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76) 방랑자

carmina 2016. 7. 26. 11:00



방랑자 (박인희 노래, 원곡 Vagabundo, 니콜라 디 바리 노래)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에 우리 다시 만나리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에 우리 다시 만나리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


매일 새벽 6시 전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모두가 한 방에서 잠을 자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스마트폰으로 알람을 해 놓을 수는 없었다.

산티아고 까미노의 아침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냥 6시 정도면 일어나 조심 조심 소리 안나게 짐을 챙기며

면도도 안하고 양치질과 고양이 세수만으로 단장을 하고

거의 매일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먼저 숙소의 잠근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먼동트는 시간에 벌판을 걷기 시작하면 내 벗은 오로지 내 그림자뿐이다.

오직 한 길,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걷는 꼬박 800km를 걷는 긴 한 달의 여정.

이제껏 살면서 그렇게 긴 내 그림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상황하에서 박인희가 불렀던 이 노래는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1시간 이상을 걸어야 겨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고독한 시간까지

내 벗은 그저 내 긴 그림자뿐이다.

내게 말을 거는 것은 길가 나무와 숲속에서 우짖는 새들 뿐이지만

그 들은 내게 자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새벽 길을 걷다가 가끔 뒤를 돌아 보면 까마득히 먼 곳에서 

붉은 여명이 하늘의 검은 구름을 밀고 올라오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면

내 앞의 긴 그림자는 천국같이 보이는 천국같은 마을을 항해 길게 눕기도 하고

내 발걸음에 맞추어 어깨춤을 추고 있다.

그 그림자는 밀밭위에 빠지기도 하고 이제 막 잎을 피기 시작하는

낮은 포도밭의 가지위에서 앞으로 가을에 생산될 템프라니요 품종의

와인을 상상하며 코를 박고 와인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흙냄새를 미리 즐기고 있다.


해가 중천에 떠 오른 시간에는 늘 걸음을 멈추고 숙소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고

하루의 여행자 노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 그림자도 나처럼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방랑자였다.

10kg 정도의 배낭 하나 둘러 메고 오로지 한 곳을 향해서만 걸었다.

배낭안에는 갈아 입을 옷 한 벌이 전부였고 그 외 비상시에 대처할

여러 물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생각해 보니 집의 옷장에 가득한 옷들은 모두 세상살면서 부질없는 사치다.

그렇게 가진 옷 두 벌만으로도 몇 달을 살 수 있었다.

몇 달을 사는데 몇년인들 못살랴.

비가 매일 내리다가 어쩌다 햇빛이 잠시 나면 빨래를 꺼내어

배낭에 양말과 팬티를 주렁 주렁 매달아 말려야만 했다.


빵 하나 커피 한 잔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영양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끔 오렌지 하나 사서 먹는 것이 전부였다.

거의 두달을 여행하는 동안 쌀밥을 먹지 못했다 했더니 모두들 그럴 수가 있느냐 하지만

나는 해외에 나가면 밥보다 늘 현지 음식이 더 좋았다.

 

걷는 동안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1000년전 부터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의 방식을 따르고 싶어서

그렇게 일부러 고생을 사서 했다.


저녁이면 전세계에서 모인 그런 방랑자들끼리 모여서 숙소에 기타가 있으면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젊은 시절 부터 싱어롱을 다니며 전 세계의 포크송을 배운 나는

그 들이 부르는 오래된 노래들을 알고 있었고 그 자리를 리드할 수 있었다.

같이 팝송을 부르기도 하고 방랑자들의 국적에 맞는 국가의 포크송을 같이 불렀다.

그런데 대개 그 노래들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노래였다.

아니로리, Amazing Grace, 여행자의 노래 (발데리 발데라), 이태리 노래들

멕시코 노래 Cielito Lindo, 엘비스 프레슬리와 존덴버의 노래들,

그 들은 모두 그 시간을 좋아했다. 매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지만

우리들은 모두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길을 걷는 동지애를 느끼며 

하루의 고단함을 와인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풀었다.


같이 땀 흘리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그 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우리에겐 오로지 추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가끔 어쩌다 메일 주소를 주고 받은 사람들끼리 메일이 오고

서로 언젠가는 다시 그 길에서 만나자며 공허한 약속을 하지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내 소원 하나를 이루었다고 좋아하며 지웠던 버킷 리스트 중 이 항목을

아무래도 다시 슬며시 추가해 놓아야겠다.


지나고 생각하면 그 길은 정말 고생과 눈물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그 길을 만나기 전보다 자꾸 더 그립고

언젠가는 방랑자들을 만나러 그 길을 다시 가야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