

생소한 가곡이 연주된다.

이게 무슨 곡일까? 누구의 곡일까?

내가 모르는 곡이니 아마 최신가곡일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노래를 불러야 한국인답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담백함으로 부르는 한국가곡.

 

그리고 또 하나의 앵콜곡, 아리아.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지만 포지티브 올갠과 쳄발로가 같이 반주하며

부르는 아리아에 애절함이 뚝 뚝 묻어난다.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공연은 그렇게 원맨쇼로 끝이 났다.

성악을 즐기는 내게 서예리의 공연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노래로서도 사람을 사로 잡는데

빈틈없이 움직이는 연기와 동선으로 그리고 무대의 다양한 변화로

최고 성악가의 무대를 빛내 주었다.

 

공연 후 로비에서 가진 사인회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얼마나 이 공연이 사람들을 만족하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난 합창단 친구와 밤늦게까지 뒤풀이를 하며

우리에게 서예리라는 한국인 성악가가 있어 뿌듯함을 느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공연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