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주례보고서

carmina 2015. 12. 1. 11:15

 

2011년 어느 날 동호회원의 주례를 보고 쓴 후기

 

2월 어느 날 지난 해부터 가입하여 몇 번 참석하여 활동하고 있는

와인동호회의 소믈리에가 장가를 가는데 그래도 연장자인 나보고 주례를 서달란다.    

 

펄떡 뛰고 사양했다.

생전 한 번뿐인 결혼식을 초짜 주례사에게 맡겼다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기록하기 싫다. 

 

난 그럴듯한 타이틀도 없고, 같은 동호회에 모임을 주도하는  의사 한 분이 있으니

그분에게 부탁하라고 딱 잡아 떼었다.   

 

그런데 그 의사분이 그 날 도저히 다른 일정때문에 안되겠단다.

그래서  만약 내가 못하면 전혀 일면식도 없는 전문  주례사를 사서 해야 한다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승락하고는...   

그때부터 정말 많은 걱정이 밀려온다.   

 

부랴 사랴 인터넷에서 주례에 관한 데이타를 모으고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할지 고민 고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마치 연애편지 쓰는 기분이랄까?   

 

신랑 직업인 소믈리에를 중점으로 주례사를 쓰고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살짝 구하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결혼식 때 하지 못해서 평생 한이 맺혔던 결혼서약서를 낭독하는 것.   

 

물론 내 결혼때는 그런 걸 몰라서 못했지만

그 이후로 수많은 외국 영화를 볼 때마다 등장하는 신랑 신부의 서약..   

 

내가 기쁘고 슬플 때나 사랑하겠노라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신랑에게 미리 이런 결혼서약서를 낭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나름대로 콘티를 만들었다.   

 

뒷면이 보기좋은 편지지를 구해 글을 쓰고 신랑 신부가 낭독하는 것으로 준비했다.   

결혼식날.. 신랑 신부처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신랑보다 튀지 않는 넥타이를 매고, 사회자와 입을 맞추었다.

 

신랑도 평소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신부는 사회자 얘기대로 김태희보다 더 이뻣다. 

하긴 평생 가장 이쁠 때가 신부아니던가.   

주례 단위에 오르니 앞이 잘 안 보인다. 마치 공연하듯이...

 

미리 사회자와 예식장 안내자에게 얘기하고 내가 얘기해야 할 순서를 다 정했지만.. 

자꾸 예식장 안내자가 예정없는 눈신호를 보낸다.   

 

신랑신부가 결혼서약서를 낭독하는데 너무 빠르게 읽는다.

아..미리 얘기해 둘걸..천천히 읽으라고..

서약서를 낭독후 성혼을 선포한다.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성혼선언문을  공표할만한 자격이  있던가.

그냥 내 앞에 써  있는 글대로 읽었다.   

 

준비한 주례사를 낭독하는데..

목이 마르다. 그토록 몇 번이고 연습했지만, 왜 자꾸 말이 빗나가는지.

괜히 시간에 쫒기는 것 같아 말을 적당히 자르고 준비해 온 글이

괜히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 즉흥 애드립을 넣고..   

 

신랑 신부와 눈을 마주치며 낭독하고 싶은데 신랑신부의 눈이 너무 빛나서 

자꾸 내 눈이 피하게 된다.

 

가끔 내 말에 동조하는 듯한 신부의 이쁜 미소.      

신랑 신부가 케이크를 자르고 양가 부모앞에서 인사후...

 

그냥 하객에게 인사하기에..

예정에 없던 주문을 하나 더 던진다.   

양가 부모님이 며느리 사위를 한번씩 안아달라고..   

그리고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박수만 쳐대는 하객들에게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쳐달라고 부탁한다.   

 

신랑 신부와 같이 사진을 찍고...

난 그제서야 깊은 수렁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서둘러  식장을 빠져 나온다.   

 

참으로 힘든 일..

심적으로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마치 처음 하는 도둑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