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매동 - 금계간)

carmina 2009. 9. 5. 11:36

3일차 (매동마을 금계마을)

 

지난 밤 그렇게 비가 퍼부어 걱정을 했는데 새벽이 귀를

기울여 보니 비가 그친 것 같다. 눈뜨자 마다 창문을 열었다.

땅은 젖어 있지만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아침에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얼린 물 한병과

주먹밥을 하나 싸 주셨다. 아무래도 오늘 산행이 힘들 것 같아

물 좀 받아가자 했더니 오미자차를 담아준다. 감사합니다.

 

지난 밤에 투숙한 손님도 금계로 간다하니 같이 가란다.

둘이 길을 나섰다. 어제 내려왔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 언덕에 밤과 감과 호두가 열려 있다.

 

자 이제부터 등구재 산행 시작. 5.3 키로. 만만치 않은 거리다.

 

어제 내린 비로 흙은 젖어 있지만 오히려 코를 통해 들어오는

물냄새가 시원하고 좋다.

 

우선 한 고비 넘어 가지고 온 주먹밥을 앉아 먹는데 우리

민박집에서 묵은 뒤 바로 뒤를 이어 따라온 젊은이가 동행한다.

 



등구재 가는 길은 처음에는 주로 8부능선을 따라 걷기에

이렇게 완만하게 산을 오르는 구나 하고 좋아했다.

 

숲길 언덕을 지나는데 갑자기 앞에서 무언가 폴짝 뛴다.

두꺼비 한마리. 누런 마른 풀잎색깔에 잘 어울리는 보호색을

가졌다. 우리가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도망가는 기색이 없다.

 

어느 정도 갔던가. 이 산중에 길섶갤러리가 있으니 와 보라고

유혹하는 이정표. 갈까 말까 망설임. 그 이정표로부터 15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단다. 세 명이 망설이다 나는

갤러리로 향하고 나머지는 앞으로 진행했다.



 

지난 밤의 비로 인해 젖은 풀잎들을 헤치며 한참을 가니 조금 후

내리막길. 아이고 이 길을 다시 올라올려면 힘 좀 들겠구만.

 

더 내려가야할지 망설일 즈음. 둥근 집 하나.

그런데 놀라움 하나. 이 곳까지 차가 올라와 있다.

털보 아저씨가 마중한다. 지난 밤에 영화를 보았노라고 중얼거리며..

알고보니 이 곳은 민박도 한다. 지난 밤에 투숙객들과 영화를

보았다는 이야기고.

 

오로지 지리산만을 찍는 사진사, 강병규씨, 4년전에 이 곳에

들어왔단다.  사진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사진에 들인

정성이 보인다. 수없이 많은 시간과 기회를 기다리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작품들. 

 



지리산의 4계를 찍어 놓은 사진만을 보아도 이미 지리산에

대해서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풍경들을

찍어 전시하고 있다. 

 

작품들을 보고 있으니 방에 들어와 차 한 잔 하자며 권한다.

대만에서 건너왔다는 찻잎을 전통 다례대로 찻잔을 데우고,

조금씩 잔에 부어 마신다.



 

내가 좋아하는 한비야가 새로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며 돈을 벌기보다는

비록 돈벌이는 잘 안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강작가는 그렇게 사는 것 같다.

비록 이 곳에서 살며 작품을 만들고, 가끔 판매도 하고

이렇게 민박하며 사는 것이 생활을 넉넉하게 하지는 못해도

진정 좋아하는 사진을 찍고, 오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사는 것이 부럽기만 하다.

 

모두들 나도 그렇게 살 사람이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함은 아직도 세상의 부담이 너무 커서인가?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살지 못할 사람인가?

 

차를 마시며 한 참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제 매동마을에서

같이 투숙했던 이들이 갤러리로 몰려온다. 갤러리 관람 후

그들과 그리고 어제 이 곳에서 투숙한 젊은이들과

같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반은 우리가 걸어 온 길로

가고 반은 나와 같은 길을 갔다.

 

이렇게 높은 곳인데도 물이 흐른다. 지난 밤 빗물도 있겠지만

지금부터 눈 앞에 펼쳐지는 다랑이 논은 흔히 볼 수 없는

우리네 특이한 농업문화가 있는 곳이다.



 

땅이 좁으니, 계속 산으로 올라가며, 땅을 개간하고 일구어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에서 우리네 민족의 성실함을 찾을 수 있다.

 

이젠 다행히도 다랭이논이 있는 곳까지 세멘트포장을 해 놓아

여러가지로 편했겠지만 오래 전엔 어땠을까?

 

기록을 보니 2~30년전만 해도 내가 오늘 점심을 먹던 일원이

제일 큰 장이 서는 곳이라, 금계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중간에 있는

마을 사람들과, 매동마을 사람들까지 장이 서는 날

일원으로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다녔다 한다.

 

그 때야 지금보다 길 사정이 안좋아 다니기가 더 힘들었을텐데

그 모든 고생을 통해 2세들을 가르치고 현재 우리의 모습을 만든

어른들의 강인함에 고개숙여진다.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다랭이 논, 멀리 보이는 지리산 천황봉.

어제 그렇게 흐리던 날이 오늘은 햇빛으로 가득하다.

 

잠시 평탄하던 길이 어느 순간부터 급경사를 탄다.

산꼭대기에 돌담을 쌓고 그 위에 논을 만들었다.

이런 돌담을 쌓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논 옆에 지리산의 장대함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모습을 보면 모든 고생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적당한 나무그늘 밑의 시원한 바람이 세상 시름을

잃게 한다.

 

잠시 휴식후 또 한 번 거친 고갯길을 오르니 각종 음료수를

무인 판매하는 곳이 있다. 각종 음료, 라면, 상품등

모든 메뉴에 가격이 붙어 있고 손님이 알아서 대금을 투입할 수

있는 있는 상자를 만들어 놓았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믿어도 된다 하는 자신감인가?

 

힘들게 힘들게 등구재를 올랐다. 여기 등구재까지가 전라북도 산내면이고

등구재를 넘어서면 경남 함양시 마쳔면이다. 일부러 지역감정을 나타내기

싫었는지 그런 말은 써 있지 않다.

 

등구재 설명에는

 

거북등을 닮아 이름붙여진 등구재

서쪽 지리산 만복대에 노을이 깔릴 때

동쪽 범화산 마루엔 달이 떠올라

노을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개다

경남 창원마을과 전북 상황마을의 경계가 되고

인월장 보러 가던 길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이다.

지금은 이 곳을 찾는 이가 드물지만

되살아난 고갯길이  마을과 마을,

그리고 사람을 이어줄 것이다.

 

맞다.

이 곳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전혀 다른 곳에서 모인 이들이 같이 힘을 모아 손을 잡고

길을 넘고, 그 들이 발자국이 지역에 관계없이 이어진다.

 

등구재를 넘으니 급격한 하산길.

이 곳으로 올라오는 것도 쉽지 않은 등산 길이다.

아가씨 한 명, 그리고 엄마와 아들이 힘들여 올라오고 있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남지 않았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나는 물집잡혀

아픈 발을 조심스레 내딛으며 하산한다.

 

어느 덧 같이 떠났던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내려가니 창원마을이 나타나지만 인적은 없다.

 

빨리 금계까지 가야 집으로 가는 버스편을 탈 수 있을 것 같아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이정표는 다시 산길로 가라 한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는데 또 산으로 가라고?

지도상의 고도로는 그냥 한없이 내려가면 금계가 될터인데

이정표는 자꾸 나를 산으로 이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자꾸 올라갈까?

이게 아닌 것 같은데 갈림길이 나와도 표식이 없다.

한 참을 올라가다가 도무지 아닌 것 같아 책자에 있는

창원마을에 전화를 해 내가 길을 잘 못들었음을 확인했다.

 

다시 언덕을 내려가 갈림길에 보니 숲속에 있는 검은 이정표.

내가 저걸 놓쳤구나.

이정표는 계속 산길로 이어진다.

힘들어 죽겠네. 누군가 수확해 놓았지만 가져가지 않아

푹 썩어버린 호박 3개처럼 내 몸도 푹 퍼져버려 길가에 누워버린다.

 



수수가 익어간다. 참새를 쫓기 위해 만든 허수아비가 새로운

유행의 옷을 해 입었다.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릴 수 있고

햇빛을 받으면 반짝일 수 있는 셀룰로이즈로 만들어 놓았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참 기막힌 생각이다.

 



길을 가는데 무언가 화들짝 놀라며 내 앞의 고랑을 통해

쏜살같이 지나간다. 30센티 정도의 작은 녹색의 실뱀 하나.

내가 놀라게 했나?

카메라를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실뱀한 마리 눈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느 계곡을 들어가는데 검은 바위가 가득하다

이게 뭐지?  가만히 돌을 보니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이 화산암이다.

얼마나 용암의 온도가 높으면 이렇게 바위를 완전히 까맣게

태워 버렸을까?  바위를 깨 부수면 그 안에까지 새까말까? 궁금하다.



 

내려가는 길은 쉽지만 이미 내 발은 한계치를 넘었다.

발 하나 디딜때마다 발이 아프다.

뒷발바닥에 물집을 터트렸는데 또 물집이 잡혔는지

앞꿈치로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도 새끼 발가락에 잡힌

물집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는 일이잖아.

 

기어서 가더라도 난 갈 수 있어.

 

멀리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금계마을이 보인다.

 

아까부터 보이던 이정표 하나. 나마스테 카페.

나마스테. 인도 여행을 하고 싶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인도여행기를 읽었는지 나마스테의 뜻을 안다.

내 안의 영혼이 당신의 영혼을 사랑합니다.

네팔 사람들에겐 안녕하세요 라는 말로 통한다.



 

나마스테 카페를 들어서며 나마스테라고 인사했다.

 

내 안의 있는 영혼이 지리산의 영혼을 사랑한다고..

지리산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카페에 앉으니 멀리 맑은 하늘에 오로지 천황봉 위에만

구름이 걸렸다.  저 곳에 내 생전 갈 수 있으려나..

그런 날이 있을까?  꿈꾸면 이루어질까?

 



버스 시간표를 보니 금계까지 택시타고 가야할 것 같아

네팔인같이 생긴 나마스테 사장님이 금계마을까지 태워 주었다.

 

금계에서 맛있는 점심식사를 즐기고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맑을 하늘을 보니 벤치 위의 은행나무에 얼마나 은행이 많이 열렸던지..




 

주여 내 생이 저렇게 가득 열린 은행같이 즐거움이 풍성하게 하소서..


 

이번에 끝내지 못한 지리산 둘레길 코스.

점점 지리산의 다른 지역에도 트랙킹 코스를 만든다 하니

다음에는 이번에 가지 못한 길을 따라 가 봐야지.

 

비록 이번 둘레길은 혼자 여행이라 길동무가 없어 외로웠지만

어차피 여행자는 외로움과 친구되지 않으면 여행이 자유롭지 않으니

때로는 외로움과 떠나고 때로는 마음에 맞는 친구와 떠나고

때로는 길에서 만난 벗들과 만나 친구되어

나의 여행은 어제 오늘 길에서 만난 67살의 어느 남자분처럼

오래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