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운봉-인월간)

carmina 2015. 11. 2. 08:51

 

 

2015. 10. 29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운봉 - 인월간)

 

지난 밤 걱정을 많이 했다.

원래 둘쨋날은 이 곳 전북지역에 비가 오는 것으로 예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침에 뉴스를 보니 오후에 비가 온단다.

그런데 아침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 같은 날씨가 아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가득한 둑길을 걸었다.

멀리 맞은 편에서 나이들어 보이는 세명의 중년남자가

지나치며 인사를 나눈다. 1코스를 역으로 걷고 있단다.

 

벌판의 아침처럼 평온한 모습이 있을까?

멀리 적당한 높이의 산들이 겹겹이 둘러 쌓여 있고

이미 수확한 휑한 벌판에 볏집을 모아놓은 크고 흰 건초더미의 배열이

한참을 서서 멍하니 바라보아도 좋기만 하다.

 

람천의 맑은 물에 오리들이 놀고 있다가 내가 외치는 '훠이' 소리에

동시에 하늘로 비상한다. 그 찰나를 노려 얼른 셔터를 눌렀다.

 

오늘부터는 오래 걷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길가의 정자에 앉아 평소 물집이 자주 생기는 발바닥 부위에

물집 방지패드를 붙였다.

한 번도 써 보지 않았지만 이번엔 이런 방법 좀 써 보자.

 

양묘장에 수없이 많은 어린 나무들이 바람조차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일부러 길을 내준 양묘장이 고맙다.

곧 운봉 마을로 들어섰다. 아직은 잠들어 있는 떡집많은 운봉읍내에서

아침 대용으로 떡을 사기 위해 기웃거렸지만 살 수는 없었다.

제과점을 찾았으나 그마저 없어 할 수 없이 학교 앞 작은 쉼터가게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지난 번 이 곳에서 길을 찾지 못한 기억이 있어 유심히 도로의 바닥을 보고 걸었다.

초등학교도 아직 등교전인지 아이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둘레길 2코스 출발점표시가 있는 길가에 이 마을의 공덕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묘비의 글씨가 거의 지워질 정도로 오래 전에 세워진 것부터

크기가 조금씩 작아 지더니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공덕비는 최초의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 높이는 최근의 것이 제일 높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과거와 사례를 보면 선대의 비석보다 조금씩 낮게 하느라 후대에 갈수록

비석이 점점 작아져 결국 새로 만들어지는 비석은 거의 보이지 않아야 되는데...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비석이 이전것보다 더 커진 것은 조금 이해가 안간다.

 

서림공원으로 가는 흙길을 걷는데 저 멀리 다리가 조금 불편한 아저씨가 있어

같이 길을 걸었다. 마을의 낮은 산에 보이는 소나무가 참 건강해 보인다.

아침마다 이렇게 산책하신다는 아저씨와 천천히 보조를 맞추며 람천 둑길을 걷는데

문득 수면이 커다란 파장이 있고 그 끝에 제법 큰 머리가 보였다.

수면을 가르는 모습이 제법 큰 물고기가 있구나 생각했는데 아저씨가 외친다.

'어! 수달이다.' 

그제서야 나도 확인했다. 조금 멀리 보였지만 수달의 머리와 수염까지 볼 수 있을 정돌

수달의 모습이 뚜렸했다. 얼른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바꾸었다.

수달은 가끔 물속으로 자맥질하고 다시 솟구쳐 넓은 물을 휘젓고 다니다가 우리 발 앞에

수풀더미로 들어 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움직임이 사라졌다.

 

람천 둑길과 천의 바닥공사도 한창이다.

중장비가 동원되어 있고 길은 상당히 넓어졌다.

비록 지금은 볼품 없는 길이지만 만약 차가 안다니고

이 길에 잡초가 자라고 꽃씨도 뿌려 놓는다면 몇 년 후에 멋진 길이 될 것 같다.

 

람천을 걷다가 물이 흐르는 천에 사람이 내려가 잠시 머물만한 곳이 있어

내려가 잠시 쉬며 셀카도 찍는데 문득 주위의 수면이 또 움직인다.

수달이다. 그것도 2마리. 내가 있는 쪽으로 오면 좋은텐데

수달은 나를 피해 수풀이 있는 물가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다.

 

이곳 운봉벌판에 커다란 비닐하우스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농촌은 점점 진화를 하고 있다. 새로운 수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 

이제는 가난한 농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길게 이어진 둑끝에 비전마을이 있다.

비전마을의 이름은 임전왜란 시절 군이 진을 지고 있다는 것에서 유명하지만

그것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이 마을에 국악의 성지가 있다.

주차장에는 동편제 기념관이 새로 세워졌지만 문을 닫았다.

새로 세워지는 석조다리를 지나가니 소리쉼터가 있다.

다음 주일에 추수감사절이라 국악찬양을 하는데  

저곳 쉼터에서 얼쑤 하며 농악을 부르고 싶다.

마을 입구에 동편제의  거장 송홍록선생과 명창 박초월선생님의 생가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국악공연이 열리는 공연장이 있다.

 

생가에 들어가니 관리인 가족이 아이와 청소하고 있다가 나를 반긴다.

아이에게 사탕을 쥐어 주고 천천히 생가를 산책하는데

박초월선생님이 부르는 흥보가 판소리가 녹음된 소리로 울려 퍼진다.

한 참을 서서 들었다.

검은 무쇠솥이 걸려 있는 흙으로 만든 부뚜막이 정겹고 우물이 있어

들여다 보았다. 싸리문에 넝쿨이 자라 오디같은 열매가 열려 있고

열려진 싸리문은 오랜 세월 그대로 둔 듯 문과 흙이 하나가 되고 있다.

 

임잰회란 시 군인들이 지었다는 군화마을을 지나 다시 길을 나섰다.

차가 다니지 않는 뜸한 아스팔트 도로에 수확한 콩이 말려지고 있고

길가 작은 밭에는 커다란 호박이 덩쿨 속에 폭 파묻혀 있다.

이 곳에 수풀 속에 있던 오래된 비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뜻도 알수 없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석탑과 비석이 오래 전부터

이 곳에 서 있다.

 

이제 도로를 지나 산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길가 옆 커다란 콘도미니엄은 그새 다이어트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5년전 처럼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늙고 초라한 할아버지 혼자 살 것 같은 빛 바랜 건물옆 단풍나무조차

붉은 제 빛조차 잃어가고 있다.  

 

산을 오른다.

숲길이 아니라 아쉽긴 하지만 세멘트길보다는 이게 낫다.

옥계호수의 수면이 작은 실바람에 가을여심처럼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다.

길을 오르다가 마주오는 남자가 눈도 안 마주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더 혼자 걷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네.

문득 아이들 소리가 요란하다.

아빠와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한꺼번에 위에서 내려 오고 있다.

주로 아빠들이 많고 아이들은 천방지축이다.

중군마을에 있는 유치원에서 단체 소풍왔단다. 

산을 오르다 보니 아빠들이 많고

평일에 나올 수 있는 것을 보니 아빠들이 모두 자영업을 하는 이들같다.

아이들은 내려오는 길이라 급하게 뛰어 오다가 넘어지기도 하지만

울지 않았다. 역시 도심의 유치원 소풍과 사뭇다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의 정상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신발과 등산양말까지 모두 벗어 놓고 일광욕을 시켰다.

여행자들이 가장 편한 시간이다.

이 언덕을 바로 내려가니 흥부골휴양림에 오니

어느 중년부부가 시비(詩碑)가 있는 주위의 흙벽에 잔디를 심고 있다.

 

김한호라는 분이 쓴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시.

 

'아름다운 삶이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들에 핀 풀꽃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록빛 들녘이 아름다운 풍경을 좋아하고

숲 속의 싱그러운 향기를 그리워한다.

또한 자연에서 들리는 새소리, 풀벌레 소리, 시냇물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아름다운 소리들이다'

 

구구 절절이 내가 좋아하는 말들이다.

혹시 시를 쓴 분이 선생님이냐고 물었더니 맞단다.

교직생활 오래하셨고 문학작품으로 여기 저기서 상을 많이 받으셨다.

참 아름답게 사는 부부다. 사모님도 얼굴이 곱다.

 

묻이 닫혀진 흥부골 시설들. 혹시 이 시설도 두 분 소유?

여름에는 사람들이 많겠지?

 

언덕을 내려오다가 호젓한 숲길로 들어서 낙엽을 밟으며

흥얼거리며 걸었다. 다시 아스팔트 도로로 나와

길가 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알람이 울린다.

그런데 내가 과수원으로 가까이 갈수록 그 소리가 커지더니

과수원을 벗어나니 소리가 그쳤다.

아하..이게 자동경고음이구나. 다른 곳에서는 개가 이 경고를 대신하는데

이젠 이 것도 과학의 힘을 빌린다.

 

길가 숲속의 완전하게 노란빛으로 탈바꿈한 아름다운 은행나무와

주렁 주렁열린 감나무에 취해 열심히 걸어 내려가다 보니 갈림길에서 그만

이정표를 잃어버렸다. 

 

인월안내센타에 전화해 보니 내려 오기 전에 다른 숲길 이정표가 있는데

그냥 내려왔단다. 어쩔 수 없이 그 길은 포기하고

인월로 향해 가는데 벽화가 그려져 있는 마을이 온통 민박집이다.

문득 쓰레기버린 곳에 연탄재가 쓰레기 봉투에 담겨 있어 눈여겨 보니

연탄재를 친환경 원료로 다시 사용하는 듯 별도의 포장비닐에

연탄재만 따로 담겨 있다.

 

인월에 도착해 안내센타에서 추천하는 어탕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민물고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곳에서 먹어 본 어탕은 맛이 살아 있었다.

뜨거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입안에 넣으니 이제껏 먹어본 생선탕과 전혀 다른 맛이다.

그래서인지 식당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걷느라 몸에 땀이 많이 나다보니 습진약이 필요해

인근 약국에 들어 갔는데 나이든 약사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고

진열되어 있는 약이 별로 없어

이런 것이 시골 약국이구나 하고 습진약을 달라고 부탁했더니

습진약 없으니 조금 비싸지만 무좀약을 쓰라한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근처에 다른 약국이 어디있는지 물으니 없다 한다.

이상하다 식당 집에 물어보니 약국이 2개라 했는데..

인월읍내로 20m 안쪽에 약국 간판이 보여 들어갔다.

그 곳은 도시의 약국처럼 약사 두명이 하얀 가운을 입고 약도 상당히 많았다.

약을 사가지고 나오며 아까 그 약국을 보니 더 초라해 보이고 추해 보였다 

'낯선 여행객이 비상약이 필요하다는데 자기네가 가진 것이 없다고     

다른 약국도 이 곳에 없다고 거짓정보를 제공하니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하겠다'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인월읍내를 빠져 나왔다

 

혹시 인근에 있는 인월안내샌터에 들러 지리산 지도를 얻을까 하고

골목을 찾아갔으나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중군마을로 가는 길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