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여기저기 코스

변산 마실길 첫 날

carmina 2012. 5. 1. 13:09

 

2012년 4월 26일

 

'베토벤은 키가 땅딸막하였으나 어깨가 딱 벌어지고 뼈대로 역도 선수처럼 굵었다.'

버스 안에서 읽기위해 여행배낭속에 찔러둔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사랑' 첫 귀절을 읽다가

까만 활자 넘어로 보이는 하얀 설밭이 눈을 끌어 책을 덮고 창가를 보니

하얀 배꽃이 부안으로 달리는 고속도로변에 지천이다.

 

어쩌다 남들이 쉴 수 없는 날, 나만의 징검다리로 생긴 2박 3일의 휴가

무언가 의미있는 여행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먼 길을 떠났다.

부안의 변산 마실길, 새만금전시관에서부터 변산반도를 채석강, 적벽을 거쳐 반원형으로 돌아

부안자연생태공원까지 가는 66키로의 대여정.

 

쉽지 않는 긴 코스지만 2박 3일 정도  발에 물집 잡힐 각오로 걸으면 가능할 것이다.

비록 내 몸에 큰 수술을 한지 3달이 지났고, 의사도 이젠 큰 문제 없다고 진단을 한 터이라

걱정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큰 다짐을 했다. 너무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부안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강남고속터미날에서 3시간.

내리자마자 돌아오는 표를 예매하고 매표소 아가씨에게 이 근처 점심먹을 곳을 물어보니

정자나무라는 곳을 가르쳐 준다. 손님 가득한 그곳의 음식은 확실히 전라도 음식이라

그런지 맛깔 스럽고 주위에서 진하게 들려오는 전라도 사투리만큼이나

진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다시 새만금 전시관가는 버스를 타면 30분정도 걸린다 한다.

어느 버스를 타야 하는지 정류장앞의 여러 약국중에 아줌마들이 제일 많이 앉아 있는

약국에 들어가 물으니 표시도 없는데 앞에서 기다리면 온다고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약국안에서 앉아 있는 아줌마들이 약국에 볼일이 있어 온게

아니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인근의 다른 약국은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는 걸로 보아

그 약국만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약국내의 의자들을

개방한 것으로 보인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니 신기하게도 버스시간표가

상가 건물사이의 벽마다 붙어 있다.

참으로 어린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가게이름들과 길거리 물건 파는 아줌마들

시골에서 쓰는 부인용 물건들과 부엌용 물건들.

 

뒷모습만으로도 시골의 나이든 할머니로 가득찬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광활한 새만금방조제가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방조제.  차가 뜨문 뜨문 달리고 있다.

아직 새만금방조제 전시관은 오픈되지 않았고

임시 전시관이 준비되어 있는데 안의 전시된 내용물은 그다지 많지않지만

새만금방조제를 보기위해 몰려든 관광버스에서 나이든 시골 어른들이

무더기로 차에서 내려 임시전시관으로 밀려 들어간다.

 

임시전시관 앞에는 마실길 안내소가 비치되어 있고 몇 개의 마실길 안내도와

홍보물을 챙기고 출발.

 

인터넷에서 조사한 마실길은 총4개코스가 있어

1코스인  3개로 나뉘어져 있고 2구간과 3구간이 각각 2개코스씩

그리고 4개구간은 1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안내소에서 받은 구간표에는 전체 8개의 해안코스와

5개의 내륙코스로 재구분되어 있었다.

 

해안누리길인 1코스 1구간은 밀물 때와 썰물때에 가는 코스가 다르다.

미리 물 때를 조사해 보니 오늘 지금 시간엔 간조때라 바닷길을 걸을 수 있다.

이곳 새만금 앞바다는 물이 나간 후 갯벌이 나타나도

갯벌이 단단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입자가 고운 갯벌이 발에 닿는 촉감이 좋다.

바닷물은 아주 멀리 보이지만 밀물 시간이 다 되었는지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다.

물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해안가를 기분좋게 팔을 벌리고 걷는다.

어제 종일 비가 욌으나 오늘은 구름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를 머리위 높은 곳에 두고

첫발을 내딛는 황홀한 기분을 위해서 오늘 나는 아침부터 먼길을 달려왔다.

 

1차 목적지인 변산해수욕장.

밀물 때는 위의 길로 올라가라는 안내 표식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다.

물론 하루에 2차례씩 물이 나가지만

낮과 밤을 생각하고 주말을 이용하여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런 좋은 기회도 그리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갯벌 바닥에는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 안해 보았지만

조개들이 우수수 밟힌다.

가끔 온전한 것을 손으로 집어 보면 아직 살아 있는 것도 많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바닷가 바위들이 깍여나가고 있다.

어떤 큰 바위는 멋있는 곡선을 그리며 여자의 치마자락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고

어떤 바위는 거인의 발같은 모양을 파도가 조각하고 있으며

어떤 바위는 파도가 울퉁불퉁 곰보로 만들어 버렸다.

 

하긴 자연만큼 멋진 예술가는 이 세상 아무것도 없으리라.

음악도, 미술도, 영화도, 사랑도..

 

때론 4륜 모토 바이크를 즐긴 듯 갯벌위에 커다란 흔적이 있고

누군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 옆에 새들의 희미한 발자국과

아울러 게들이 집을 만들며 파헤쳐 놓은 작은 흙더미들도 눈길을 끈다.

 

문득 해안가 숲이 있는 낮은 하늘에서 무언가 쌩 날라간다.

제비다. 흰 배를 자랑하는 날렵한 제비.

도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제비가 이 곳에서 지천으로 날아 다니고 있다. 

 

좋은 망원카메라가 있으면 멀리 파도를 향해 날아가는 갈매기들의

멋진 모습을 끌어당겨 보고 싶지만, 아스라히 먼 곳에 있는

수평선을 향해 날아가는 그들은 내 시야에서 더 작아질 뿐이다.

 

파도가 밀려온다.

먼 곳에서 물 빛만 보였던 바닷물이 벌써 성큼 내 눈앞에서 흰 포말의 파도와

함께 층층히 밀려 오고 있다.

 

순식간에 내 발을 덮을 것 같아 언덕으로 올라가니

새로운 마실길 표시 이정표.

한 눈에 이 곳 마실길은 군 부대의 해안경계 초소로 이동하기 위한

통행로임을 알 수 있다. 민간인들의 출입이 오랜동안 통제되어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통로에 낙엽이 가득하고

자주 보이는 군 초소도 밤에만 이용하니, 아직 풋풋한 느낌이 든다.

 

해안의 넓이에 따라 바닷물이 밀려오는 위치가 달라

때론 다시 갯벌로 나가 걷기도 하고 바닷가 바위 위에 올라가

간식을 먹으며 바다를 즐겼다.

 

어느 곳에서는 어부들이 조개를 까고 버린 조개껍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도 해서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을

새로 짓느라 파헤쳤을 때  집터에 수없이 많은 조개더미들이

쌓여 있던 기억을 새삼 생각난다.

 

그 야생의 바다가 끝나는 지점 쯤의 언덕에 펜션들이 있고

넓은 해수욕장이 지난 겨울의 텅 비었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주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듯한 민들레 홀씨가 바람불면 날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으며,

신비의 자연들,  움트는 나무들과 한창 꽃피고 스러지는 동백나무들

벚꽃이 비되어 흩날리고, 진달래의 황홀한 색깔이 아직 남아 있다.

 

인근 펜션에서 있는 관광객들이 바닷가로 산책을 나와 추억을 만들고 있다.

 

바닷가를 걷고, 다시 숲을 걷고,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초소 옆을 지나며,

잘만들어진 나무막대 이정표, 간이 막대 이정표 그리고 리본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면

누군가의 소망을 적어 걸어 놓은 나무토막도 있고, 그 소망을 축하해 주는 새소리도 있다.

 

언덕을 오르고 바위를 건너 뛰고, 잘 만들어진 벤치에서 싸가지고 온 오렌지를 까먹으며

걷다보니 어느 새 송포항.

조용하고 작은 항에는 바닷물이 빠져도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작은 도크가 준비되어 있다.

낚시하는 이들도 있고 뱃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한 낮을 채우고 있다.

 

송포항에서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니 내가 지나온 길들이 멀리 보인다.

몇 시간 걷지 않았는데 벌써 많이 왔네.. 다음 목적지는 고사포항.

이름부터 재미있다. 왜 고사포항일까?

가다보면 사망마을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死亡이 아니고 士望.

한 선비가 이곳에서 북향을 바라보며 때를 기다렸다 해서 사망마을.

전라도는 우리의 역사에 주로 선비들의 귀향지였기에

북쪽의 한양을 바라보며 복권을 기다리는 선비들이 많았기에

이런 이름의 지명이 많다.

 

계속 해안선을 끼고 걸으니 때로는 다시 갯벌로 내려가기도 하고

때론 들쑥 날쑥한 해안선 때문에 다시 언덕위로 올라오는 다양함이 있어 좋다.

 

가끔 언덕 사이로 바라보이는 V자 형의 바다가 정감이 넘쳐 보인다.

 

그러다가 다른 언덕에 올라가면 여지없이 보이는 펜션들.

서로 전망 좋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펜션이 지어지고 있다.

 

펜션아래에는 고운 모래밭이 가득한 백사장들.

여름에 이 곳에 오면 호젓함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백사장과 바다 그리고 솔밭이 어우러진 곳의 벤치에서 배낭을 내려 놓고

길게 누웠다. 발 끝으로 보이는 하얀 파도들과 맑은 하늘.

이곳에서 잠이나 잘까?

 

고사포백사장의 깨끗한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인근의 솔밭으로 향하는데 어디서 힘찬 남성들의 소리가 들린다.

해안경비를 담당하는 군인들이 검은 막으로 둘러 쌓인 영내에서

운동을 즐기고 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해안 솔밭.

소나무들이 춤을 춘다. 아마 소나무를 전문으로 찍는 배병우작가도

이 곳을 탐내지 않았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밭에서 혼자 드라마를 찍는다.

소나무를 안아보기도 하고, 빙글 돌아도 보고, 솔방울을 한 웅큼 집어

하늘로 던져보기도 한다.

 

이렇게 멋진 곳에 나 하나 밖에 없다니..

세상에 이런 호사가 어디 있나...

 

처음 떠나 올 때 이번 여행에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연락하지 않기로 스스로 생각했다.

문명을 떠나고 자연과 호흡하고 싶었다. 그 어떤 끈과도 떨어지고 싶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던 솔나무 밭도 지나치고 나니 작은 텃밭에서 할머니 한 분이

혼자 밭일을 하고 계시기에 수고하신다고 인사드리니 어디서 왔느냐며 관심을 보여주신다.

 

지나가는 펜션 앞에 수북히 쌓여있는 술병들.

저 술병속에 얼마나 즐거운 추억들을 담아놓았을까?

 

성천마을을 지난다.

마실길을 만든 이들이 여기 저기 애쓴 흔적이 보인다.

언덕에 자연 친화적인 나무 계단을 만들고

도로 옹벽에도 편히 갈 수 있도록 작은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어쩌다 물이 흥건히 고여있는 곳에는 나무를 묶어 안전하게 건너게 해 놓은 것으로 보아

주기적으로 마실길을 다니며 보수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오니 해안건너 저편에 하섬이 또렷이 보인다.

하섬은 국내에서 몇 안되는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두번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썰물 때는 걸어서 하섬을 갈 수 있다.

 

저런 곳에 집하나 짓고 살면 행복할까?

아니면 너무 고독할까?

그 어떤 것이 될지는 몰라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을 가는데 멈칫.

언덕 위 길 한가운데 커다란 바위하나가 우뚝 가로막고 있다

혹시 영화 인디아나 존스처럼 저 바위가 굴러 내려오는 것은 아닌가?

또 한 번 멈칫.

작은 뱀 한마리가 움직이지 않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머리가 으깨어 진 죽은 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걷다보니 커다란 호를 그린 절벽 바위가 눈 앞에 펼쳐진다.

마치 제주도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

여러가지 모습의 자연 경관들이 나를 기분좋게 한다.

 

많이 걸었는지 해도 많이 넘어갔다.

이정표뒤로 보이는 햇빛이 이정표의 둔탁함을 뚫지 못해 반짝이고 있다.

시간 개념은 없어진지 무척 오래다.

단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자.

 

어디까지 갔을 까?

이정표가 내 발길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인도한다.

도로 한 편에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밝은 색깔로 입혀 놓은 곳으로

타박 타박 걷는다.

 

자...채석강으로 가자..

그런데 오늘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잠시 숲속으로 가는 길이 있기에 들어가보니

호젓한 숲속에 대나무밭이 양쪽으로 도열되어 있는

숲속 저 끝에 바다가 작은 웅덩이만큼 보인다. 

 

오늘 이 곳 쯤에서 노을을 봐야 할 것만 같다.

멀리 오늘 숙소인 대명콘도가 보이지만 거기까지 간다면

노을을 놓칠까봐 서둘러 노을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구름이 조금 있다면 더 멋진 노을을 볼 수 있겠지만

오늘 종일 하늘엔 구름한 점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 나무 계단 앞에 앉아 카메라의 촛점을 이제 서시히 빛을 잃어가는

태양에 맞추었다.

하늘과 바다에 티 한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오늘은 바다가 태양 하나를 생선가시도 발라낼 필요도 없이 꼴깍 삼키려 하나보다.

 

이제 오늘 하루의 임무를 끝내고 들어가는 태양을 향해

머리 속의 온갖 노을에 관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노을이 물드는 바닷가에서

줄지어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지난 날의 못다한 수 많은 꿈을

남모르게 달래보는 호젓한 마음

짧은 여름밤의 꿈, 설레이는 그 날이 눈에 어린다.

 

어린 시절, 얼마나 노래에 심취해 있었던가.

모든 풍경에 맞는 노래를 알고 있고

모든 감정에 맞는 노래가 내 머리 속에 가득했고

늘 혼자 중얼거리며 노래를 했지만

지금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펼쳐진 바다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니 감정이 복받친다.

 

아내에게 이 광경을 카톡으로 찍어 보내며 내 즐거움을 같이 한다.

 

해가 수면 아래로 빛을 잃어가며 사라진 뒤로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나그네 쉴 곳을 찾는다.

 

인근 해변에 있는 식당에서 생선탕하나 먹고 나오니

어둠이 깊이 찾아 들었다.

하늘엔 실같이 가느다란 초생달과 반짝이는 별 들 몇 개.

 

숙소로 들어가기가 아쉬워 바닷가 벤치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바라보며

최근 몇 달간 나에게 닥쳐진 수많은 일들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