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36년 직장생활을 회고하며...

carmina 2016. 3. 30. 21:33

 

 

2016. 3. 31

 

이제 공식적으로 나의 직장생활을 마무리 하는 날이다.

 

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들이 주말마다 집에 오는데

지난 주일 저녁 식사후에 느닷없이 케이크를 하나 가지고 왔다.

아빠가 은퇴하시는 날 집에 없을테니 미리 축하해 주고 싶다며

케이크에 양초를 3개 꽂았다.

하나는 사회생활전까지의 양초를 의미하고

또 하나는 사회생활동안의 양초  

나머지는 은퇴 후 생활을 미리 축복하는 양초라 한다.

하나씩 불어끄고 마지막 세번째 양초는 세개를 합하여

하나로 다 붙여 불빛을 크게 만들었다.

내 앞날이 그렇게 빛나게 되길 바라면서...

 

1981년 2월 대학 졸업식을 며칠 앞둔 아버님 생신날.

손님들 가득 모였는데 우편 배달부의 전보가 전해졌다.

C엔지니어링회사에 합격통보.

면접볼 당시만 해도 엔지니어링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면서

영어회화 학원에서 나를 눈여겨 본 대학 선배가 특별히 

자기네 회사 입사시험에 나를 추천하였는데

당시는 몰랐지만 우리나라 엔지니어링 회사에서는

거의 사관학교라 불리울 정도로 가장 알아주는 플랜트 건설회사였다.

엔지니어링회사와 일반건설회사가 별개로 있었고

기타 계열사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발전 5개년 계획으로 중화학 산업을

육성할 때 국내 화학공장 정유공장의 건설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학교에 학생 추천을 요청을 받은 

담임교수님은 워낙 이름있는 회사다 보니

4학년 학생 중 제법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 몇 명을 추천했고

나는 그 회사에 다니는 졸업생이 추천하니 억지로 하나 끼워 넣었다.

 

대학 시절 워낙 기타하나 들고 놀러 다니기만 좋아하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군시절부터였다.

어학의 필요성을 실감해서 군시절에 독학으로 일본어를 많이 배웠고

전역하고나서는 군시절 전우의 충고로 영어회화에 올인했다.

당시 누구도 외국어에 대해 관심없을 때 나는 4학년 우리 과에서도

전공 실력은 성적은 약해도 외국어는 알아 주는 괴짜였다.

졸업 레포트도 영어 원서와 일본어 전공관련 책을 줄줄이 참고해서

만들어 제출하니 친구들도 조교들도 놀랐었다.

 

우리 과의 성적좋은 친구들 몇 명과 내가 면접을 보았으나

서울 일류공대 학생들보다는 실력이 많이 부족해 모두 탈락하고 

그 중 심사관들앞에서 일본어와 영어회화에 발군의 기량을 보인 나만 합격되었다.

당시는 우리나라 플랜트 건설업체들이 주로 일본 대형 업체들의

하청을 받아 수주를 하고 중동지역에서 외국사업주의 공사를 하기에

일본어와 영어를 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던 시기였다. 

 

그 때부터 여의도 본사가 있는 빌딩에서 나의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특히 해외업무만을 주로 담당하고 내가 보는 모든 문서는

영어와 약간의 일본어 뿐이었다.

늘 영어 문서를 직접 타자를 쳐서 작성하여 했으며

시간차가 다른 외국업체와의 교신을 위해 늘 밤늦게까지 일하고

텔렉스를 직접 두들겨 대야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영등포에서 인천가는 총알택시 타는 것은 지극한 일상이었다.

너무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면 야근 겸 회식을 하니 몸이 견디지 못해

입사 3개월만에 급성간염으로 쓰러진 후 3개월을 병가를 내고 쉬어야 했다.

 

내 첫 상관은 K대 법대를 졸업하고 카츄사를 제대한 수재였다.

그리고 대학 합창단 출신이라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나와 코드가 잘 맞았다.

업무 후에는 사무실 혹은 한강변에서 또 다른 동료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이란과 이라크의 중동전쟁으로 그 지역에서 일본대형업체들의

하청을 맡아하던 공사들의 기성을 받지 못해 휘청거리고

월급이 자주 밀리니 직원들은 한두명씩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다른 대기업에 매각된다는 소문에 나 또한 갈팡질팡할 때 

먼저 이직한 직속 상관이 다니던 대형 Y건설업체로 입사해

다시 해외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직한지 얼마 안되어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내 전공과는 다른 일을 하는 일반건설회사라 그 곳에서 나는 전공과 관계없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연말에 번번히 대리 진급에 누락되었다.

 

그렇게 진급 발표가 나는 년말에는 같이 누락된 동료들끼리 겨울에 설악산행을 다녔다.

그 때 제대로 산행의 즐거움을 알았다. 그 뒤로는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인생 새옹지마랄까? 그 자연의 즐거움을 평생 누리며 살고 있다.

 

사우디에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공사 계약 담당자로 내가 추천되었다.

당시 직원들 중 엔지니어들은 정말 영어를 못해 외국 사업주와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았기에 나 같은 사람들이 절대 필요했다.

매일 영어로 생각하고 어려운 계약 문서를 쓰고 회의를 해야만 하는 고된 업무.

 

결혼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데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어머니는

쌀알이 알알이야 (사우디 아라비아의 어머니 발음)로 떠나는 

나를 다시 못 보고 돌아가시는 줄 알고 무척이나 슬퍼하셨다.

당시는 워낙 많은 인력들이 중동으로 파견되었기에

대한항공에서 전세기를 띄워 노무자들을 실어 날랐고

큰 현장에는 한국인 노동자가 몇 천명씩 근무하기도 했다.

 

새벽 3시경 도착한 사우디의 담맘 공항.

비행기 트랩을 내리니 코로 훅 하고 들어오는 사막의 열기에 겁이 났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새벽 3시 반경 캠프로 가는데

그 시간에 노무자들이 대형 노란 버스를 타고 현장으로 나가고 있다.

세상에... 그 새벽부터 일을 나가면 잠은 몇 시간 자는건가?

다음 날 부터 나도 똑 같은 시간에 일어나 현장을 나가고

노무자들은 낮에 오침하고 저녁에 일찍 끝나지만

나는 관리직이다 보니 일어나는 시간은 같아도

저녁에 일 끝나는 시간은 늦으니 잠이 절대 부족했다.

그리고 피곤이 풀리지 않는 나날을 보내니 내 몸이 견뎌주질 못하고

매일 매일 코피를 쏟았다.

그래도 가끔 휴일 근무하지 않는 날 멀리 차를 타고 나가

한인교회에 가서 찬양대를 같이 하는 즐거움도 있었고

저녁에는 시내 쇼핑나가서 이국의 풍경을 보며

바닷가에서 양고기를 구워먹고 멀리 오아시스로 소풍나간 추억도 있다.

 

당시는 8개월마다 휴가였는데 내가 워낙 코피를 많이 흘리니

휴가 시기에 맞추어 1차 해외 근무를 끝냈다.

그리고 다시 서소문에 빌딩을 새로 지은 본사에 복귀해

인근의 교회에서 하는 직장인 예배를 다니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직장 상관의 처제를 소개받아 8개월만에 결혼했으나

나는 다시 해외 현장에 최연소 현장소장으로 발령 받아

결혼 3개월만에 비행기를 타고 사우디 현장으로 떠났다.

원래 8개월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그 곳에서 산전수전 어려운 일을 겪어가며

13개월을 근무하고 귀국하니 해외건설 경기가 불황이라

해외에서 들어오는 직원은 가능한 대기발령을 놓고 있다가

국내 근무기준으로 퇴직금 정산될 때 그만두게 하는 것이 관례라 하여

현장소장 종결 서류 보고만 마치고 사표를 냈다.

 

그러나 퇴직 후 바로 첫 직장에서 같이 입사했던 친구 한 명이

대기업인 L그룹의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하다가

나를 추천하여 이제까지 잠시 내 전공에서 빗나갔던 Y건설에서의

진급누락은 말끔히 씻어 버리고 동종업체 평균 수준을 대우받아

다시 플랜트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L엔지니어링사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 때 부터 내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아내도 결혼전부터 하던 피아노학원이 잘 되어 늘 바빴고

나는 대기업에 있다보니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다.

당시 우리 부서 부장도 승용차가 없던 시절에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고 싶어 집보다 먼저 승용차를 샀고

수도권 신도시분양에 편승하여 지금 사는 부천에 이제까지 내가 살던

집보다 2.5배나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해야 하나.

그 좋은 직장에서 우리 팀의 보스는 그야말로 추억하기 싫을 정도로

별난 사람이라 직장생활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거의 악몽의 연속이었다.

때론 그 사람과 차를 타고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큼 내 정신이

피폐해 졌다.

아래 직원들을 멸시하는 것은 보통이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가장 극에 달한 상황은 어느 해 내가 아버님 돌아가시고 경조 휴가를 받아

장례를 치룬 얼마 뒤 아내가 둘째를 낳게 되어 또 하루 경조휴가를 내니

내게 '별짓거리 다한다'며 빈정거리는 보고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결국 3년을 조금 넘기고 그 회사에 사표를 내 던졌다.

내가 그만 두니 그 보스는 내가 다른 직장에 가더라도

그 곳에 친구가 있을테니 다 말해 놓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하는

정말 인간이 아닌 심성을 가진 사람 옆을 떠나니 무척 행복했다.

나 이외에도 그 부서에서 일하던 직원이 무려 27명이 순차적으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같은 부부합창단 단원 중 동종계열에 근무하는 이들이 있어

회사를 나오자 마자 다른 대기업 두군데서 경력으로 입사하라는 추천을 받았다.

한 곳은 그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추천한 곳이고

다른 한 곳은 대리급 친구가 추천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높은 직위에 있는 분이 초대한 회사로 입사했다가 내가  혹시라도 일을 잘 못하여

실망케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대리가 추천하는 대기업으로 정해 입사했다.

세월 지나고 보니 중역이 초대한 회사는 얼마 뒤 경영난으로 부도가 나서

결국 다른 회사로 넘어갔으나 대리 소개로 입사한 S건설 회사는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플랜트 업체로는 알아주는 견실한 기업으로 남아 있다.

 

S건설에 입사했으나 아직 회사는 해외건설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내가 들어간 팀도 신생팀이라 새로운 시장개척에 발벗고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팀장이 워낙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분이라

결국 2년만에 중남미의 멕시코에 신시장을 개척하고

업계에서 놀랄만한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나도 담당자로 건설협회에 초대받아 타 건설회사 영업 담당자들에게

그 성과를 발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여 발표하기도 했을 정도로

타 사의 부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멕시코도 IMF가 터져 프로젝트 발주가 주춤할 때

우리 회사는 지난 몇 년간의 쌓은 경험을 이용하여

중동을 비롯한 전세계로 진출하는데 단연코 선발업체로서 인정을 받았다.

내가 하는 업무는 국제 유가가 높아야 일거리가 많은 회사라

아내에게도 승용차 기름값 높다고 불평하지 말라고 언질을 주곤 했다.

 

부천에 대형 아파트를 분양받고 정기적으로 중도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가진 돈이 없으니 늘 여러 개 은행에서 적금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넣어야 했는데

다행하게도 대기업직원이라 신용 대출이 쉬웠고

매달 내야 하는 이자도 급여만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IMF가 터지던 해 대출 이자가 20프로가 넘다보니 그야말로

여기저기 은행에서 몇 배나 뛴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나

마침 그 시기에 멕시코를 비롯한 미주 지역 해외출장이 잦았다.

당시 해외출장시에는 하루 일당과 숙박비를 모두 현금으로 지급했는데

출장가서 저렴한 호텔에 묵고 식사비를 절약하다 보니 한 번 출장다녀올 때마다

급여외에 몇 백만원의 공돈이 생겨 그 돈으로 막대한 이자를 낼 수 있었다.

참으로 고비고비마다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넘치던 시기였다.

 

한국에 IMF가 지나고 2년 뒤 또 한 번 해외건설경기는 바닥을 치고

회사에서 수행하던 대형 프로젝트의 손실이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명퇴 수당 추가 지급을 조건으로 직원의 3분의 1을 감원한다 해서

어차피 임원까지 바라보지 못할 바에야 내가 할 일이 또 있겠지 하고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당시 사표를 던지지 않았던 동료들은

지금도 계약직으로 끝까지 남아 아직도 그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2000년 초 집에서 놀고 있으니 당장 수입이 하나도 없어졌다.

아내가 자영업을 하니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나는

노동청에서 실직자들을 위해 구직활동에 대한 약간의 실업급여를 지급 받았다.

3개월 정도 지나니 어느 날 내게 노동청에서 직장 추천이 들어왔다.

집에서 가까운 송내역 앞에 있는 수출대행 검사업체에서 일했다.

수출 포장을 대행해 주고 검사비를 받는 업체인데

내가 하는 일은 영어로 서류를 작성해 주고

서류에 문제가 있을 시 외국업체와 전화로 대화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 든 사장이 개인 빚이 많은지 일거리는 지속적으로 있고

수금은 제대로 들어 오고 있는데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급여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만은 예외였다.

내가 서류를 작성하지 않으면 기성 수금이 안되니 다른 사람은 급여를 밀려도

나는 꼬박 꼬박 주는 것이 못마땅해 그만두었다.

내가 그만 둔다 하니 나이든 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자기 개인빚까지 떠 안는 조건으로

회사를 인수하라고 제안하기에 금액을 물어보니 터무니없는 금액이라 거절했다.

개인 빚만 없으면 일거리가 지속적으로 있으니 그 회사 인수해서

사장이 될 수 도 있었다. 기회였는지 아니면 기회를 놓친 것인지 모르겠다. 

 

서울로 전철 출근할 때 창밖을 보며 수없이 많은 개인 상가나 사업체를 보면서

왜 내겐 저런기회가 없을까 하고 궁금했었다. 무슨 일이든 찾으면 있을거라 생각했다.

 

검사업체에 근무하면서 거래선에 기성을 신청하기 위해 검사 사진을 칼라로 출력하는데

프린터의 정품 잉크값이 무척 비쌌다. 그러다 어느 날 충전잉크를 쓰니

비용이 많이 절감되는 것을 보고 이게 사업아이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전철타고 늘 지나가다 창밖에 보이는 구로구 중앙유통단지에 들어가 보았다.

어림잡아 몇 천개의 개인 사업체들이 있는데 창문넘어로 보니 모두 개인 프린터를

가지고 있고 그 큰 유통단지에 잉크를 충전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프랜차이즈 업체를 찾아 창업교육을 받고 아주 적은 투자를 해서

지하상가 뒷골목에 3평도 안되는 작은 공간에 잉크충전방을  차렸다.

이런 장사를 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내에게

3개월만 내게 돈달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침마다 일찍 출근해 단지 내 모든 상가에 전단을 뿌리고

어디든 전화는는 곳이면 찾아가 직접 충전된 잉크로 테스트 해 보이며

신뢰감을 주었더니 입소문을 타고 차츰 차츰 고객이 늘었다.

 

고객카드가 늘고 3개월 정도 지나니 수입이 플러스로 시작되었다.

나날이 기록하는 영업대장에 하루 매출액이 늘고 순익이 늘었다.

장사를 하면서 굳이 지인들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

몇 개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일부러 나를 불러 자신의 회사에서

사용하는 제품을 모두 내가 공급하라고 도와주셨다.

그 프랜차이즈에 속하는 전국 대리점 중에 내 실적이 제일 좋았다.

때론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고 창업 스쿨에 나가 경험담을 소개하며

강사역할도 했다.

 

세월이 금방 흘렀다.

장사가 잘 되어 1년만에 가게를 확장하고 목이 좋은 곳으로 이전을 했다.

가게에 책과 커피 그리고 음악이 있으니 굳이 물건을 사러

오지 않더라도 나와 세상 얘기를 하며 친분을 나누기 위해

일부러 찾아 오는 손님들도 많아졌다.

그 손님들 중에는 외국과 무역을 하지만 영어를 못해 내게

정기적으로 영어 번역을 의뢰하고 때론 찾아 온 바이어를 대신 만나

통역을 해주는 유료 서비스를 해 주었다. 

 

3년째 되던 해는 순수익이 대기업 부장 급여가 부럽지 않았다.

매출 1억원이 되면 퇴근할 때 케익을 하나 사서 1억 매출 달성이라고

쓰고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고 2억원 달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업은 편했다. 고정고객이 많아지니 월 수입은 약간의 변동이 있더라도

꾸준히 지속되니 내 사업에 잘되는 것을 보고 인근에 경쟁업체들이 생겨났다.

수요는 정해져 있는데 공급처가 많아지다 보니 파이가 줄고

5년 정도 지나니 매출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고정고객이 많아 충분히 버틸 수는 있었다.

 

6년 정도 지났는데 매출은 많이 떨어지는게 늘 맘을 졸이던 어느 날

국내 건설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가 임원이 되고 요즘 다시 플랜트 건설경기가

좋아져서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경력많은 나보고 입사해서 같이 일하자고

하기에 얼씨구나 하고 내가 하던 사업을 당시 놀고 있던 형님에게 인계하고

강남에 있는 S엔지니어링에서 7년만에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국내 최고 기업에서 급여도 최고의 대우를 받다 보니

갑자기 생활이 윤택해지고 사람사는 것처럼 살게 되었다.

이전에 다른 대기업에서 내가 하던 같은 업무라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국내 최고 회사라 그런지 직원들의 수준이 다른 곳과 비교해 많이 높았다.

 

전세계 많은 곳으로 출장을 다녔다.

늘 비행기를 10시간 이상타고 다니는 장거리 국가에 영업하러 다니다 보니

회사 규정상 비지니스클라스를 이용하는 대우를 받았다.

호주로 멕시코로, 아프리카로,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중동으로 출장을 다녔다.

여름에도 겨울 양복이 상시 필요했고 겨울에도 여름양복을 챙겨야 했다.

회사의 규모는 나날이 커갔다.

내가 들어가던 해 약 2000명이던 직원은 불과 2년만에 4천명으로 늘어났고

내가 S건설을 나오던 2000년도에 우리나라 전체 해외 건설업체들의 1년 수주액이

불과 30억불에 불과했는데 이젠 프로젝트 하나가 30억불이 넘는 것이 보통이 되어버렸다.

해외 건설경기는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회사의 매출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당시 대기업 정년이 55세였는데 내가 55세가 되었을 때

한 사람이라도 전문직이 필요하니 회사오 계약직으로 변환하여

근무를 지속할 수 있었다.

정직으로 근무를 마친 날 야근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가족이 나를 위해 멋진 정년퇴임 서프라이즈 파티를 만들어 주었다.

 

대개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던 대학친구들은 이미 그 나이에 대개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놀아야만 하던 시절이었기에 동창회 모임을 나가면 나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기본 급여외에 1년에 2번 성과급이 나오고 해가 바뀌면 이익분배금이 지급되었다.

년말에서 년초까지 받는 통장에 입금되는 급여가 한 해 받는 급여의 절반 정도로 많았다.

일이 너무 많으니 직원들 휴가가는 대신에 돈으로 주겠다고 향후 4년치 휴가비를

선불로 주기도 했다. 각종 절기마다 상품권을 비롯한 혜택이 주어지고

그룹의 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좋은 선물이 주어지곤 했다.

자녀들의 대학학자금을 모두 지급해 주어 내 아들과 딸이 대학다니는 동안

학비를 모두 회사에서 지급받았다. 정말 이 학비 보조는 내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들이 대학 1학년 때 개인사업하며 몫돈이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도 미리 갚아 버렸다.

 

그보다 더 큰 감사는 생애 주기 신체검사였는데 나이 55세 되던 해

비용이 많이 드는 전신암검사가 포함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그만 내 몸에

암이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을 받는 놀라운 기적도 있었다.

덕분에 회사에서 주는 장려금과 내가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까지 혜택을 받았다. 

정년 후 2년이 되었을 때는 내가 직장생활 시작한 이래 최대의 급여를 받았다.

신차를 구입할 때 전액 현금으로 지급해도 될 정도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입사 후 6년정도 되니 직원이 8000명이 넘어 서고

강남에 있는 빌딩으로는 불어나는 직원들 수용이 안되어

상일동에 전 직원이 일 할 수 있는 최고급의 대형 사옥을 짓고 입주를 했다.

그룹내 C 등급에 분류되었던 회사가 S전자에 버금가는 A 등급에 올라서고

내가 입사하던 해 그 회사의 주식이 약 3만원 정도 하다가

한 때 28만원까지 도달한 적이 있었다.

경영진은 그 때도 주가가 더 올라갈 것이라며 자사 주식 매입을 권유했다.

 

대개 건설회사가 자기 사옥을 새로 지으면 망한다는 저주가 있는데

그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을까?

내 직장생활을 회고해 보니 거의 모두 그런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다.

첫 직장도 여의도에 새 사옥을 짓고 파산했으며

두번째 직장도 서소문에 새 사옥을 짓고 2세가 경영하다가 파산했고

3번째 직장도 마포에 새 사옥을 지었다가 그룹내 유사 업종 계열 회사와 합병되었으며

4번째 직장은 새 사옥이지만 사옥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남의 회사

사옥을 지었는데 그 회사가 망해 어쩔 수 없이 공사대금 대신으로

받은 건물을 사옥으로 사용했기에 저주를 피해갔다.

그런데 S엔지니어링도 그 저주의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가 새 사옥으로 입주한 뒤 회사의 경영이 급격히 나빠졌다.

수행 중인 많은 해외프로젝트들이 문제가 생겨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7년째 되던 해 나같이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직원들의 계약 연장이

거의 승인되지 않았다.

내가 알제리에 신규 프로젝트를 수주했는데도 

정규직원이 남아 도니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다. 

회사 주식은 나날이 떨어졌다.

내가 나오기 전 해 부터 모든 보너스가 취소되었고

그룹에서 전 직원에게 주는 특별 상여금도 그 회사만은 제외되었다.  

급기야는 그 회사에 입사해 사장까지 진급했던 입지전적인 사람이 교체되고,

경영진은 외부에서 온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그 회사는 경영악화로 줏가가 거의 만원 수준정도에 불과하고

얼마 전에는 누적된 적자로 자본잠식까지 이르러 주식 매매거래가 중지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회사는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직원들에게 주식 매입을 강요하여

모든 직원은 근속년수와 직급에 따라  

작게는 몇 천만원에서 많게는 몇 억에 가까운 막대한 금액을 자사 주식을 매입해야만 했다.

멋들어진 사옥은 이미 매각절차에 들어갔고 이젠 직원들 한 달 무급휴가까지

시행하고 있다.

 

그런 최악의 환경이 되기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어야만 했지만

딸이 유학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에 직장생활을 더 해야 할 것 같아

가망은 없지만 다른 기업으로 이직한 직장 동료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평소 하고 싶었던 제주도 올레길 트레킹을 홀로 하고 있는데

이력서를 제출한 회사에서 가능한 빨리 출근하라고 연락이 왔다.

이런 기적이 있나..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국내 10위권의 대기업 건설회사인 H건설에 다시 입사했다.

약간 체계가 먼저 회사보다 허술하고 규모가 적기는 했지만 하는 업무는 같았고

S 엔지니어링과 기본 급여 수준은 비슷했다. 단지 추가로 받은 금액이 거의 없을 뿐.

만약 S엔지니어를 다녔어도 회사가 경영이 안 좋으니 비슷한 급여수준이었을 것이다.

내겐 감지덕지였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국내 대기업은 다 섭렵한다고 놀려댔다.

 

이 회사는 조직적으로 일하는 체계가 미흡하여 내 업무에 경영진의 심한 질책이나

복잡한 절차같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내가 결정해서 진행하면 그 뿐이었다.

프로젝트를 입찰하고 수주하기 위해 진행하는 절차들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정말 반가운 것은 내가 처음 나갔던 해외를 이 회사에 와서

다시 출장 차 자주 나가게 되었다.

총각시절 해외근무시 다녔던 사우디의 담맘, 알코바 지역을 무려 35년만에 다시 찾았다.

 

얼핏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본 알코바 전통 시장과

내가 일과후 테니스를 치던 호텔도 그대로였지만

그 외 도시는 아주 다르게 변해 버렸다.

 

당시 내가 하던 업무가 결실을 보게 되어

계약까지 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리고 내가 1년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 쯤에 계약이 되니

추가로 1년 더 근무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 회사도 해외 프로젝트에서 자꾸 손해를 보니

더 이상 해외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아 부서를 통폐합하고

인원 축소 계획에 따라 내 근무도 2년만에 끝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회사 다니는 덕분에 해외 유학중인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내가 무척 좋아하는 초고층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도 했다.

 

직장생활동안 받은 급여 명세서를 거의 다 보관하고 있다.

그 숫자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참 열심히 직장 생활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1981년도 2월에 여의도의 10층짜리 빌딩에서 첫 직장을 시작하고

2016년도 3월에 여의도의 50층짜리 전경련 빌딩에서 마지막 직장을 접는다

또한

1984년 3월에 처음 해외를 사우디로 나갔으며

2015년 1월에 마지막을 사우디 출장으로 마무리지었다.

1984년 첫번 내렸던 사우디의 담맘공항은

2015년 마지막 출장시 떠난 공항이기도 하다.

 

그간 직장생활동안 약 50여개국을 출장다녔으며

약 100번이 훨씬 넘는 해외출장을 기록했다.

항공사 마일리지로 가족들이 해외 여행도 몇 번을 즐겼고

지금도 곧 떠날 계획인 유럽 개인여행도 항공사 마일리지로 이용할 수 있다.  

 

참 부지런히,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했다.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았으며 직장을 옮길 때 마다

내가 좋아하는 합창단을 조직해 동료들과 같이 노래도 했다.

직장생활동안 남들이 꿈의 직장이라 하는 대기업만 근무하는 행운도 있었고

그 조직안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던 가슴 벅찬 시간과

그로 인해 남부럽지 않은 사회생활을 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여호화 이레 하나님의 큰 은혜였고

내 스스로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실과 근면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늘 원만하게 이루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진정 이 놀라운 축복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과 같이 하고 싶다.


인도네시아 발리섬

 

 


태국

 

로마


 

멕시코 투우

 

콜롬비아 소금 성당


콜롬비아 개인 주택 방문

 

 

 

멕시코 가리발디 광장

 

아프리카 가나


 

 

아프리카 가나


 

 

멕시코 소깔로 대성당

 

미국 휴스턴 NASA

 

 

멕시코 피라밋

 

 

멕시코

 

 

로마

 

콜롬비아 까르타헤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 > 살며..감사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버 세상  (0) 2016.09.02
2016년 여름 호스피스 봉사  (0) 2016.08.12
수인선열차에 대한 추억  (0) 2016.02.18
남은 삶의 다짐  (0) 2016.02.12
와인 친구들과의 포트럭 파티  (0) 2015.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