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여기저기 코스

변산 마실길 둘쨋날

carmina 2012. 5. 1. 13:08

 

둘쨋날.

 

지난 밤에 방이 부족하다고 더블 베드룸을 받았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하룻밤 자면 되겠지 했는데

혼자 자도 침대가 좁아 제대로 뒤척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피곤해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찍 잠에 들고 일찍 일어났다.

 

8시도 안 된 시각에 배낭 메고 출발.

 

원래 어제까지 1구간 3코스 종착지인 격포항까지 완주할 생각이었으나

가다보니 해가 떨어져 3코스 중간에서 하룻밤 자야만 했다. 

 

2구간은 거리상 4시간 정도면 완주할 수 있기에 오후시간에 적당히 걸으면 

남은 1구간 3코스와 2구간 그리고 3구간의 1코스정도 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숙소를 나왔지만 갈 방향을 잃었다.

숙소가 원래 마실길코스가 아닌지라 어디에도 이정표가 없다.

그렇다면 우선 바닷가를 찾자. 그러면 어딘가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어제 저녁 밥먹던 곳에 격포항가는 이정표가 있다.

 

안내가 있으니 다리에 힘이 생긴다.

이전 같으면 하루를 먼길 걸으면 그 다음 날 아침에는 다리가 아파

잠시 절룩거렸는데, 이상하게 오늘 아침은 그런 증상도 없었다.

 

격포해수욕장을 지나 멀리  산고개 정상에 정자 하나.

지도를 보니 닭이봉이라 한다. 

그 곳에 올라가면 이쪽 저쪽 바다 풍경을 모두 시원하게 볼 수 있겠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바다풍경을 보면서 걸어왔기에 정자로 올라가지 않고

우회하여 능선을 따라가니 제법 큰 격포항이 눈 앞에 펼쳐진다.

 

아침바다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도 구경나와 있고,

여기 저기 이른 아침 나온 어민들을 위해 포장마차도 몇 군데 열려 있다.

아침밥은 이 곳에서 핫도그와 김밥으로 대신하고

부두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밝은 색 조끼유니폼을 입은 할머니들이

부둣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줍고 있다.

 

이 곳은 바닷가의 성격에 맞지 않는 전역한 각종 전투기, 대공포, 군용트럭등이 진열되어 있다.

아마 어른들은 바다를 보고 애들은 이런 군사무기를 구경하게 하여 여행의

재미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다.

 

격포항 옆의 해안 절벽은 채석강에서 제일 유명한 책바위.

절벽이 책을 쌓아 놓은 듯한 단층의 모습이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이 곳을 채석강이라 불렀다.

 

저멀리 방파제 끝에 등대가 보이고 그곳까지 긴 목조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볼 때는 그 목조다리 끝에 쯤에 해안절벽을 돌아가는 길이 있을 줄 알고

채석강의 기기묘묘한 해안절벽을 보며 끝에까지 걸어갔는데 그만 그 끝에는

넘실거리는 물결만 가득 차 있다.

 

방파제에 앉아 녹차 한잔을 마시며 바다를 즐겼으나 멀리 보이는 등대까지 걷는 건 포기.

다시 긴 목조다리를 돌아 오니 관광객들이 천천히 마주오고 있다.

 

목조다리에 입구로 돌아오니 반가운 마실길 이정표, 이 곳부터 2구간 1코스 시작.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길 양옆에 철쭉이 화려한 색깔로 열병식을 벌인다.

 

그리고 그 끝에 산길에 투명 플라스틱으로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터널의 주위는 소나무로 둘러 쌓여 있고..무슨 의미일까?

 

그 이후 호젓한 산길.

이 산속에서 차 소리가 들린다.

이 근처에 군부대가 있구나.

그런데 군부대보다 더 큰 부대가 산 뒤에 자리잡고 있다.

드라마 전라좌수영 이순신 촬영장소.

 

아무도 없는 셋트의 마루에 앉아 휴식을 취해 본다.

마루에 먼지가 가득 쌓인 것으로 보아 최근에 촬영한 흔적이 없다.

비록 셋트지만 견고하게 지어졌고 기둥이나 서까래들도 무척 튼튼해 보인다.

작은 공간에 장군들 숙소, 장병들 숙소, 마굿간, 해우소 등등 마련되어 있다.

TV에서 보여지는 것은 겨우 40~50인치 정도의 작은 세상일 뿐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작은 부분을 우린 크게 봐야 하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마치 거대한 전장터를 연상케 한다.

 

가까운 곳에 부대가 있으니 엑스트라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셋트장 앞에 바위로 둘러쌓인 작은 바다의 공간으로 대양의 전투를 재현할 수 있다.

이런 셋트를 보면 우린 모두 속고 사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매스콤은 무조건 100프로 믿을 바가 되지 못한다.

트릭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왜곡하게 만드는 것이 카메라다.

셋트장의 전라좌수영 깃발은 배우가 있으나 없으나 펄펄 휘날리고 있다.

오늘은 내가 이순신이나 되어 볼까?

 

그 곳을 내려와 언덕을 돌아가니 다시 한적한 시골길.

작은 언덕위에 잘 지어진 건물하나 서 있다.

그 언덕 아래에는 작은 활처럼 생긴 항구.

아니, 항구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크지도 않고 정박한 배도 없다.

그러나 그 바닷가 바위위에 앉아 어머니의 자궁같이 편안한 모습의

궁항을 바라보니 세상 모든 시름을 이 곳에 떨져 버리고 가도 될 것 같다.

 

마실길을 다니다 보면 이런 장소를 무척 많이 볼 수 있다.

어느 곳에 택해도 그냥 남은 인생을 주저 앉고 싶은 곳들.

 

궁항의 반대 편에는 마치 한라산같이 우뚝 솟은 작은 하나가 궁항을 지켜주고 있다.

 

어촌 몇 집 사이로 난 골목길로 들어가는 기분도 좋다.

어느 집 마당에 기묘한 모양의 나무를 기르는 모습도 보기 좋고

집 앞에서 부부가 어구를 수리하며 보내는 정겨움의 모습도 보기 좋고..

 

산을 오르는 것도 성취감이 있지만

길을 걸으며 이렇게 사람사는 모습을 보며 다니는 것도 좋은 여행의 방법이다.

 

마을 한 구석에 배에 달고 다니는 각종 깃발들이 무더리로 쌓여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어릴 적 설날 아침에 시골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수인선열차를 타고 오다가

소래 다리 위를 지날 때 다리 밑에 새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배들이 저런 오색의 깃발을 달고 있기에

그 모습이 아름다워 즉시 기차에서 내려 흑백카메라로 그 광경들을 찍어 대느라

하루에 4번 밖에 운행하지 않는 다음 기차를 타고 늦게 오느라  집에 늦게 도착해

어머니에게 늦은 이유를  해명한 적이 있었다.

 

마을을 지나 다시 차가 다니는 길을 따라 가다 보니

집 앞에 커다란 하트 모양을 만든 것이 보기 좋았다.

멀리서 볼 때는 두터운 밧줄로 만든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화분을

수없이 겹치게 만들어 이런 형태를 만들었다.

 

궁항에서 솔섬으로 향하는 길.

여전히 멋진 펜션들은 계속 지어지고 있고,  비수기에 비스듬하게 쉬고 있는

펜션의 의자를 세워 다리 난간에 발을 올리고 최고로 느긋한 자세로

물 빠진 바다와 내가 갈  솔밭길을 바라보며 길을 즐긴다.

 

바다로 내려오니 또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바닷가에서 한가로히 바다를 바라보던 동네 청년하나가 손길로 길을 알려 준다.

 

다시 흥얼거리며 바닷가 솔밭길을 걸어간다.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걱정하나 없는 떠돌이

멋진 피리 하나 물고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

 

물 빠진 바닷가에 작은 배 몇 척이 세워져 있는데 그 주위로

갈매기 떼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다. 왜 그럴까?

혹시 어부가 갈매기들을 위해 무언가 남겨 두었을까?

갈매기들의 신나는 소리가 구름한 점 없는 허공에 가득하다.

 

구비 구비 언덕을 돌아가니 다시 사람흔적.

깨끗한 건물이 보여 지도를 보니 전북학생해양수련원.

 

아침에 나온 뒤로 여유있게 용변을 보지 못했으니 여기서 일 좀 보자.

여기까지 오는데 땀도 많이 흘렸다.

벌써 더워지는 계절이라..수통에 물도 보충하고...

 

이제까지 혼자 다니느라 내 사진도 못 찍었으니

대형 거울을 앞에 두고 내 모습도 찍어 보았다.

 

잘 단장된 수련원 아래로 내려가니 작은 오솔길 나무에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적은 나무토막을 걸어 놓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되었나.

이제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찾아야겠다.

 

솔섬으로 가는 길의 호젓한 마실길도 때로는 군부대 길로 막혀 있지만

그래도 모두 군의 협조를 받아서인지 전혀 불편없이 길을 마련해 놓았다.

 

솔섬에서 다음 목적지는 모항갯벌체험장.

 

솔섬을 빠져 나와 구비 구비 솔밭길, 보리밭길, 연산홍꽃밭길을 지나다가

바닷가 길을 따라가고, 언덕길로 쉬엄 쉬엄 오르다가

산새들이 지저귀는 언덕에 바다가 보이는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내려와 모항갯벌체험장으로 가는데

멀리 갯벌에서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캐는 모습이 어부들은 아닌 것 같고 옷 모습이 도시사람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갯벌의 한 가운데 족구장이 표시되어 있다.

설마 저곳에서 족구를?

이거야 말로 기발한 착상이다.

마음껏 갯벌을 뛰놀며 즐겨라..

 

갯벌로 나무 발판을 만들어 놓아 갯벌로 들어가기 쉽게 만들었고

갯벌 앞에 대형 버스가 한대 들어 오더니 젊은이들을 풀어 놓는다.

 

내려 오는 젊은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오늘 실컷 놀아보자는 떠들썩한 기분.

 

그들을 뒤로 하고 산길을 돌아 갯벌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도 아프고 밥도 먹었으니 좀 쉬었다 갈까?

마침 어제 아침에 챙겨나온 신문이 있어 길게 펴고 자리에 누웠다.

나 혼자 여행이니 이런 것들이 가능하겠지...

 

멀리서 젊은이들의 웃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아늑해 질 무렵

나는 잠시 숲속 길에서 신선처럼 낮잠을 즐겼다.

 

30분정도 잤을까?

다시 주섬 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길을 떠난다.

청년들의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사라질 무렵

벚꽃 잎이 동동 떠있는 작은 옹달샘을 지나니 마을이 나온다

오랜 세월 전에 지은 듯한 기와집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지만

어떤 집은 빈 집 채로 방치하고 있다.

 

오솔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에 다시 보이는 바다

그 새 물이 많이 들어왔다. 어제 이맘 때 쯤인가?

육지에 가까운 바다와 조금 떨어진 바다의 색깔이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바다 위 한가운데 주단을 깔아 놓은 듯한 긴 선이 그어 있다.

 

기암 괴석들이 양 옆으로 펼쳐진다.

금방이라도 지진이 나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  언덕위의  커다란 바위들이

우르르 쏟아 내려올 것 같다.

 

그리고 양 옆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밭.

대나무가 너무 울창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다

문득 시야를 들어 먼 곳을 보니 산 하나가 완전히 대나무밭이다.

그 울창한 대나무밭 끝에 보이는 삼각형의 바다.

 

마치 신선의 나라에 온 것 같다.

어디선가 딸랑거리며 동자승이 소를 타고 올 것 같고

대나무 숲 끝의 정자에는 흰 수염의 도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을 것만 같은 선경.

 

그렇게 대나무밭을 통과하니 긴 뚝이 먼 곳까지 뻗어 있다.

마동 방조제. 방조제 왼쪽에는 양식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물웅덩이들과

사료를 주는 듯한 역삼각형의 흰 색의 통이 세워져 있다.

오른 쪽은 황량한 갯벌.

너무 갯벌을 보아서인지 이젠 갯벌보다 다른 곳에 눈이 간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벤치를 만들었는지

방조제 끝에 있는 벤치 2개가 바다를 향하지 않고 양어장을 향해 있다.

 

다시 차다니는 도로로 올라왔다가 어느 마을로 들어가는데

이 마을은 집들이 유난히 깨끗하다

아하...이 마을은 KBS 6시 내고향 프로그램을 촬영한 곳이구나.

마치 유명한 식당에 어느 TV의 맛자랑 코너에 나왔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마을노인회관의 벽에 선명하게 TV 촬영한 장소라고 표시되어 있다.

 

마을의 낮은 언덕위에 골격이 큰 나무가 크기를 자랑하고 있는 옆에

깨끗한 집 한 채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외지 사람들의 별장같다.

마을을 다니다 보면 잘 가꾼 집은 외지 사람 소유이고

허름한 집은 주민들 것이라 생각하면 정답이다.

 

오늘 참 많이 걸었다.

아침 7시 40분부터 걷기 시작해 지금 시간이 5시가 되어 가니

족히 8시간을 넘어 걸은 셈이다.

이젠 어디선가 잘 곳을 찾아야겠다.

마침 갈대가 줄지어 서 있는 운호방조제의 저편 끝에 모텔하나가 보인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식당도 없고... 가끔 뱃일 하는 어부들만 보이고

노인네들 마을 주민들이 전깃줄위의 제비처럼 않아 햇빛을 쪼이고 있다.

 

자..오늘은 이 곳에서 하룻밤 자자..

모텔에서 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해지기 전에 동네 산책을 나가 어슬렁 거리다가

해가 멀리 산 넘어로 숨어들어 갈 때 쯤 숙소로 돌아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저녁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