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폭염속의 나들길 1코스

carmina 2012. 7. 29. 21:10

 

2012년 7월 28일

 

연일 계속되는 폭염. 열대야.

남부 지방엔 기온이 38도까지 치솟고 있다.

금요일 밤에 심야영화로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혼자 보고 들어와

자정이 넘어 들어와 누웠는데도 너무 더워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토요일 아침에는 늘 출근할 때 일어나는 습관때문에 또 일찍 눈이 떠졌다.

아이고.. 오늘 폭염속에 걸어야 하는데... ..푹 잠을 못 잘까?

 

나들길 걷기 후 잘 가던 다루지카페에서 내 책을 몇 권 받고 싶다고 하고 

너무 더우니 밤길을 걷자는 길벗들의 제안도 있고 해서 차를 가지고

양 옆으로 파란 벼가 자라는 벌판 사이로 시원한 강화길을 달렸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어떤 이는 나를 보자 마자 시중에서 책을 샀다고

사인해 달라고 책을 펼친다. 또 어떤 이는 강남 교보문고에서 책을 샀는데

내 책 2권 중에 하나를 사고 한 권은 책 꽂이 끼어 있는 것을 가판대로 내 놓았다 한다.

고마운 사람들..

 

동문으로 가기 위해 터미널 근처의 아스팔트 길을 조금 걷는데도 벌써 따가운 햇볕이 온 몸을 데우고 있다.

가는 길의 주택가에 있는 나팔꽃의 일종인 노란 색의 커다란 엔젤스 트럼펫마저

답답해 보여 더위를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이 힘든 길을 가는 팡파르라고 생각하자.

 

준비 운동을 하는 동문 앞 잔디밭에 클로버가 가득 피어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세 잎짜리 클로버.

누군가 그랬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지만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행복이 지천으로 주위에 널려 있는데 사람들은 행운만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 잎의 행복, 세 잎 클로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작은 것에 감사하고, 쓸데 없는 것에 노력하지 말자.

며칠 전 있었던 암 수술 후의 정기 검진 결과도 아무 이상 없이 나왔다.

감사하는 생활이 나를 지속적으로 행복을 갖게 하리라.

머리에 손수건을 말아 땀받이로 질끈 매고 오늘은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워낙 땀이 많을 것 같아 땀을 잘 발산하는 티셔츠도 어제 밤 새로 구입했다.

 

오랜 만에 보는 고려궁지앞의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도 오늘은 무성한 잎으로 가득해

답답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오늘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골골이 큼직한 흰 버섯이 자라고 있으나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아무도 손을 못대고 있다

오늘은 리딩을 하는 분에게 조금 천천히 걷자고 부탁했다.

 

강화도 성공회 성당을 잠시 보고, 용흥궁에 들어가 모두 마루에 앉아

어린 시절들을 이야기한다. 평소같으면 그냥 둘러 보고 갈 텐데

오늘은 이야기꽃이 만발하여 모두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오랜동안 노닥거렸다.

용흥궁의 구석 구석에도 세월의 때가 반지르르하게 묻어 있고

나들이 나온 주부들이 오래된 우물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깊고 어두운 우물 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 곳을 지나면 원래 코스로는 빨래터를 지나 산길로 올라가야 하는데

오늘은 너무 산길마저 지칠까 봐 북문으로 가는 지름길로 언덕을 올랐다.

가파른 언덕길. 우리와 같은 배낭을 메고 할머니 한 분이 내 앞을 가고 있다.

약수터를 가신다는 곱게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좋아 우리 어머니같다고

할머니를 옆으로 안아드리니 할머니도 무척 좋아하신다.

 

북문에서 북장대로 올라가는 길은 아직도 공사중.

오늘은 힘들만한 코스는 모두 건너뛰기로 한다.

북문에 올라서 내가 온 길을 뒤돌아보니 그래도 언덕이라고

시원한 바람이 낮은 언덕임에도 가쁘게 숨을 쉬며 올라온 내게 시원한 바람이 안겨온다.

북문을 통과해 잘 다듬어진 수풀을 지나 오읍약수로 가는 소로길.

 

원래 북장대로 올라가 숲길로 내려오는 길이 좋긴 하지만

오늘 가는 이 소로길도 천천히 걷기에는 좋다.

 

길을 가다보면 온갖 꽃들이 주위에 가득하다.

도심지 화원에 있는 그런 꽃 말고, 능소화, 칡꽃, 달맞이꽃, 개망초, 등등.

하다 못해 자주 보이는 보랏빛과 흰색의 도라지 꽃은 그 어느 꽃보다

더 화려하게 여름을 장식하고 있다.

 

오읍약수터의 시원한 그늘에 모여 각자의 배낭속에 있는 간식들을 풀어보니

, 직접 만든 술빵, 참외, 갓 쪄 온 작은 감자와 고구마, 메추리알, 스낵 등등

온갖 종류의 메뉴들이 펼쳐지고, 막걸리 한 두 잔이 우리의 갈증을 채운다.

우리에게 막걸리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고

시골 풍경을 좋아하는 자연인들의 음료라고나 할까?

어느 누구도 길에서는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다.

 

오읍약수에서 숲길을 따라 가는 길에 강화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저어새들이 이정표를 대신한다.

얼마 전만 해도 숲 길 끝에 쯤에 있던 빨래터에는 물이 흘렀고,

빨래터에 있는 6개의 넓적한 돌로 만든 빨래판도 빨래한 흔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물 나오는 곳도 막혀 있고, 빨래판에는 이끼가 가득하다.

무슨 이유일까? 빨래터 주위에 있던 솟대도 기러기들이 날아가 버렸고

시를 써 놓았던 나무 판도 없어졌다.

 

농가 옆에서 수건을 목에 두른 아주머니 한 분이 고추밭의 김을 매고 있다.

이 더운 날 저렇게 풀을 뜯고 있으면 얼마나 힘들까?

어느 해인가 여름 휴가 때 농촌체험을 하고 싶어서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충청도 깊은 시골에서 가족들과

뜻이 맞는 젊은 부부들이 단체로 토지를 빌려 유기농을 하고 있는

마을에 찾아가 하루를 묵으며 논에 피를 뽑고, 고추밭의 잡초를 뽑고

닭에게 사료도 주는 등 농삿군의 일을 하는데 얼마나 힘든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 적이 있었다 그 중 제일 힘든 것이

고추밭의 김매는 일이었는데 고추밭에 농약을 뿌리면 간단히 제거할 일을

농약을 쓰지 않는 원칙으로 유기농을 하기에 직접 손으로 잡초를 뽑는 작업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찜통이라 다 끝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이튿날 집에 오니 그냥 날씨가 너무 더워 고추밭에서 일하던 할머니 한 분이

쓰러져 돌아가셨다 한다.

 

대월초등학교로 가는 길의 농가 밭에는 과일과 채소들이 익어간다.

팔려고 경작하는 듯은 아닌 듯 그다지 크지 않은 수박이 몇 개 밭에 뒹굴고

굵은 가지와 수세미가 익어가고, 고구마 밭도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으로 보아

땅 밑에는 굵직하게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조용하게 이 무더운 여름을 견뎌내고 있다.

 

초등학교를 지나 숲길로 가는 길에 커다란 콘크리트 터널이 있기에

울림이 좋을 것 같아 이태리 가곡 오 솔레미오를 목청껏 불러본다.

반향이 잘되어 더 쩌렁 쩌렁 울린다. 기분이 좋다.

 

지난 번 고라니가 뛰어가던 소나무 숲길은 겨울도 푸르고

지금 한창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에는 소나무뿐만이 아니라

올라가는 숲길 바닥도 푸르름이 가득하다.

낮은 언덕이지만 모두들 힘들어 하기에 소나무 숲길을 올라가

잠시 쉬면서 내가 충청도가 고향인 길 벗을 위해

가수 조용남이 불렀던 내 고향 충청도를 불렀다

이 노래는 가사가 참 서정적이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고 아버지는 장에 가시고

나와 내 동생 메뚜기 잡이 하루가 갔죠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 싶은 곳

논과 밭 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그런데 남들은 알까? 미국의 여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Bank of Ohio’의 멜로디를 이용해서 전혀 다른 가사를 붙였는데

원래 가사는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칼로 찍어 죽이는 내용의

섬뜩한 노래라는 것을

 

숲길이 계속 이어진다. 탱자나무의 거센 가시가 정겨워 보이고

오미자가 아직 청녹색의 색깔이지만 곧 붉게 익어가리라.

 

멀리 연미정이 보인다.

원래 1코스는 연미정을 거쳐 갑곶돈대까지 가야 하지만

연미정부터 돈대까지는 햇빛을 피할 수 없는 논둑길을 가야 하기에

점심을 먹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가기로 했지만 그것마저

왔던 길을 생각해 볼 때 돌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같아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민통선으로 들어가는 초소 앞에 있는 연미정 식당은

나이드신 할머니가 혼자 점심을 준비해 주셨는데

우리가 온다고 일부러 준비한 생선찜이나 오징어 볶음보다는

늘 드시던 배추김치와 파김치가 훨씬 맛있었다.

 

멀리 감곡에서 복숭아를 키우고 있는 평소 나들길 수요도보를 다니던 부부가

감곡복숭아는 먹는 시기가 정해져 있어 토요도보 길벗들에게도 주고 싶어

일부러 차를 가지고 연미정까지 복숭아를 들고 왔다.

그다지 크지 않은 복숭아가 정말 맛있었다.

나들길 길벗들의 정이 참으로 진해졌다.

무언가 베풀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토요일이면 다른 일보다

걷기를 우선적으로 스케쥴을 잡는다.

 

식사 후 몇 명은 그래도 더 걷겠다며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강화터미널로 돌아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연미정에 올라가 쉬기로 했다.

대지의 온도보다 더 올라갔을 것 같은 내 발을 위해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으니 답답하게 갇혀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자신보다 덜 뜨거운 대기로 이동해 버린다.

이른 바 공학적으로 열전달일까?

 

삼삼 오오 모여 앉아 최근 실크로드 여행을 다녀온 분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이들은 길게 자리펴고 눕고

어떤 이들은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휴식을 즐기고 있다.

 

오늘 저녁 밤길 걷기를 하기로 약속한 몇 명이

오후의 뜨거움을 시원한 계곡에서 지내기로 하고

어느 마을을 지나 굽이 굽이 올라가 시원한 시냇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모여 앉았다.

나들길 걷다 보니 이런 즐거움도 있네.

아마 다시 혼자 찾아가라면 가기 어려운 곳인데

강화주민들이 있는지라 이런 호젓한 곳에서 피서를 즐길 수 있다.

 

저녁 먹기 전에 잠시 들길을 걸을려고 일찍 계곡에서 내려왔는데

오후 6시의 태양도 보통 뜨거운 것이 아니라 잘 가던

다루지카페로 이동해 시원한 밭빙수를 즐기고 내려와

인근 마을의 부녀회장이 제공하는 저녁식사 후 밤길을 걸었다.

 

저녁 무렵, 멀리 마니산 뒤로 옅은 석양이 지고

어스름 해가 지는 곳에 검은 구름 사이로 저녁 안개가 드리워져 있다.

맑은 하늘에 반달이 휘영청 솟았다. 어둠이 짙어지고

별들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저녁이면 바람이 좀 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한 여름의 더위는 너무

강했던지 저녁 바람마저 기가 꺽여 버렸나 보다.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비록 밤에 극성을 부리는 벌레들이 있어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밤에 들길을 걸을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좋다.

 

내 생애 이렇게 여유있는 삶의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그건 내가 만들기 나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내가 조절하기 나름이다.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명제인데 쉽게 그런 여유를 즐길 수 없음은

내가 게으른건가? 아니면 내 주위의 삶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인가?

살자 열심히 살자. 그러다 보면 이런 여유는 저절로 주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