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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립합창단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 에릭 휘태커

carmina 2015. 12. 24. 10:32

 

 

2015. 12. 23

 

올해 여름 한창 메르스가 극성일 때 부천시립합창단이

에릭 휘태커의 곡을 연주한다기에 기대를 무척 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연주도 메르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취소되었다.

그 후에 혹시 다른 곳에서라도 연주해 주길 바랐는데

비록 늦게나마 년말을 앞두고 이 연주를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위대한 작곡가라 함은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바하, 모짜르트, 베토벤, 말러 등등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해 보면 이 들은 당시에 그다지 위대한

작곡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당시에도 그들을 위대한 작곡가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곡이 연주되고 후세에 길이 길이 남는 것처럼

누군가는 미래를 보는 사람은 그들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천시립합창단에서 기획한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첫번째로 폴랜드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를 인정했고

두번째는 누구나 다아는 베토벤

그리고 이번 3번째는 아직 생존하고 왕성히 작곡활동을 하는

에릭 휘태커를 손꼽았다.  

 

베토벤이야 누구나 다 아는 악성이지만 구레츠키나 휘태커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대한' 이란

반열에 올려 놓고 연주를 들려주는 부천시립이 음악의 미래를 보는

연주단체라 칭하고 싶다.

예술이란 다른 사람들과 같으면 그냥 '아류'에 속할 뿐이다.

예술은 늘 '창조'와 '변혁'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가 탄생한다.

그런 창조와 변혁을 이루어 내고 있는 에릭 휘태커의 화산같은 잠재성을

눈여겨 본 지휘자의 혜안이 존경스럽다.  

 

오래 전 부터 신문에 간간히 소개되는 음악뉴스나 IT, 미디어 관련 뉴스에 언급된

미국 줄리아드 출신의 신세대 작곡가 에릭 휘태커.

전세계는 물론 한국에서도 지식인의 특강을 소개하는 TED에서 이 작곡가가

가상합창단 (Virtual Choir)를 소개하고 연주한 뉴스도 보았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합창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MBC 프로그램 중 '진짜 사나이 해병대'편에서는

밥먹을 때 식기의 오와 열 조차 죽을 각오를 하고 맞추어야 하듯,

노래도 그런 것 같다.

어느 누구 하나 튀지 않는 소리로 가잘 절제된 음으로 하나되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음악이 바로 합창이다.

 

가상합창단을 위해 곡을 인터넷에 알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지원자들이 자기가 노래하는 곡을 보냈을테지만 그 중에서도

튀지 않는 소리만을 골라 만든 합창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와

현 세대에 맞는 음악의 신세계를 보는 것 같아 합창애호가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우연히 어느 여자가 보내준 노래 영상하나에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하게 된 가상합창단은 그야말로 차세대의 연주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어쩌면 오케스트라도 이렇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유튜브 영상만큼이나 오늘 이 연주를 완벽한 합창으로 만들기 위해

지휘자는 어떤 노력을 했을지 눈을 감고도 뻔히 보이는 듯 하다.

조익현지휘자님에게서 합창을 2년동안 배우면서 음정과 음색에 대한

양보하지 않는 집념을 알기에 비록 프로합창단이라도 단원들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모든 예술가들이 목숨과 혼을 다 바쳐 창조해야만 하는

결과물일 것이다.

 

음악이나 작곡자가 워낙 생소한 사람이라 지휘자가 연주 전

작곡자와 곡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해 준다. 음악이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 스스로 이해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

나같이 미리 공부해 오는 사람도 있으나, 아무 것도 모르고 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첫 곡 여성합창으로 시작한  She weeps over Rahoon의 소리를 내기 전부터

나는 등을 곧추 세우고 주먹을 쥐고 긴장해야만 했다.

과연 어떤 소리를 만들어낼까?

잉글리쉬 혼으로 시작되는 첫 몇 마디에서 이집트 풍의

범상치 않은 멜로디가 흐른다. 아니 로마 풍일까?

무언가 신비스러운 멜로디는 시저의 일대기를 다룬

미국드라마 '로마'의 시그널 뮤직으로 많이 들은 것 같다.

오늘의 연주가 이렇듯 신비하다는 것을 미리 알리는 서곡일까?

합창이 수군거린다. 무언가 명쾌한 발음으로 노래하기 보다는

흐느끼면서 중얼거리듯 무대에서 소리의 안개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는 흐느끼던 여자는 조용히 사라지고 호른만이 길게 여운으로 남는다.

음악이 끝날 때 쯤 옆의 친구와 같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눈빛을 보낸다. 좋구나..

 

두번째 스테이지는 String Quartet과 혼성으로 부른

Five Hebrew Love Songs. 히브리어로 부르는데

각각 제목이 재미있다.

그림, 빛나는 신부, 보통은, 눈이 오네, 부드러움.

 

에릭 휘태커의 아내가 이스라엘인이라 해서 이 곡을 작곡한 듯

곡 전체를 통해 유태인들의 독특한 멜로디가 흐른다.

5개의 연작 노래지만 각 곡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게 들린다.

그림을 보는 듯한 장면이 연상되는가 하면

청아한 멜로디로 춤곡이 빠르게 연주된다. 

마치 유태인의 민속음악 합창을 듣는 듯 하다.

그리고 노래 중 예배를 집전하는 듯한 낭독도 있고

다분히 정통 중세풍의 그레고리안 찬트의 멜로디도 흐른다.

주제가 사랑이다 보니 사랑의 과정이 보이는 듯 하다.

그림을 보며 스쳐 지나간 만남과 결혼과 보통의 삶 들...

사랑은 그렇게 부드럽게 흘러간다.

 

세번째 스테이지에서는 멕시코의 시인이 쓴 3개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래서 스페인어로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곡인 Cloudburst (폭우)

아카펠라로 시작한 노래가 서서히 폭풍이 다가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평온한 마을 그리고 누군가 외친다. 이어지는 웅성거림,

여기저기 물건들이 흔들리는 것을 핸드벨로 표현했다.

그리고 소란함이 각파트가 부르는 노래의 연속성으로 보여주고

폭우가 거세어 지며 천둥이 치며 나무가 쓰러지고 무대가 흔들린다.

연주자들이 그러한 광경을 팔로 손뼉으로 손가락으로 그리고 몸짓으로 나타낸다.

누군가의 애절한 소리가 솔로로 들리고 때로는 탄성이

노래로 그리고 숨소리로 들린다. 아...참...좋다...

음악은 들려지는 것만이 아니다. 들려주고 보여주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내리던 폭우가 서서히 잦아지고 가랑비가 되며 음악이 끝난다.

피아니시시모로 들리던 빗소리가 단원들의 작은 손놀림처럼 개울물로 되어 사라졌다.

 

지금 합창단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치는 모습과 천둥소리를 무대의 공간에 펼쳐진

하얀 3차원의 벽에 정확한 구상으로 그리고 있다.

 

두번째 곡인 Water Night (물의 야상곡)

이 곡은 우리 부부합창단에서 올해 창단 40주년 기념으로 연주된 곡이다.

전체 연주곡 중 이 곡에 대한 연습시간이 가장 많을 정도로 어려웠던 곡이다.

우린 아마츄어라 부르는 우리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듣는 청중도 그랬을 것이다.

프로들은 얼마나 잘하나..하고 작심하며 눈을 치켜 떴다.

그런데...

Night 하고 흐르는 첫 D음부터 우리와 다르다.

한 명이 소리를 내는 듯한 그 놀라운 음색의 느낌에 나는 비교하길 포기해 버렸다.

불협으로 이루어지는 음들, 13부합창의 소리들.

악보를 외우다시피 연습한 이 노래가 원래 이렇게 부르는것이구나 하고 인정해 버렸다.

 

세번째 곡 Little Birds

갑자기 무대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휘파람새?

새떼들이 숲 속에서 우짖는 소리들이 고운 여성들의 노래소리와 함께 들린다.

그렇게 불규칙적으로 우짖던 새들이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펴고 동시에 날아 가는 소리를

단원들이 모두 갑자기 종이 한 장을 다같이 흔드는 것으로 표현했다.

우와..정말 위대한 작곡가다.

누가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인터미션 후 성경의 이야기를 아카펠라로 연주되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전쟁에서 죽어 슬퍼함을 노래하는

When David Heard (다윗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줄곧 다윗이 흐느끼며 외치는 My Son의 가사가 가슴을 누른다.

아들을 잃은 왕의 침통함을 왕답게 슬퍼하는 장면이 노래로 보여진다.

옆에서 시녀들이 위로하는 듯한 합창과 그 안에서 조용히 흘러 나오는 왕의 탄식.

 

에릭 휘태커가 만든 가상합창단의 모습이 지금 소리로 들려진다.

합창을 들으면서 영상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보여지는 장면은 일부지만 상상되는 장면은 끝이 없다.

나는 커다란 왕궁에서 왕관을 쓰고 커다란 도포를 입고

아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침통하며 흐느끼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있다.

 

마지막 스테이지의 찰스 앤서니 실베스트의 시의 의한 노래 4곡.

첫 곡은 제목도 의외다.

Leonardo Dreams of His Flying Machine. (레오나르도가 비행기를 꿈꾸다)

이 노래가 시작되면서 이제야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합창을 부르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가사로 노래하던 합창은 갑자기 작업장에서 망치가 뚱땅거리는 기계음이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누군가 작업을 지시하는 소리 그렇게 완성되어가는 듯 하더니

합창은 갑자기 바람소리 하나로 끝났다. 비행기 날라가는 소리인가?

 

피카소가 유명해 진 것은 남이 그리지 않았던 사물의 뒷면을 그렸기 때문이다.

에릭 휘태커가 유명해졌고 앞으로 유명해 질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Lux Aurumque (금빛),

곡 제목부터 이 곡이 어떤 곡일지 짐작되는 곡이다.

금색깔의 빛. 얼마나 황홀할까?

이미 유튜브를 통해서 이 노래의 Virtual Choir 영상을 보았기에

오래 전 호주 팝페라 가수인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La Luna'라는

노래의 환상적인 영상같은  느낌일 것이다 하고 들었다.

우주 먼곳에서 빛이 오고 있다.

조용히 세상이 밝아 지고 있다.

조금씩 소리가 커지며 사물이 보인다.

천천히 구석 구석 빛이 스며든다.

 

노래가 그런 내 상상을 들려 주고 있다.

작곡가는 그런 의도로 작곡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듣는다.

작곡자의 손을 떠난 이상 곡의 해석에 대한 느낌은 나의 것이다.

 

세번째 곡인 Sleep 

에릭 휘태커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던 옆의 친구는

오늘 곡을 들으며 잘거라고 작심하고 듣더니 연주 내내 눈을 크게 뜨고

연주를 보았다. 나도 지난 밤 잠을 설쳐서 낮에 종일 졸았으니

오늘 연주를 보며 틀림없이 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곡을 들으면서까지 졸지 않았다, 아니 졸지 못했다.

한 음이라도 그냥 귀 뒤로 넘어가는 것이 없어서...

 

자장가처럼 조용한 멜로디가 흐른다.

그런데 이 곡을 듣다 보니 Lullaby 자장가가 아니고

수면의식 상태 즉 꿈을 노래한  것 같다.

꿈속에 내가 등에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듯이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며 땅에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니 내가 꿈꾼 것들을 다 잊어 버렸다.

노래는 꿈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마지막 곡은 Her Scred Spirit Soars. (거룩한 영혼이 솟아오르네.)

이 노래는 더블 코러스로 연주되어 단원들이 두 그룹으로 자리를 다시 배치했다.

얼마나 더 많은 화음을 동시에 만들어 내려는 것일까?

두개의 합창이 서로 어우러졌다가 흩어졌다 다시 만난다.

이 노래를 스테레오로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차라리 두 개의 그룹을 완전히 다른 곳에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오래 전 세종대강당에서 내가 좋아하는 탈리스 스콜라스의 합창을

들었을 때가 생각이 난다. 일부 단원들을 2층에 두고 무대위의 단원들과

만들어 내는 화음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오늘 연주는 곡의 특성상 앵콜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특별히 아직 한국에서 연주된 적이 없는 작곡자 곡의 일부라며

제목이 올림픽 슬로건인 Higher, Faster, Stronger

Triple Choir 곡인 이 곡을 들으면서 이제야 평범한 합창을 듣는 듯한

느낌을 가졌지만 역시 위대한 작곡자다운 Multi Chorus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결국 오늘 연주는 종일 나같은 합창 매니아를 환상의 세계속으로 빠지게 했다.

요리로 비유한다면 미슐랭 5스타급의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쉐프가 만든

요리로 식사를 한 느낌이랄까? 

음악에 대한 감성의 포만감이 든다.

 

이 곡을 내년 쯤에 서울의 큰 연주홀에서 듣고 싶은 마음은

아마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올해 보았던 음악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회라고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