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9코스 (위태 - 덕산)

carmina 2011. 8. 4. 22:03

 

2011년 8월 1일

 

지리산 입산금지.

 

올해 유난히 비가 많이 오고 피해가 심하니 지난 주 중부지방에 내린 폭우로 대규모의 인명 및 재산 손실을 전한 매스콤은

이번엔 남부지방에 집중 폭우 특집방송을 시시각각 쏟아내며 특히 지리산을 언급하고 있다.

 

지난 주 설악산 갔을 때는 폭우로 설악산이 입산금지였는데 이번 주 내가 지리산에 오니 이번엔 지리산이 입산금지란다.

 

올해는 비를 몰고 다니는건지 비가 나를 따라 다니는건지 아리송한 나그네가 되었다.

 

2009년도에 지리산 북단 1,2,3코스를 돌고, 2010년에 4, 5 코스를 완주한 이래 

둘레길 남단 연장코스가 올해 5월에 개통되었다 해서 지난 몇 개월간 얼마나 걷고 싶었던지

늘 먼저 걸어 본 사람들의 기행문과 사진을 보며 북마크를 해 놓았다.

 

지리산둘레길을 처음 걸어 본 후 걷는 재미에 끌려 북한산, 시흥늠내길, 강화 나들기, 강원도 바우길, 영덕 블루로드 등

여기 저기 다니며 길을 밟는다.

 

산을 오를 때 보다 더 성취감이 있고 갈 때마다 또 다른 코스를 걸을 수 있다는 기쁨은

이제 나도 서서히 걷기 매니아 단계로 들어서는 것 같다.

 

여름 휴가를 일부러 주일을 끼고 일주일을 신청했다. 지난 직장생활 30년간 여름휴가를 일주일 써 본적이 없는데...

올핸 이상하게 객기를 부리고 싶었다. 

 

휴가의 반인 수목금토는 아내와 강원도에서 지내고 나머지 휴가는 나를 위해서 쓰기로 하고...

 

비가 오는 주일 예배 후 차 안에서 예약해 놓은 진주행 버스를 타느라 서둘러 등산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남부터미날 행 전철을 타고 보니...

이런 웃도리를 뒤집어 입었네..

 

아무렴 어떠냐..사람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지도 않을걸...

 

원래 계획은 새로 생긴 코스 중 환상적이라 하는 위태-하동호- 삼화실 구간을 꼬박 하루에 돌고 

나머지는 2일차에 삼화실 - 대축 한 구간을 반 나절 걸은 후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을 세워 놓고 보니

많지 않은 지방 버스 편 때문에 첫 날은 무조건 늦더라도 출발지인 위태까지 가서 민박을 해야만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지리산 안내센타에 위태 출발 지역의 민박집을 알아보니

두 집의 번호를 알려 주기에 처음 알려 준 집에 전화했더니 민박집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믿을 만한데 방이 없단다.

이미 2팀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어 내가 잘 방이 없단다.

 

그래도 거실이나 다른 곳이라도 잘 수만 있으면 좋겠다 하니 자신이 잘 황토방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이라도 좋다면 오라한다.

 

버스가 진주에 도착하고 하동가는 버스시간을 보니 약 50분정도 시간여유가 있어 

시외버스 매표소 안내원에게 이 곳에 맛있는 음식을 물어보니 장어구이가 좋다한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니 눈에 뜨이는 장어구이집이 없어

다시 사거리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진주의 유명음식을 물어보니 또 장어를 먹으라며 안내해 준다.

 

그런데 알려준 음식점은 한참 걸어가야 하기에 버스 시간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 동태탕으로 대신하고 버스 타기 전

다시 민박집에 전화하니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린단다. 이건 무슨 뜻?

 

주인아저씨가 나와 잠깐의 대화와 목소리만 듣고 품격있는 사람이 오는 것 같다고 미리 귀뜸을 했단다.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평해 놓으니 갑자기 머쓱해 졌다.

 

옥종행 버스를 타고 약 1시간을 어둠속을 달려 종점에 도착하니 정류장 옆 택시회사 사무실도 비어 있고 택시도 없다.

다시 민박집에 전화했더니 고맙게도 데리러 나온단다.

 

한 15분 후 까만 SUV를 가지고 온 주인아저씨. 첫 모습이 시골 사람이 아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부산에서 중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단다.

 

어둠속을 구비 구비 돌아 어느 산길 포장도로로 가는데 우측에 반가운 둘레길 말뚝 표식이 보인다.

그 깊은 산골에 잘 지어진 별장 하나.

 

이미 거실에서는 두 부부가 앉아 하루의 회포를 막걸리로 풀고 있다.

둘레길 걷기도 전에 이미 둘레꾼들의 정부터 쌓아간다.

 

갓 60대의 부부와, 내 나이또래의 부부는 이미 오늘 한 코스를 돌아 본 사람들이기에

연신 둘레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느라 밤이 깊은 줄 모르는데 이 민박집의 차림이 예사스럽지 않다.

 

내부 인테리어도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보이고, 여기 저기 놓여진 인테리어 소품들이 분명 무언가 다르다.

 

주인 아저씨의 할아버지대부터 여기서 살았고 몇 년전 집에 불이 나서 전소된 후 다시 지었단다.

 

둘레길이 생기면서 부산에서 주말마다 와서 민박하고 요즘은 방학이라 계속 거주하며 민박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렇게 왁자지껄 웃으며 떠들다가 흙냄새와 쑥냄새가 물씬 나는 황토방에 들어가

주인 아저씨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두런 두런 나누다가 잠들었다

 

밤새 개울물 소리인지 빗소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물소리에 잠을 뒤척이다가

새벽녘에는 소리가 커지기에 가만히 들어보니 비가 오는 듯 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주인아저씨가 직접 뒷마당의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로 만든 맛있는 아침을 먹는 동안에 TV는 연신 지리산 입산금지.

이 지역의 경보를 발표하고 있다.

 

식사 후에 제대로 전통식으로 준비하고 끓여주는 녹차를 마시고 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집에서는 오는 전화는 지리산 입산금지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니 떠나지 말아 달란다.

 

하염없이 앞 마당에서 서서 건너편 숲을 보니 새들이 비가 오는데도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가며 놀고 있다.

새들도 비가 오면 날개가 젖는 알면서 저렇게 밖으로 다니는데..난 뭐하는거야...

 

멀리 보이는 산자락들은 모두 회색빛 하늘 아래 먹구름에 쌓여 하늘인지 산인지 구분이 잘 안될 정도이다.

 

오늘 내가 가야 할 9코스를 어제 다녀왔다는 분에게 물어보니 계곡이 몇 군데 있어 비가 많이 오면 갈 수 없을 정도라고 주의를 준다.

 

8시부터 거의 10시까지 잘 다듬어진 정원도 구경하고 텃밭도 돌아보며 혹시라도 비가 그칠까 지켜 보았지만...

 

도무지 길 떠나는 것은 안되겠다 싶어 이대로 강원도로 이동해 바우길이라도 가기로 내심 결정하고

주인아저씨에게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 달라 하니

마침 비 때문에 오늘의 일정을 포기하는 부부를 데려다 주러 나가는 길이니 같이 나가자 한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주인아저씨가 그냥 가기 너무 아쉬우니까 이 근처 대나무 숲이 참 좋은 코스가 있으니 잠깐 보고 가자 하며

차를 숲길로 몰고 들어가면서 위태에서 덕산으로 가는 9 코스는 한 20분간 걸어 갈치재만 넘으면 덕천강을 끼고 걷는 세멘트길이고 

계곡같은게 없으니 비와도 갈 수 있다 한다는 말에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을 하고

즉시 차에서 내려 다른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우비를 꺼내 입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조심 조심 언덕을 올라간다. 눈 앞에 펼쳐지는 대나무 숲.

지난 번 북쪽의 둘레길은 대나무가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이 쪽은 대나무가 많다 한다.

 

그렇게 언덕을 올라가니 우비때문에 덥고 흘러내리는 땀과 얼굴에 부딪히는 비가 범벅이 되어

도무지 걷기에 불편하여 우비를 벗어 던지고 우산을 펼쳤다.

그래도 역시 비 맞는 것은 변함없지만 그래도 답답한 것 보다는 낫다.

 

이른 시간인데 벌써 마주 오는 이가 한 명 보인다. 나처럼 홀로 가는 젊은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가는데 이미 오랜 길을 걸어왔는지 옷차림이 많이 남루하다.

반갑다고 인사하고 어디서 오느냐 물었더니 수철리에서 온단다.

 

수철이라면 5구간의 끝인데 그 곳에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올려면 적어도 6코스 7코스와 8코스의 절반 정도를 하룻만에 걷고 

오늘 아침 일찍 출발한 것 같다.  비가 와서 그런지 그 둘레꾼은 별로 반가운체도 안하고 지나친다.

 

그렇게 땀흘리며 갈치재까지 올라가 선 채로 잠깐 쉬고 대나무가 양옆으로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작은 마을하나가 비를 맞고 있다. 유점마을.

 

이제부터는 중태마을까지는 편한 길이다.

그런데 길보다 더 좋은 것은 길에 손 닿으면 만질 수 있는 밤들과 이제 갖 녹색의 작은 열매를 맺는 감나무들.

밤나무, 감나무가 오죽 많으면 밤 나무 가지가 내 다리 옆에 있고 주렁 주렁 작은 감이 열린 감나무가 내 머리에 닿는다면 다른 이들이 믿을까?

 

이 둘레길 코스는 올 봄에 만들어졌으니 앞으로 가을이 되면 둘레꾼들의 손들이 저 과일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 걱정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코스엔 유난히 길을 내어 준 주민들에게 감사하고 둘레꾼들은 농작물에 손대지 말아달라는 안내표시판이 많이 보인다.   

 

빗줄기는 더 거세어 지고, 길 옆의 개울물의 물소리는 더 커지고 산들은 모두 뿌연 털모자를 쓰고 있다.

 

평지로 그래도 신발이 빗물에 잠길 우려는 없지만 땅을 부딪히며 흩어진 빗방울들이 조금씩 등산화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느낀다.

 

길 옆의 펜션에 묵은 피서객들도 비를 피해 안에서 쉬고 있고, 즐거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고..

 

월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안내표시가 걸려 있는 경로당은 노인들의 기척도 보이지 않고 그 옆의 정자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뿌연 흙탕물이 흘러가는 끝없는 덕천강 길.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 듯 빗방울이 잦아졌다.

멀리 산위의 구름도 회색빛에서 하얀색으로 변하고.. 비 때문에 신경쓰지 못한 논의 녹색빛깔도 상쾌함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젠 좀 멎을려나.  

가늘어진 빗방울을 일부러 맞으며 마을 길로 들어서니 산청 곶감을 생산하는 커다란 공장도 문을 모두 굳게 닫고 적막이 흐른다.

길가 주택의 벽화에도 고종황제에 진상하던 곶감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 길에 잘 지어진 별장하나. 콩코드 비행기의 모형을 앞마당과 뒷마당에 세워 놓은 걸 보니 이쪽 분야 업무와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덕천강을 가로 지르는 천평교 다리를 지나니 오른 쪽 정자에 할아버지들이 화투를 즐기고 있다. 

길 건너편에 경로당이 있는데도 월요일이라 정자에서 모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원칙을 세우기 위해 불편한 것도 감수해야 하는 우리네 사고방식.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할아버지들 옆에 가고 싶어 잠시 앉았다 가도 되느냐며 양해를 구했더니 이 곳은 아무나 쉬는 곳이라며 걱정하지 말라한다.

 

정자 입구에 벗어져 있는 신발들. 모두 고무신이다. 비가 와서 고무신을 신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고무신만 신는지는 모르겠다.

 

그 앞을 이제 막 하교하는 듯한 중학생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오른 쪽에 덕산마을. 안내에는 약 10키로를 4시간에 걷는다 했는데 3시간만에 도착했다.

대개 모든 코스에서 둘레길 안내에 적혀 있는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는 일찍 도착하는 것 같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이 곳에 점심 맛있게 하는 곳을 물으니 조금 더 가서 보현갈비로 가라 한다.

 

소문난 집인지 식당안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떡갈비 정식을 시켰는데 밑반찬이 상에 가득 놓여진다.

비록 반찬 양은 적지만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은 가득하다.

 

이 곳을 오지 않고 그대로 지리산을 떠났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음에 이어지는 덕산 - 운리코스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운리의 민박집을 알아보기 위해

둘레길 안내센타에 전화해 보니 인원, 산청, 하동안내센타 등 모두 월요일이라 휴일.

 

이 코스를 원래 올려고 하지 않았기에 코스 도상 연습도 해 놓지 못했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대충 코스만 확인하고 이정표를 따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