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주천-운봉 간)

carmina 2015. 11. 2. 08:41

 

 

2015. 10. 28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주천-운봉 간)

 

지리산을 완주했다고 오래전부터 호언장담했고 늘 뿌듯했다.

일반 트레킹코스보다 훨씬 더 어렵고, 워낙 먼 곳에 있어

한 번 찾아가기도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한 것이 있었다.

이 소중한 경험을 그냥 내 블로구에만 묵혀 두기에는 아까운 자료다.

내 인생의 커다란 족적으로 남기고 싶어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지리산 둘레길 편만 따로 책을 내고 싶었다.

내 직장생활이 아마 끝날지도 모르는 내년 3월말을 목표로

원고 작업하고 출판사 계약맺고 교정보고 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3년 전 발간했던 내 책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에

들어갔던 지리산 둘레길 편이 중복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결단했다. 그 길을 다시 걷고 다시 쓰리라.

 

업무가 바빠 여름 휴가를 사용하지 못했기에 더 추워지기 전에

업무가 일단락 되자 마자 휴가를 서둘러 내고 출발.

우선 5년전 걸었던 1코스부터 5코스를 걷기로 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며 이렇게 달라질 줄 몰랐다.

이전에 기행문을 다시 사용했다면 아마 내 책을 읽는 사람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시 걷기를 잘한 것 같다.

 

남원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둘레길 1코스 출발점으로 가자 하니 택시기사가 5년전과는 달리 금방 알아들었다.

그곳에서 점심가능하냐 묻고 당연히 1코스 출발점으로 데려다 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택시가 출발점을 지나치며 다른 식당앞에 내려 준다.

아차. 이 것도 상술이구나.

나는 당연히 출발지인 둘레길 안내센터앞에서 내려 칡냉면 먹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밥을 먹게 생겼다. 

산채 비빔밥을 먹으며 이 근처에 물하나 사야 하는데 편의점 있느냐 물었더니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기에 난감해 있는데 식당 아줌마가 슬며서 물병을 하나

집어 주며 주인 아줌마 보기 전에 얼른 집어 넣으라 한다.

 

1코스 줄발점으로 가기에는 너무 돌아가는 것 같아 도로를 따라 가니

둘레길 이정표와 둘레길 쉼터가 보인다.

반갑다. 둘레길 이정표. 너 보고싶어서 이렇게 달려 왔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하자.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길을 가다가 낭패 보지 않도록 뱃속을 해결해야 한다.

쉼터 앞에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 문을 여니 비록 좌변기는 아니더라도 내부가 깨끗했다.

 

길을 떠났다.

이 길을 다시 올 줄은 몰랐다.

중부지방에서 이미 추수를 다 했지만 여기는 이제 시작이다.

노란 벌판에 콤바인이 어릴 때 머리 박박 깍을 때처럼

천천히 논을 지나가니 금새 벌판색이 달라진다.

길가에 감과 사과와 석류가 익어간다.

배추와 무우와 고추와 생강이 풍성하고 푸른 빛깔로  농부의 손길을 유혹한다. 

 

외평마을로 들어가면서 길 가에 밭일을 하시는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양팔을 뒷짐진 채 지나치는 아저씨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일부러 무엇을 재배하느냐 묻기도 하고 건강하시라고 틀에 박힌 멘트도 날렸다.

이제부터 지리산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자연뿐만이 아니라 그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모든 분들에게...

이 곳도 이제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왔는지 새집이 자주 보인다.

 

한참 세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그 끝에 흙길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이 길은 전혀 변함이 없다.하다못해 오래전 있던 나무 평상도 그대로 인 것 같다.

마른 낙엽같은 색깔의 평상이 내게 아픈 기억을 되살려 준다. 

내가 저 평상에서 잠시 쉬다가 배낭에 물병이 빠져 버린 것을 모르고 올라가다가

한 여름에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때 산에서 탈진해 죽는 줄 알았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

내게 남은 물병을 건네 주어 겨우 기운차리고 등산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낙엽이 가득하다. 가을인데 이 곳 숲은 단풍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단풍나무가 없어서 일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듯

오솔길에 낙엽이 등산객의 발자욱에 밟힌 흔적이 별로 없다.

그리고 어제 이 곳에 비가 내렸는지 마른 소나무 칩옆수잎과 활엽수의 낙엽들이

빗물에 쓸려내려가다가 여기 저기 뭉쳐 있다.

 

금방 땀이 흘러 추울까봐 입었던 두터운 옷을 조끼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러나 가을인지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이

나를 금방 지치게 했다. 이 언덕이 언제까지 지속되던가.

구룡치까지 높이가 400 미터 정도이니 그다지 부담갈 정도는 아닌데

지난 번 너무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인지 자꾸 위를 쳐다 보게 된다.

그래도 계속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길이 아니고 가끔 평지를 걸을 수 있어

이 길은 그다지 부담되지 않았다.

 

오늘 걸어야할 거리는 약 15km.

오후 해지기 전까지 걸으면 대충 그정도 거리는 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거기 그대로 변함이 없는데 나는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자꾸 카메라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저절로 이리 저리 부대끼며 자란 나무들

수천만년 전에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와 자리잡은 커다란 바위들.

어느 예술품이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까?

이렇게 홀로 걸어가니 나무들이 보이고 돌이 보이고

풀이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길을 걸을 때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과 걸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좋기는 한데 자연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올라가다 고개들어 보니 하늘이 보여 그곳에 도착 후 

이 정도면 다 올라왔을까 하고 바라보면  또 언덕이 보이고

늘 겪는 일이지만 그래도 늘 속는다.

 

그래도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산아래 마을이 보이고

시야가 멀어지면 더 높은 산이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를 즐겁게 한다.

 

가끔 이정표도 제대로 표시안되어 있어 긴가민가 하는 곳엔

이미 이 길을 거쳐간 사람들이 나무가지 위에 매달아 놓은 리본이 도움이 된다.

평지에 이정표가 있어 다 올라온건가 했는데

역시 빨간 화살표가 가르키는 곳에는 여지없이 비탈길 돌계단이 있다.

 

새로 만든 이정표가 있는 작은 평지에 이전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쉬며 셀카하나 찍고 다시 산을 오른다.

작은 언덕 하나 올라왔다고 더 이상 높은 언덕은 없을테니

힘들지 않을거라는 기대감도 있다.

 

하늘이 훤히 보이는 바위언덕을 오르는데 산에서 오늘 처음 마주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바로 위가 구룡치란다. 이제 1코스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구룡치에 오르니 길게 이어지는 능선길에 사람들이 몰려 온다.

1코스를 역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1코스를 편하게 걷기 위해선 역으로 걷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 들에겐 배낭도 없고 손에 물병도 없다.

 

이제 나도 룰루랄라 정상의 능선을 걷는다.

넓은 오솔길엔 어제의 비와 바람에 저절로 만들어진 솔잎의 무늬가

반고흐가 즐겨 그려내는 빛의 무늬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반고흐도 혹시 이 것을 보고 빛의 무늬를 그렸을까?

거대한 지면의 화폭에 대화가인 하나님의 작품이 이어지고 있다.

 

무척이나 긴 오솔길이 이어진다. 신나게 혼자 노래를 부르며 걸어간다.

문득 시선을 잡는 이상한 나무.

나무의 커다란 기둥이 서로 엉키어 있다. 연리지다.

그토록 찾기 힘든 연리지. 뿌리가 다른 나무 두개가 자라다가

서로 엉켜 붙어 올라가다가 결국엔 합쳐져 일심동체가 된다..

등나무처럼 나무 기둥을 파고 들면서 하나가 되었다.

등나무는 자기만 살고 타고 올라간 나무는 죽이는데 연리지는 같이 산다.

이 연리지는 암수의 구분이 확실한 것 같다.

하나는 여자같이 호리호리하게 생겨 굳건히 일직선으로 올라간 굵은 기둥의 상대 나무를

휘 휘 휘감고 있다.

올해 우리 합창단에서 정기 공연에 부르는 노래 중 '신고산타령'에 그런 가사가 있다.

'나는 언제 님을 만나 얼크러 설크러 질까나, 어랑 어라 어허야' 

 

이 곳에 높은 곳인데 숲속에 작은 연못이 있다.

어디선가 물이 흘러 내려올 곳도 없는데 물이 지하에서 솟는 것일까?

물이 맑은 것을 보니 지속적으로 물이 들어오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사무락 다무락.

다무락이라는 말인 담벼락의 남원말이라는데 누군가 어감을 좋게 하기 위해

사무락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이 곳에 작은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6년정도 지난 초기 이정표도 풍상을 겪은 듯 저절로 뽀개지고 있다.

 

나는 지금 그저 평탄했던 내 인생같이 누군가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저절로

만들어진 잘 다듬어진 높은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 나무들 사이로 마을이 보이는 것을 보니 이제 긴 능선을 다 내려온 것 같다.

비닐로 만든지 오래 지난 듯 허름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쉼터가 개울가에 있는데

인적이 없다. 작은 개울이 잘 만들어진 커다란 수로로 변했다.  

 

길가에 작은 공터에 산소 몇기가 커다란 소나무로 둘러쌓인 곳에서

노치마을로 가는 길로 이정표를 따로 다시 작은 흙길로 접어 들었다.

누군가 초가집으로 황토방 민박을 만들어 눈이 간다.

이 곳에 오면 저런 허름하게 보이는 곳에서 자고 싶다.

  

회덕마을이다.

마을 살림이 좋아지고 있는지 여기 저기 새로 지은 집들도 있고 새로 증축하는

집들도 있다. 노치마을로 가는 길이 삼거리인데 이정표가 안보인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니 길가에 주차해 놓은 차 뒤에 숨어 있었다.

아마 둘레길이 초행길인 사람은 둘레길 이정표가 아닌 노치마을방향 버스길을

따라 갈 것만 같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상추를 쉽게 수확하기 위해 자전거 바퀴를 이용해 만든

재미있는 기구가 있어 시골 사람들도 무언가 편하게 할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젠 밭일 하는 아줌마도 쪼그리고 앉아 일할 때 편하게 엉덩이에 커다란 쿠션을 매달고

밭에서 일을 한다.

 

노치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집들이 모두 깨끗해 보이고 기와집이 많다.

마을 입구도 꽃으로 잘 다듬어 놓았고 돌탑을 쌓아 놓아 무언가 상징물을 만들어 놓았다.

이 마을은 화합이 눈에 보인다.

 

한참 걸었으니 신발 속의 열기도 식힐 겸 양말까지 벗고 편히 쉬면서

저녁에 묵을 곳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전화해 보고

행정마을에 있는 인동할매집을 예약했다.

 

덕산저수지를 지나 푹신한 흙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니 길 끝에 통나무로 집이 하나

세워지고 있다. 아마 이 곳도 길 걷는 사람들을 위해 식당같은 편의시설일 것이다.

 

가장마을을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간다. 작은 숲길이지만 소나무가 나를 위해

춤을 추는 아름다운 길이 있어 걷는 즐거움이 있다.

숲이 끝나는 곳에 잘 다듬어진 가족묘에 나이든 분이 산소의 잔디를 다듬고 있다.

그런데 길을 걷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잠시 쉬며 나무로 만든 벤치에 한마디씩 적어 놓았었는데

그 벤치가 없어지고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산소 앞에 팔각정이 생겼고.. 그 앞에 가족묘를 기리는 시비가 하나 있는데

날짜가 2010년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어 2011년에 안보였던 것이라

산소 관리인에게 정자와 시비가 세워진 연도를 물으니 2010년이 맞단다.

2011년도 걸을 때 없던 것이라고 했더니 2010년이 맞다고 하더니 한참뒤에

내게 자기가 틀렸다며 2011년 이후에 세워졌다고 정정해 준다.

 

그렇게 관리인과 얘기하고 있는데 내 뒤를 따라온 홀로 길 걷는 이를 만나

같이 걷기 시작했다. 흰 머리를 보아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는 듯.

나이드신 부모님을 모시느라 도무지 여행떠날 틈이 없었는데

무언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일을 찾아 혼자 떠났단다.

 

군청에서 둘레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배려하는 듯 이젠 길가에

깨끗한 화장실과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벤치가 많아 좋다.

 

람천을 따라 낯선 이와 서로 다른 세계를 얘기하며 걷는다.

행정마을 쯤에 도착해 나는 여기서 하루 자겠다 했고 그는

운봉마을에 가서 자겠다며 헤어졌다.

나는 운봉마을은 약간 도시풍의 마을이라 그곳보다는

따로 떨어진 작은 마을을 선호한다.  

 

할머님이 밭일을 하다 말고 세바퀴 자전거를 타고 나를 마중나오셨다.

이 마을엔 감나무가 많아 보기에도 흐뭇하다.

지난 번 묵었던 목기공방 뒤에 있는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천천히 산책하며 마을을 구경했다.

전에는 소나무 몇 그루밖에 없었는데 

넓은 곳에 보기에도 우람찬 소나무들이 가득한 정원이 있고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기에 물어보니

군에서 지원하여 소나무를 가져다 심었단다.

 

마을에 작은 빨래터도 만들어 놓았고 누군가 빨래하나 말고

그냥 두고 간 듯 흔적이 남아 있다.

 

할머니께서 밭일 더 하고 올테니 기다리라며 시원한 막걸리와

잘 익은 김치 한 사발을 놓고 가셨다. 할머니를 따라 가보니

빨간 고추를 가득 따서 말리고 계셨고,

콩을 수확해 타작을 한 듯  마을회관 앞 마당에

마른 콩가지에서 튀져 나온 콩들이 바닥에 가득 숨어 있었다.

이제 다음엔 들깨 타작을 하시려는 듯 옆에 준비해 놓으셨다.

 

오늘은 손님이 없으니 아무 곳이나 방을 잡으란다.

시골냄새가 가득한 반찬으로 저녁상을 보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찍는다며 마음대로 하란다.

그러고 보니 벽에 손님들이 벽에 가득 낙서를 해 놓았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어둑해진 마을이 보고 싶어

얇은 잠옷 바람으로 마을로 나갔다가 그만 너무 추워 얼른 들어와 버렸다.

 

아침에 식사를 하지 않는다 했더니 얼른 부엌에 들어가 따끈한 식혜를

하나 만들어 오셨다. 그러더니 문득 나보고 작가냐고 묻는다.

전문작가는 아닌데 책 하나 썼다 하니 어떤 이가 이 곳에서 묵고 간뒤에

책을 하나 냈다고 보여주는데 어느 시인이 전국을 여행하며 곳곳에

좋아했던 곳을 시로 풀어 놓고 이 민박집에 대한 시도 곁들였다.

 

하루 묵은 비용을 낼려 하니 3만원만 내라한다.

밥값까지 포함해 낼려하니 극구 받기를 사양하며 민박좀 소개나

많이 해 달라 한다.

고마운 시골 인정, 이 맛으로 이 곳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