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시온성 합창단을 추억하며

carmina 2016. 1. 8. 12:50

 

 

 

 

시온성 합창단을 추억하며...

 

1985년 서소문교회에서 직장인 성가대를 하던 중

같이 성가대 활동을 하던 K형이 어느날

다른 합창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마침 회사가 바쁘지 않은 때라 쾌히 응낙했고,

어느 날 나를 데려 간 곳은 중앙청 옆에의 조그만 교회.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시작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를 데리고 간 K형은 어느 나이 지긋한 신사에게 나를 소개한다.

흰 머리가 가득한 그 분은 목원대 교수라 한다.

성함은 이동일.

나는 혹 언제가 부활절 칸타타 중 '아버지시여'를 작곡한 분이냐고 묻자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간단한 인사 후 7시에 연습이 시작되었는데 40명 넘은 대원이 자리에

빼곡히 들어 차 있다.

악보는 일반 성가곡집이 아니고 낱피스로 나누어 주는데

가만히 보니 복사본이 아니고 하나 하나 가격이 달러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외국에서 모두 구입 해 온 원본으로 보인다.

악보 하나 하나에 모두 도장이 찍혀져 있다.

저작권에 속해 있는 악보라고...

그 옆에 조그마하게 찍혀 있는 이름. T. Tom Lee

아마 교수님의 영문 이름인가 보다.

 

악보의 제목은 Seven Motet Motet이란 말이 많이 나와

그 당시엔 Motet이 제목인 줄 알았으나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 보고서야

Motet이 음악의 한 쟝르로서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바로크 시대나

12 ~ 13세기에 무척 유명한 합창곡들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모텟음악에 대한 관심은 거의 집착에 가까왔고,

그 뒤 외국생활을 하면서도 주로 모텟음악이 있는 씨디를 구입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러하니 가사는 당연히 모두 영어 혹은 라틴어.

악보를 보는 순간 노래하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트 연습도 없이 들어 가는데

감히 내 소리가 튀어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모두가 정확한 화음으로

자기 파트를 찾아 입을 벌린다.

그것도 4부가 아닌 8부 합창을...

노래가 잠시 쉰 틈을 타서 옆에 있는 이에게 살며시 물어 보았다.

혹 전에 다 연습한 것이냐고...

그렇지 않단다. 아니 그럼 모두 이 어려운 악보를 초견에 읽어간다는 것인가?

모두 전공자들이냐고 묻자, 대원 수의 반은 전공자들이라 한다.

새삼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반 수 정도 차지하고 있고

그 외는 직장인들로 보인다.

 

다시 노래는 이어지는데 40명이 넘는 인원이 노래하는데

정말 한 서너명이 노래하는 것처럼 피아노 (여리게)로 내는데

이 화음은 여태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기막힌 화음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피아노음악이다 보니 교수님의 지휘하시는 팔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눈섭으로 혹은 손 끝으로 사인을 보내고 대원들은 그 의미를 잘도 알아

듣는다.

어찌 이렇게 의사가 통할 수 있을까?

 

늘 성가대가 하는 교회음악에 익숙해 있는 나로서는 종교 음악이지만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다른 색갈로 연주되는 것을 보고는

그만 첫 곡에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거기다가 피아노반주는 단지 음을 익히기 위해서 뿐이고

일단 음이 익숙해져 있으면 가차없이 무반주로 연습시키는 바람에

나 같은 음정에 문외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등줄기에 땀이 솟는다.

나는 거의 가성으로 노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내 주위에 누구도 그 잘난 성량을 뽐내지 않는다.

소프라노는 물론 앨토 조차도 감히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음악은 충분히 그 의미가 전달이 되고도 남았다.

워낙 조용한 곳에서 연습을 해서인가?

우리의 소리가 성전을 가득 메운다.

 

교수님은 배음의 실체를 확인시켜 준다.

즉 한 옥타브 위 혹은 아래의 소리를 발성하지 않는데도

어느 음을 발성하고 가만히 들어 보니 그 음의 한 옥타브되는 소리가 교회 안에

맴돌고 있다.

음과 음만 있다면 음악을 타고 앉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교수님의 말씀은 그 실연을 대원을 통해서 입증해 보이신다.

정말 단 두음을 내는데도 어찌 아름다운지

난 단지 입만 벌리고 놀랄 따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연습 시간에

누구 하나 늦게 들어 오는 사람이 없다.

아마 늦게 오느니 차라리 안 오는 것이 나은지,

연습이 시작된 지 한 참 되었는데

누구도 삐걱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이가 없다.

연습 후에 서울시청에서 근무한다는 총무라는 분에게서

이 합창단의 역사와 교수님의 명성에 대해서 들었다.

시온성 합창단은 이 동일 교수님이 약 40년전 창설하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국내 합창단이라는 것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등이 이 합창단을 거쳐 갔고,

과거엔 미 8군 영내에서도 연습하였으며,

교수님의 명성은 국내에 합창단 역사를 아는 애호가라면

반드시 그 입에 회자되곤 한단다.

그 엄격한 지휘자의 카리스마가...

 

악보에 대해서 물어 보니, 악보는 모두 교수님이 미국에서 사가지고 오는 것이며,

연습 후에는 모두 회수하여 절대 외부로 반출이 안 된다고 한다.

교수님은 대전에서 수업이 끝난 후 기차를 타고 올라와 합창단을 연습시키고

다시 밤에 기차로 대전으로 내려 가신단다.

사례는 일절 없고, 많지 않은 합창단의 회비는 단지 운영자금이라 한다.

회비는 학생과 직장인을 구별해서 받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주 부터 시온성 합창단의 화음에 매료된 나는

지각도 그리고 결석도 없이 연습에 몰두 했다.

악보를 주지 않으니 개인 연습을 하지 못하고 연습시의 멜로디를 기억해서

피아노를 똥땅 거려가며 음을 기억해 내며 음을 여리게 내는 법을 혼자 연습했고,

연습 때는 지휘자님의 온 몸을 보며 따라 했다.

내가 너무 긴장을 하며 연습을 하니

어느 날 교수님이 잠간 쉬는 시간에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소리 내라고 말씀하셔서,

이 말씀이 내가 너무 못해서 그러는가 보다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악보를 초견에 읽는 것도 무던히 연습해야 했고,

소리를 아주 조심히 내는 법도 별도로 혼자서 연습해야 했다.

 

교수님의 카리스마는 익히 소문나 있는대로 대단하였다.

갖가지 교수님에 대한 에피소드를 추억해 본다.

정확히 7시면 모두 모여 연습을 시작하는데,

어느 날 여학생 한 명이 조금 늦었다.

이제 막 연습을 시작하는 참인데 그 여학생 살며시 자리에 와 앉으니

교수님이 "너 왜 늦었냐?" 여학생 시계를 보며

"교수님 제 시계는 이제 7시인데요?"

교수님이 자신을 시계를 보더니

"어! 내 시계가 고장났나 보네" 하시면서

시계를 손목에서 끌러 내시더니 바닥에다 던지시고

시계를 구둣발 뒤꿈치로 밟아 버려 박살을 내시고는

그 학생에게 큰 소리로 소리치시기를

"! 너 나가! 내가 너 같은 것 가르치기 싫어."

교수님의 노여움에 온 대원이 바짝 얼어 붙었다.

그 학생이 쫓겨 난 뒤 교수님은 한 참을 멍하니 앉아 계신 후 분노를 삭이시고

다시 연습에 들어 가야만 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모두 다 초견으로 악보를 읽어 내려 가지만

어느 누구 하나 감히 교수님의 지휘를 보지 않고

노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교수님의 지휘법이 워낙 까다로와 지휘를 놓치면 박자가 안 맞아

금방 뒷 북을 치거나 앞 북을 치게 되고 금방 누가 틀렸는지 알게 된다.

어느 날 맨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 한 명이 자칫 박자를 놓쳤는지 얼버무렸다.

노래는 중지되고 교수님이 학생을 쳐다보며,

'너 왜 그러냐" 그 여학생 조금 미안했던지..

"악보가 조금 안 보여서요."

"그래? 그 악보 이리 줘봐"

교수님은 학생에게서 악보를 받아 들더니

그만 악보의 한 가운데를 박박 찢어 버린다.

"너 나가! 틀리면 틀렸다고 해야지, 악보 핑계를 해? 못된 것 같으니라고.."

어느 날은 아무래도 교수님이 원하는 화음을 우리가 내지 못하는지

윗 테와 위 부분 알이 없는 반쪽짜리 돋보기 안경을 집어 던지시며

노여워 하시더니 평소 하지 않던 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눈을 살며시 뜨고 보니

교수님은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간단히 너무 힘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더니

정형화된 기도의 말미도 하지 않고 아멘으로 끝내셨다.

 

교수님은 미국인이라 하신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을 하셨고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보니

미국영화의 식사기도가 생각났다.

교수님은 연습 후 우리 몇 몇 직장인들과 같이 기차시간전 까지

포장마차에 들어 가 간단히 한 잔 하시는 것을 즐겨하셨고,

소리만을 가지고 으시대는 음대생들을 특히 미워하셨다.

국내의 기존 성악가들이나 유명 합창단의 지휘자들을 경멸하셨고,

이 들이 우리나라 음악을 망치는 이들이라고 가끔 이야기하셨다.

이렇게 괴퍅한 성격의 지휘자지만,

국내의 전문 합창단에 속해있는 단원들이 배우러 오고

음대생들도 교수님의 무시와 질시를 감수하고서 배우러 오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워낙 화음이 좋아 나도 내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와서 같이 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이 화음에 매료되어 모텟 음악에 폭 빠져 버리고 말았다.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일년 내내 연습만 할 뿐이지

도대체 공연 계획이란 것이 없어

대원들이 총무를 통해서 불평했더니

어느 날 교수님이 대원들의 희망을 접수하고 공연하기로 승락하셨으나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이란 현재 대원수가 50명인데 각 파트에 10명씩

즉 네 파트를 퍼스트와 세컨으로 해서 둘로 나누니 80명을 채워 놓으라는 것이다.

그 때부터 총무의 발길은 바빠졌다.

혹 안 나오는 사람 있으면 전화해서 다시 나오게 하고

신입단원 보충에 열을 올리고 등등…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신입단원들은 쉽게 보충되지 않았다.

60명을 조금 넘기고 교수님께 사정해 보았더니

70명까지만 채워 놓으라고 양보를 받고 다시 단원 모집을 애 썼으나

교수님이 정해 준 기한내에 그 인원을 채워 놓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일어났다. 70명을 채울 수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노발대발하시면서

내가 네녀석들 이래서 싫어, 공연한다고 허락했으면

인원이나 채워 놓아야지, 그것도 못채우고 공연하자고 요청해?

내가 이런 모습 보기 싫어서 합창단지휘를 관두겠어

하고 선언하시더니 그길로 대전으로 내려가 버리셨다.

그리고는 목원대교수직도 사직하시고 미국으로 가 버리셨다.

우린 정말 어이가 없어 그 다음주에 대책을 논의하고

교수님없이 연습해 보기로하고

과거국립합창단멤버였던 사람을 지휘자로 내세워 한 주정도 연습했지만,

같은 악보, 같은 사람, 같은 반주자가 연습하는데도

전혀 그 화음이 나오지않아 모두 안타까워하더니 결국

그 다음주부터 시온성합창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어찌 이럴 수 있는지 처음에도 무지 이해가 안갔지만,

나중 내가 조그만 교회지휘를 맡으면서 이해가 됐다.

합창단 지휘자의 음악성이 가장 중요한 것 임을.

 

시온성합창단 역사 40 년 중에 LP디스크를 한 장 제작한 적이 있다 해서

신촌의 고서방을 뒤지며 음반을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교수님이 연하는것은 단 한번 보았는데 어느 날 인천의 주안감리교회에

목원대합창단을 이끌고오셔 찬양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는데

화음이 너무 좋아 아직도 그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한다.

 

합창단이 해체되고 내가 제일 원했던 것은 그당시 악보였는데,

나는 합창단 해체 직후 직장에서 해외 근무를 발령받아

1년 넘게 근무하다 귀국하여

그 당시의 총무님 직장인 시청에 전화하여 겨우 연락한 후

악보 좀 구할수 있느냐 했더니, 그 총무가 하는 말에 나는 그만 감복했다.

교수님이 미국으로 떠나시면서 몇 몇 단원들에 한해서

악보를 주어도 된다고 허락하셨는데

그 중에 내가 하나 있더라고.

지금도 그때의 악보를 가지고 있으나,

아무리 좋은 합창단원을 구성해 화음을 맞춘다고 해도

교수님이 없는 한 그 화음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 미국에 출장하여 교수님의 소재를 찾았지만 전화번호책에

T. Tom Lee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 포기했는데

어느 날 교수님의 소식을 내가 합창단에 데리고 갔던 친구에게 들었다.

미국에서 다시 시온성합창단을 조직하여 합창 활동을 하시는데

마침 그 친구의 처남이 그 합창단에 있다고

얼마나 반가왔는지.

비록 가서 뵙지는 못하지만 이제 팔순이 가까웠을텐데

아직도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시는 모습이 부러웠고,

시온성합창단이란 것이 그 분에게는 심장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서울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교수님께 노래를 배우고자

미국으로 건너 간 이가 상당히 있음을 나중에야 들었다.

 

시온성이란 말도 영어의 ZION 아니고 한문으로 詩溫聲 이라고 표기하여

특색을 가졌던 합창단을 회상하며

나는 오늘도 나는 음반가게에서 모텟을 보는대로 구입하고

나의 조그만 음악실에서 바하, 버드, 팔레스트리나, 쉬츠,

부르크너, 모짜르트, 드보르작

유명 작곡가들이 조금씩 작곡한 모텟을 들으며 휴식을 취한다

 

며칠 낯선 이메일하나가 왔다. 제목이 시온성합창단이라고..

어느 분이 자기가 지금 동일교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미국에서 생활하시다가 최근 한국에 오셔서 천안에 잠시 기거하고 계시다고..

올해 연세가 아마도 80대중반쯤..인터넷으로 우연히 글을 보았고

교수님 계신곳을 알려주고자 한다고..

전화번호를 받고 20년만에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아직도정정하신 목소리.. 분은 나를 모르시겠지만 합창이야기라면 통하는

그것도 자기가 20년전 가르친 제자라니..

거의 한 시간 전화대화를 하면서

얼마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시던지..

아직도 기회있으면 합창세미나같은것을 하고 싶으시다고..

제대로 합창을 알려 주고 싶으시다고..

우리 부부합창단에서 올해 메시아 원어연주를 한다고 말씀드리니

기회있으면 연습때 와서 들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고

어느 날 내게 전화로 자신이 어디 곳을 가야 하는데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셨지만 내가 업무 중 나갈 형편이 못되어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시온성합창단 1947년에 창단되었고

1957년에 연주회를 했다는 짧은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