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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열차에 대한 추억

carmina 2016. 2. 18. 12:21

 

2016. 2. 19

 

 

오늘 자 신문에 앞으로 일주일후에 이전의 인천과 수원을 오가던

수인선 (당시는 이 열차를 동차라 불렀다) 협궤열차 노선이

다시 개통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올라왔다.

 

내게는 이 증기기관차인 협궤열차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이 있다.

협궤라 하면 어느 정도냐 하면 학창시절에 두 다리를 벌리면 양쪽 철로를

모두 밟으며 엉금 엉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당시는 서울로 가는 일반열차를 타 본 적이 없었으나

집 근처에 있는 인천-서울간 기차길에서 선로위에 귀를 대고

언제 기차가 오는지 확인하고 선로위에 못을 놓아 기차가 지나간 뒤

납작하게 눌려 버린 못을 이용해 쇠꼬챙이로 만들며 놀던 경험이 있어

그 레일과 폭이 달라 협궤열차라는 것을 알았다.

기록에 의하면 협궤 기차길 폭은 76센티 정도이고 일반 기차길은 그 배인

143 센티 정도다.

 

열차내의 의자는 지금의 전철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그 폭이 좁아 의자 사이는 통로에 사람 두명이 서 있으면

지나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았고,

꿱 꿱 소리를 내고 흰 연기를 뿜으며 기차가 달리면

양쪽 의자위의 손잡이가 시계추처럼 흔들리다가 서로 부딪힐 정도였다.

열차가 폭이 좁다 보니 어느 해인가 건널목에서 버스가 기차의

옆구리를 박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만 기차가 통째로 옆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열차의 화장실도 거의 사람하나 들어갈 정도로 좁고

분뇨도 그대로 철길로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이상했는데

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하다 보니 유럽도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

신기하기만 했다.

 

소래와 달월 사이에 소래포구가 있고 소래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밑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 보며

손으로 잡을 난간도 없는 다리 위를 침목만 밟으며 건너기도 했다.

 

많은 농촌의 농부들이 소래에 와서 생선을 샀기에 늘 소래는 붐볐고

기차안에는 생선냄새가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기차안에서 자연스럽게 해산물과 농산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시골 아줌마들의 걸죽한 농담들이 많이 오갔다.

또한 표를 검사하는 차장이 지나가면 막걸리도 한 잔 같이 하며

동네사람들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특히 간이역이었던 달월역에는 기차역사도 없고

단지 군대의 1인용 초소같은 것이 있어

그 곳에서 타는 사람들은 표 대신 기차 내  검표원에게 요금을 사야만 했다.

 

기차길이 시골길을 다니다 보니 기적을 울리면 정말 시끄러운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고, 흰 연기를 내 뿜으로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머리 긴 여자가 힘차게 달리는 것이 연상되었다.  

 

기차는 물론 제시간에 출발하지만

가끔 기차가 출발했는데 멀리서 급히 뛰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기차가 서서 기다렸다가 그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전에는 수인선 기차가 남인천역에서 수원까지 운행되었는데

남인천 역 인근에 인천 항만이 생기고

지금의 인천고속버스터미널 지역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서면서

차량의 통행이 많아지다 보니 시발역을 송도로 바꾸었다.

 

내 기억으로는 남인천-용현-송도-남동-소래-달월-군자-원곡-고잔 

그리고 몇 개의 정거장 지나 수원역이었는데

기차로는 어머님 고향이신 원곡까지 가 본 경험이 전부다.

지금도 경기도 시흥지역에 몇 개 남아있지만

시흥과 소래 및 군자지역에는 거대한 염전이 있었다.

원래 일본인들이 이 쪽 지역의 소금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수인선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넓은 들에 소금을 저장하는 검은 목조 창고건물들이 이색적이었고

지금은 많은 사진 매니아들이 그 이국적인 풍경을 담으러

그 곳을 찾고 있다. 

 

부모님 고향이 모두 지금의 반월과 군자 지역이라

갈일이 많았을텐데 태어나서 처음 가 본 기억은

6학년 졸업 즈음이었다.

그 쪽에 친척들이 많았는데

왜 그 전에는 갈 기회가 없었는지 나도 궁금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타본 수인선 기차.

그리고 내가 처음 간 그 날도 어머니는 형제들 중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입학때까지 놀고 있는 나만 데리고 가셨다.

이유도 모르고 따라간 외갓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시골 집 마루에 있는

하얀 천막 앞에서 꺼이 꺼이 울고 계셨다.

알고보니 생전 보지 못한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왜 할머니는 내 기억에 없을까?

왜 한 번도 뵌 적이 없을까?

 

그런데 어머니랑 거의 비슷한 얼굴의 어떤 할머니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챙겨 주신다. 그 분도 알고보니 생전 처음 보는 큰 이모였다.

왜 그보다 어린 시절에는 친척들을 거의 보지 못했을까?

내가 가지는 않았어도 우리 집에 오셨을텐데 내가 기억못하는 걸까?

 

그 뒤 중고등학교 시절 가끔 지금의 군자 지역에 사시는

큰사촌형님댁에 여름 방학에 놀러가면 형님이

기차가 도착할 때 쯤 동구밖까지 마중나와 계셨다.

집 옆 참외원두막에서 자고

모기불 피워 놓은 넓은 마당에 멍석깔아 놓고 하늘을 보며 별을 보았다.

지금도 그 때 누워 보았던 밤하늘의 별을 잊지 못한다.

유성이 흐르는 순간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 해서

말할 준비하다가도 막상 유성이 흐르는 순간 소리지르며 감탄하다가

소원을 말하지 못해 스스로 바보라고 머리를 쥐어 뜯곤 했다.

그 때 내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버님 친척들 주로 계시는 군자역 다음은 어머니 고향이신

원곡역이라 이모님댁에도 자주 놀러간 기억이 있다.

농사는 짓지 않았지만 시골에서 쌀을 도심지의 식당에

공급하던 장사를 하시던 이모님은 장사 수완이 좋아 열심히 돈을 버셨고

조금 유식해 보이는 이모부님은 덕분에 일도 안하고

가끔 뜨개질이나 하며 편하게 여생을 보내셨다.

어쩌다 내가 이모님댁에 놀러가면 이모부님은 내게

시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많이 의견을 내고 이야기하자 하셨건만

난 그다지 그런 대화를 즐겨하지 않았기에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다.

 

겨울이면 시골 사람들은 조그만 방에 모여 화투로 세월을 보냈고

아이들은 콩의 속을 파서 청산가리를 넣은 싸이나를 들판에 놓아

꿩을 잡아 꿩고기를 먹던 기억도 있다.

이모님이 돈을 벌어 그 쓰러져가는 시골 집에

커다란 오디오셋트를 사 놓았는데 들을 테이프가 몇 개 없어

어린 내 눈에도 시골사람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마을 앞 언덕에 올라가면 저녁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골골이 퍼지던 아름다운 시골풍경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가문에서 아들로서는 막내이셨던 아버님은 늘 직장일 때문에

할아버지 제사때 시골 가실 형편이 안되어 형님들이나

내가 대학생시절에는 아버님을 대신해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늘 수인선열차를 탔다.

기일에 갈 때는 그다지 수인선열차가 붐비지 않았는데

명절에 타면 그야말로 피난민 열차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들이 기차에 매달려 갔다.

기차도 하루에 4번 그리고 단지 2칸만 달고 다녔다.

그래도 인도나 방글라데시의 기차처럼 기차 위에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

 

제일 힘든 것은 할아버지나 큰 아버지 제사는 주로 겨울이었는데

제사는 추운데서 지내야 한다며 그 추운 겨울 밤 마루에 있는 뒤주에

제사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그야말로 발이 얼어붙어 노랗게 변할 정도였다.

제사가 끝나면 얼른 흙냄새 가득한 안방으로 들어가

뜨거운 아랫목에 발을 넣고 청동화로에 이글거리는 숯에 손을 녹여야 했다.

 

일몰 무렵에 수인선 열차를 타면 서해 갯벌위로 비치는 거대한 벌건 빛이

긴 궤적을 그려 장관을 이루었다.

어느 해인가 설날 아침, 시골에서 차례를 지내고 얼른 인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소래다리를 지나다가 정박되어 있는 어선들이

한 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뜻으로 돛대에 매단 알록달록한 깃발들이

아름다워 중간에 내려 마침 들고 있던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는 집에 늦게 왔다고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625 전쟁 때 인천에 살던 우리 가족은 피난을 고향으로 가기 위해

나섰으나 소래다리 앞에서 멈칫거리다가 큰 형님이 바다에 빠졌다며

지금도 사촌형님은 그 때의 일을 회상하곤 하셨다.

 

어린 시절, 큰 잘못을 저질러 집을 가출했을 때

내가 찾아 간 곳은 군자와 원곡 중간쯤의 큰 이모님댁이었다.

그 때는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서로 연락도 안되었으니

아마 어머님이 걱정하셨겠지만 나중에 내가 그 곳에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안심하셨다 한다.

 

좀처럼 고향을 찾지 않던 아버님이 어느 해 여름 양복을 차려입고

고향을 찾았는데 그 때 나만 데리고 가셨다.

나는 아직도 그 때 아버님 하늘 빛 양복 색깔을 기억한다.

논둑길을 걸어 기차역으로 가다가 더우시니 양복을 벗어

팔에 걸치고 내게 이런 둑길에서는 둑길 양쪽의 풀을 서로 묶어 놓아

다른 사람들을 골탕먹일 수 있다 하며 매어놓으셨고

풀잎으로 피리를 부는 것을 내게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내가 결혼 뒤로는 아버님을 모시고 따로 여행가기는 했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아버님과 멀리 간 것은 오로지 이 것 하나뿐이었다.

 

군대 전역 후 복학하기 전까지

나 어린 시절 나를 처음 교회에 데리고 갔던 고등학생이

목사님이 되어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마침 그 곳도 역시 수인선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원곡지역이었다.

 

그래서 거의 반년동안 매주 토요일이면 수인선기차를 타고

그 교회에 찾아 가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주일에는 성가대를 지휘하고

주일 오후에 다시 돌아오는 기차를 타며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토요일 밤이면 아이들이 내게 찐 고구마를 들고 찾아 오고

때로는 랜턴불을 들고 참새를 잡으러 간 기억도 있다.

 

그 교회를 세우신 장로님은 넓은 땅과 돼지를 키우셨는데

가끔 내가 갈 때  일하는 사람을 시켜 돼지를 잡았다.

덩치가 큰 일하는 청년은 돼지의 이마를 망치로 쳐서 도살했다.

차마 그 모습은 보기 어려워 보지 않았는데

돼지를 잡고 김이 무럭 무럭 나는 간을 무쇠솥에 넣어 익혀서 내오는

고기는 정말 맛있었고 내가 집에 돌아 올 때 늘 잡은 고기를

넉넉하게 싸 주시곤 하여 우리 온 식구가 한동안 고기를 실컷 먹기도 했다.

 

부모님 고향이었고, 내게 어린시절부터 젊은시절까지 추억이 있던 그 곳.

부모님과 일찍 돌아가신 큰형님 산소가 있는 그 곳 인근의 고등학교에서

지금 내 아들이 교사를 하고 있어 지금은 완전히 변해 버린 그 곳을

가끔 가지만 아직도 그 시절이 생각나 늘 감회가 깊다.

 

반월신도시가 생기며 그 넓은 지역이 모두 공단과 아파트단지가 되고

주민들이 토지 보상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곳에 살고 계시는

작은 이모님 말씀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보상액을 받아 모두 사기나 흐지 부지 낭비하여 모두 날렸다 한다.

 

수원 인천간을 오가는 산업도로가 생긴 이후 수인선 운행이 중단되고

철도청에서 수인선을 철도여행 상품으로 나온 적도 있지만 타보지는 못했다. 

 

 (사진은 다른 사람 블로그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