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8코스 (덕산 - 운리)

carmina 2011. 8. 4. 22:10

 

2011년 8월 1일

 

덕산에서 맛있는 점심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마금단으로 가라는 이정표를 따라 가는데 다시 빗방울이 떨어진다.

 

배낭에 방수포를 씌우고 우산으로 재무장.

 

그 마을길에도 여전히 감나무는 가득하고 감이 손만 닿으면 딸 수 있을 정도이다. 가을이면 얼마나 이 길이 아름다울까?

 

도로 옆에 있는 남명 조식선생의 기념관과 선비들이 모여서 공부했다는 산천재.

조식선생 기념관은 월요일이라 휴관하고 산천재는 오래된 고택과 역사 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매화나무

그리고 은행나무 몇 그루와 길가의 이끼들 그리고 넓은 잔디밭이 전부라 그냥 지나쳤다.

 

마금단으로 올라가는 길에 돌담 주위에 핀 꽃들과 검은 돌들을 휘감은 넝쿨의 자연미가 좋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 지고 오른 쪽 계곡물은 점점 물살이 덩치가 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나무 밭..

 

이 도로는 확장공사중인지 공터에 작업현장 사무실이 있는데 그 안에서는 아주 시끄러운 노래방 기계를 사용하여

마이크로 노래하는 소리가 울려 나온다.

얼핏 보니 사무실 안에 노래방의 싸이키 조명도 돌아가고 있어 대낮인데도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마 비가 많이 오니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쉬면서 한 낮을 휴게실에서 즐기고 있는 듯 하다.

 

그런 반면 어느 곳에서는 넓은 공간에 잘 지어진 저택이 있고 그 마당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거대한 수석작품들이 놓여져 있어

그 곳에서 등산용 스틱을 꺼내느라 잠시 멈추어 있는데도 집을 지키는 큰 개의 거센 외침이 나보고 관심갖지 말고 그냥 지나치라며 주의를 준다.   

 

세멘트 길이라 편할 줄 알았던 비탈길이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걷기에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어떤 곳은 도무지 물 웅덩이를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물에 담그어야 했다.

 

다시 땀과 비가 범벅이 되어 버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구불길. 가끔 자동차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아무도 힘들게 터벅 터벅 길을 걷는 나를 보고 차에 타라고 권유하는 이는 없다. 

내가 타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나?

 

이미 신발 젖고 양말 젖은 것은 포기한지 오래.

바지도 젖고 우산을 썻는데도 셔츠도 젖고 있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어느 계곡에서는 캠핑 준비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도 있다.

 

이제 그만 올라 갈 때도 된 것 같은데 구불 구불 언덕길은 끝이 없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몇 개를 지나는지도 모르겠다.

 

비탈길을 올라가면서도 수시로 옆에 산 언덕에 눈길을 주며 걸어야 하는건

이번 비에 전국적으로 유난히 피해가 많은 부분이 무너지는 토사이고

이 곳도 이미 산사태를 한번 겪은 흔적이 여기 저기 보이기에  더욱 조심하고 있다.

 

그래서 마금단으로 올라가는 고비길을 걸을 때마다 만약의 경우 대피할 장소까지 매번 눈여겨 보며 걷는다.

 

어떤 곳은 너무 빗물이 많아 등산화를 벗을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미 젖은 신발이라 완전히 자포자기다.

아무래도 이런 상태라면 내일 등산은 포기해야 한다.

 

젖은 신발을 신고 아침부터 새로운 길을 걷기는 너무 힘들 것 같다.

 

마금단까지 올라가면 거리 상으로는 8코스의 약 반 정도는 걸은 셈일것이다. 

마금단부터는 백운계곡을 지나가게 되어 있는데 혹시 계곡물에 불어 가지 못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워낙 비가 많이 오니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든다.

 

위태 덕산 구간에서는 그래도 맞은 편에서 오는 둘레꾼이 몇 명 보였는데

이 곳에서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이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저쪽 백운계곡 쪽에서 마금단까지 올라오는 길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걱정을 하며 약 한시간 반 정도 올라가는데 그 높은 곳에 마금단 펜션이 있다.

나그네가 힘들다고 좀체로 펜션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데 앉을 곳도, 비피할 곳도 없어  펜션으로 들어갔더니

어떤 가족이 펜션 옆의 비를 피할 수 있는 마당의 탁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그 사람들 앉아 있는 의자의 끝을 가리키며 잠시 앉았다 갈 수 있는지 물어보니

나보고 어떻게 이곳까지 걸어왔느냐며 자리를 내주고 서둘러 물 한 잔을 가져다 준다.

 

혹시 점심을 안 먹었으면 자기들과 같이 먹자고 권하고 술도 한 잔 하라며 권하지만 모두 사양하고 물만 더 달라 하니

따뜻한 녹차 한 잔과 떡을 준비해 준다

 

낯선 이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 주는 이들이 고맙기만 한데 내 배낭에는 아무것도 보답해 줄 것이 없다.

그냥 고맙다는 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신한다.

 

이 곳 지리를 잘 알고 있다 하기에 내려 가는 길을 물었더니

백운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시간상이나 비오는 환경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해 준다.

 

그렇게 힘든 결정을 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내 핸폰이 울린다.

민박집 주인 아저씨. 반가움에 내 사정을 얘기했더니 오늘 걷기를 그만하고 자기 집에 와서 하룻밤 더 쉬면서 내일을 기다려 보잔다.

 

그러마 하고 대답했지만 차로 이 곳까지 올라오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텐데 나보고 무조건 이 자리에서 기다리라며

펜션의 아저씨에게 길을 묻더니 한 참 뒤에 차를 가지고 가파른 길을 올라왔다.

 

솔직히 내가 걸어 올라온 길을 보건데 차가 다니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 와 준 민박집 주인이 고맙다.

 

힘들게 올라온 길을 순식간에 내려오니 비는 거의 그치고 어제 저녁에 같이 식사한 60대 부부와

오늘 아침에 도착한 가족 3명이 위태에서 덕산까지 걸어와서 합류했다.

 

60대 부부는 오늘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들어가 온천을 간다 하고

고등학생 남자애 한 명이 있는 새로 온 가족 3명은 내가 올라간 길을 올라가겠다 한다.

 

혹시라도 몰라 그 가족에게 스마트폰으로 이 곳의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우리 일행은 산천재를 한 번 둘러보고 저녁 먹거리인 삼겹살을 사기 위해 어디론가 한 참 차를 타고 달려 가는데

그 사이 가늘었던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차가 운행이 힘들 정도로 거세어 진다. 

 

도로에 물이 가득 고여 다른 차들이 옆으로 지나갈 때도 위험해 보이고 차량의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올려도 전방 시야가 불편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산으로 올라간 가족은 어떨까..무척 궁금해 진다.

 

민박집에 도착하니 방을 따뜻하게 해 놓았다. 비에 젖은 몸을 시원한 물로 샤워하고 등산화에 신문을 구겨 넣었더니

주인아저씨가 신발을 모두 말려야 한다며 어디론가 가지고 간다.

주인은 저녁 준비에 바쁘고 천천히 정원을 산책하며 시골풍경을 즐기고 있을 동안에 산에 올라갔던 가족이 비에 푹 젖은 모습으로 들어온다.

 

내가 몇 시간 전 저런 모습으로 산에서 내려왔겠지?

 

저녁에 모두 모여 같이 밥상을 차려 고기를 굽고 맛있는 시골 반찬으로 지리산 깊은 산골의 낭만을 즐긴다.  

 

스마트폰으로 내일 날씨를 알아보니 다른 지역은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곳은 구름만 끼는 것으로 보여진다.

제발 일기예보가 맞기를...

내일은 비가 오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은 피곤해서인지 식사 후 방에 들어가자 마자 꿈나라로 빠져 버렸다.

날씨가 흐려 도심지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지리산의 무수히 많은 밤 별을 보지 못함이 심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