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여기저기 코스

북한산 둘레길 8, 9, 10코스

carmina 2012. 5. 20. 00:46

 

2012년 5월 19

 

아직 5월 중순인데 이미 여름 기온에 도달한 5월 중순.

날씨도 좋았고 아침 창문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등산복이 많다.

 

아내의 친구부부들과 생전처음으로 야외활동을 같이 하기로 한 날.

북한산 둘레길.

평소 가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웬지 선듯 나서지 못했던 길.

왜 그랬을까?

물론 오래 전부터 사전 조사는 모두 해 놓았다.

그러나 코스를 너무 세분화 해 놓아 구간 별 거리가 짧고

보이는 풍경이 아파트밖에 없을 것 같아 망설였었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핑계김에 떠나는 길. 승용차를 가지고 느지막히 일어나 불광동으로 향했다.

아내의 친구 아파트 단지에 차를 세우고 단지 내 뒷문으로 나가니

바로 아카시아의 흰 꽃들이 떨어져 흰 주단같이 되어 버린 숲길로 이어진다.

아파트 거실에서 산이 보이는 것도 부러운데

단지를 벗어나면 바로 숲길이라니..

 

숲길은 이미 마을사람들이 자주 애용하는지 오가는 사람이 많고

흙길이지만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있다.

몇 개의 운동기구들. 편히 쉴 수 있는 벤치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평소 북한산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샘이 날 지경이다.

 

북한산 나들길은 최근에 북한산을 완전히 에워싸는 20개의 전 구간을 조성했다.

그중 첫번째 구간인 미시령길을 지난 해 다녀왔으니 19개의 코스가 남았네.

약 70키로인 전구간을 모두 다 돌면 22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어느 홈페이지를 보니 한 사람이 22시간동안 쉬지 않고 걷고 사진을 올렸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둘레길과 바로 이어지는 동네.

언제나 그런 꿈이 이루어질까?

그러나 내 성격상 가까운 곳에 숲길이 있다해서 다른 먼 곳의 둘레길을

포기할 것 같진 않다.

 

어차피 여행은 집을 멀리 떠나야 맛이니까..

 

8코스의 이름은 구름정원길.

아파트 바로 앞길이라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길은 진관사로 향한다.

독바위 고개쪽으로 해서 올라가는 북한산길을 가면

늘 보이는 팻말이 진관사 가는 길.

오늘은 그 길을 직접 가본다.

둘레길 팻말은 아주 튼튼하게 잘 만들고

나무에 매단 표시도 나무에 피해를 주지 않게끔 달아 놓았다.

둘레길의 어디에도 다른 등산길에 있는 리본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껏 강화도 나들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에 익숙한 내 눈에 보이는 북한산둘레길은

마치 잘 다듬어진 인공조형물 같다.

뭐랄까,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나무 같다고나 할까?

모든 길이 너무 잘 정비되어 있고 곁길로 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이게 서울 둘레길의 모습이구나.

이래서 내가 자꾸 이곳을 오기 꺼려 했구나.

벌써 흥미를 잃기 시작한다.

 

자연미가 사라진 둘레길.

걷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산 길.

모든 길에 두터운 동아줄로 방패를 쳐 놓았다.

물론 당연히 숲길로 가지 않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거부감이 든다.

걸으면서 나무도 만지고 수풀도 발에 걸려야 하거늘 그런 재미가 없다.

마치 제한된 길을 가야만 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끝없이 지정된 길로 가야 한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을 즐기고 있다.

작은 아이도 나이 많은 어른도...

다 같이 즐기는 힘들지 않은 길.

역시 서울이다. 누구나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목적의 길.

 

숲길은 있지만 숲사이를 걷지는 않는다.

숲사이를 지나지만 숲을 밟지는 못한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 갔기에 그 길은 아스팔트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혹시나 조금 위험해 보이는 곳엔 여지없이 나무계단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다.

 

휴일이라 많은 무리들이 공터에서 놀고 있다.

레크레이션을 즐기고 모든 보이는 벤치마다 가족들이 차지하고 놀고 있다.

 

구름정원길에서 내려와 한 참을 아스팔트로 걸어가 이어지는 9코스 마실길.

진관사에서 운영하는 듯이 보이는 커다란 노인요양원이 숲 속에

비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변의 산들도 이미 어떠한 건축물이 들어오려는지 부지 정리를 잘 해놓았고

무척 비싸 보이는 돌들로 석축을 쌓아 놓았다.

보도블럭에 녹색페인트로 길게 길게 둘레길 가는 길을 표시해 놓았다.

아마 헤매지 말고 편하게 가라고 표시는 해 놓았지만

너무 편해서 오히려 길을 걷는데 반감이 온다.

 

마실길의 숲길에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 숲

조성해 놓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두 손으로 감쌀만큼의 가느다란 두께의 은행나무가 빽빽하게 밀집되어

하늘로 솟아 있다.

 

은행나무가 이렇게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생전 처음보네.

은행나무라는 것이 오랜 세월을 두고 암수 나무가 멀리 떨어져서 서로

씨를 날려 번식하는데 여긴 마치 대나무밭같이 은행나무 밭을 조성해 놓았다.

 

그 은행나무 밭에 가족들이 소풍나와서 먹을 것을 싸 들고 와 놀고 있다.

숲속에서 혹은 평상에서...

먹고 남은 것들을 제대로 치우고 갈까?

 

그리고 마실길 가운데 있는 커다란 야외음식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음식점의 야외 테이블에서 한차례 놀고 간듯

지저분한 음식상이 줄지어 있다.

나도 이전에 직장 동료들과 같이 이런 곳에서 먹었으면서

왜 저런 것이 마음에 안들지?

 

둘레길 전용 야외화장실이 있어 길 옆에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도심 속 커다란 빌딩의 화장실 못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그것도 야외화장실 밑에 바퀴가 달려 있는 이동식이라니..

물질만능이 부럽다.

 

이제 막 새로 조성된 듯한 동네길을 걷다보니 제법 큰 느티나무 하나가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수령 150년된 느티나무가 동네 구석에서 볼품없이 서 있다니..

적어도 이 정도 되면 동네 한가운데나 혹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서 있어야 품위가 서는 느티나무가 구석에서 먼지에 쌓여 있다니..

불쌍한 것..

이전에는 제법 뽐내는 터줏대감노릇을 했을텐데

이젠 그 터줏대감을 세멘트 냄새 나는 집들이 에워싸는 바람에 초라하게 변해 버렸다.

 

그래도 지조를 지키려는 듯, 아니면 살아남을려고 애를 쓰는 듯

개조하지 않은 집의 대문이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서 있고

그 앞에 곱게 나이 든 할머니가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대문 앞에 앉아 햇빛을 받고 계신다. 

할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짧은 거리의 마실길을 지나니 이름도 재미있는 10코스 내시묘역길

이 곳까지 걸어오면서 수없이 많은 비석들이 길에 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내시들의 비석들이었으리라.

생식 기능을 잃어버린 내시들이라 자손도 없는지라 묘지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탓에

묘지의 봉은 이미 수 십년동안 비에 쓸려 내려온 흙에 파 묻혀 버리고

묘석만 여기 저기 뒹굴고 있다.

 

길가에도 묘석의 흔적들이 많이 보이고

어느 곳은 묘석을 보호한다고 밧줄로 경계표시를 해 놓았다.

 

군신을 보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내시들

궁궐에서 제법 떨어진 이 곳에서 집단 생활을 하고 쓸쓸히 죽어갔다.

은평구 (恩平區)의 은평은 혹시 내시들이 임금의 은총을 받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내시 묘역길을 가는 양 옆은 절대 길을 벗어 날 수 없도록

철조망 담과 밧줄로 막아 놓았다.

아마 수없이 많은 도굴꾼들이 이 곳을 여러차례 훑고 지나갔으리라..

그 들의 묘석과 묘비들이 어느 부잣집 정원에서 자랑스럽게 서 있겠지.

 

둘레길의 곳곳에 외국 유명인사들의 명언들을 적은 판을 세워 놓았다.

그것도 친절하게 영어로 먼저 쓰고 다음에 번역된 한글을 써 놓았다.

역시..선진국이네..

 

주택지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잘라 산을 파헤치고

그 곳에 다시 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무들이 살아 날 수 있도록 거미줄처럼 얼기 설기 만들어 놓았는데

앞으로 오랜 세월 지나면 질서있게 잘 조성된 숲이 되겠지?

 

등산복을 차려입은 머리 히끗한 아버지와 금방 방에서 컴퓨터하다

아버지에 불려 나온 듯한 옷차림의 아들이 앞에서 걸어 올라오는데

내 옆을 스칠 때 인생에 대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훈계가 내 귀에 들린다.

그러나 아들의 표정은 전혀 무관심하다.

너도 이 다음에 나이들면 아빠의 마음을 알겠지..

 

개인 소유인 듯한 토지에 판매을 위한 나무들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 오래되어 고사한 나무 두 그루가 부부처럼 서 있다.

그 나무가 왜 그리 불쌍한지 한 참을 서서 보았다.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산이 고생하고 있음을 본다.

 

정말 요즘은 심각할 정도로 많은 등산객들이 산을 찾는다.

무엇이든지 사람의 출입이 많으면 훼손되기 쉬운 것이 자연이니

마치 메뚜기떼들이 지나간 벌판처럼 서울 근교의 산과 계곡들이 황폐해 지고 있다.

 

아마 이 곳을 다른 지방의 산처럼 휴식년제를 하게 된다면

풍선효과 때문에 다른 지역의 산들이 남아나지 못하리라..

 

오늘 북한산 나들길을 지나며

수없이 많은 둘레꾼들 속에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치 휴일의 종로거리를 지나가는 어수선함 속에 있다 온 것 같다.

 

이제껏 내가 다녀 보았던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화도 나들길

시흥 늠내길, 강원도 바우길, 영덕의 블루로드, 변산의 마실길 등등..

모두 이렇게 번잡하지는 않았다.

 

북한산 둘레길은 생각하며 걷는 길로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자연은 느끼고 즐기기 위한 것도 더욱 부족하고

마치 인스턴트 음식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단순했고...

그냥...출근 길 복잡한 전철속에서 휴일을 즐겼다고 함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북한산의 다른 둘레길 코스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