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눈 덮힌 강화도령 첫사랑길

carmina 2012. 12. 22. 20:43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강화대교 넘어 입김으로 뿌옇게 보이는 버스창 밖의 벌판은 눈인가? 입김인가?

최근 들어 연속 3주나 금요일 마다 눈이 왔다.

사무실에서 도심에 덮히는 눈을 보며 가슴이 뛴다.

나들길 가고 싶다. 나들길 가고 싶다.

그러나 본격적인 결혼철과 이런 저런 일로 도무지 시간을 못냈다.

이러다가 그냥 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21일 아침부터 눈이 내리다가 오후에는 회의때문에 닫힌 공간에 있느라

밖의 풍경이 궁금했다. 혹시 오후에 눈이 녹는건 아닌지..

비록 오후에는 눈이 그쳐 그다지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벌판의 눈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나 내일 무조건 나들길 갈래.

다행히 춥지 않은 날.

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하자 마자 눈 덮힌 벌판을 보고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낯이 익지 않은 부부가

강화터미널에서 매점에 들어가 용흥궁가는 길을 묻는다.

혹시 나들길 가느냐며 물었더니 처음 온다면서 둘이 걸을려 한다기에

우리 일행과 같이 가자고 권했더니 좋아라 한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들이 모였다. 참으로 대단한 매니아들이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폭염이던 혹한이던 가리지 않고 모이는 매니아들.

그 들에 비해 나는 나들길 책도 펴낸 사람인데 이런 저런 핑계로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군청에서 나온 가이드가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간단히 몸을 풀었다.

눈 덮힌 조용한 마을을 지난다.

강화에서 무척 큰 교회에 속하는지 무척 큰 성전을 가진 강화중앙교회 꼭대기으

하얀 십자가가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어인지 오늘은 더 거룩하게 보인다.

주택가 전봇대에 콘트롤 박스에 디자인을 도입해 커다란 흰 매미로 박스를 만들었다.

세상이 모두 이렇게 아름답게 변했으면 좋겠다.

골목 주택가를 지나 본격적인 숲길로 들어서고...

작은 언덕에 오르니 멀리 흰 눈에 덮힌 마을이 아름답다.

지난 봄에 왔을 때 쓰레기로 군데 군데 지저분했던 마을 옆 밭이 이젠 하얀 눈으로

덮히어 추한 것들을 모두 감싸 주었다.

눈은 모든 것을 덮어 주는 큰 사랑일까?

가을이 지나 나뭇잎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도 흰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우리 외에는 아직 지나간 사람들이 없는지 숲속길의 눈은 아직 흰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아이젠을 준비는 했으나 눈이 많지 않아 그대로 걸으니 그래도 조금 미끄럽지만

모두 조심히 걷는다.

숲 사이의 나무같이 긴 행렬을 이루어 우리 모습들이 알록 달록 등산복을 입은

키작은 나무로 변했다.

 

소복 소복, 뽀득 뽀득, 와삭 와삭, 꼬득 꼬득.

길 위에서 많은 소리가 들린다.

 

산에는 우리가 없어도 여전히 살아 있는 듯

여기 저기 새 집이 걸려 있고, 산에서 베어 낸 나무를 내려 보내기 위해 만들어 진 듯한

레일도 산아래로 이어져 있다.

언덕은 이어지다가 평지로 변하고 그 평지는 다시 언덕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추워서 잔뜩 껴 입었던 옷들을 약수터에서 잠시 쉬며 편하게 벗어 던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간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니 배낭도 가벼워 졌다.

 

남장대로 오르는 길은 여름에도 멋진 모습을 보여 주더니

겨울에도 산위의 넓은 흰 벌판과 길게 뻗는 성곽의 소복한 눈을 보는 눈이 즐겁다.

숲 길 옆 리기다 소나무들은 몇 십년에 계획적으로 조림을 해 놓았는지

줄이 잘 맞추어 자라고 있어 보기에도 좋다.

 

눈 덮힌 남장대에 오르니 먼저 와 있던 어느 나이 든 부부가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는지

나를 반기며 사진 좀 찍어 달라 한다.

그 연세에 이렇게 산위에 올라와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강화에서 몇 십년을 살았다는 할아버지의 억양에서 생기가 돈다.

 

남장대를 내려 오는 길이 미끄러워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내 등산화가 밑바닥이 닳아서인가?

인천대교 개통 전 날 걷는다고 산 트레킹화인데 3년간 주인이 고달프게 했는지 밑바닥이 평평하고

여기 저기 이음새가 벌어져 어젯 밤에 강력 본드로 붙이면서 조금만 더 신자 했었는데..

 

이런 눈 언덕길에서 비료포장지를 엉덩이에 깔고 내려가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에는 배낭 속에 하나 챙겨둘까?

 

산을 내려오니 인적 없는 빌딩의 주차장에 쌓여 있는 눈 위에서

동심을 즐기고픈 나이 많이 든 어린이가 발자국으로 넓은 네잎클로버를 만들고 있다.

어차피 살다보면 행운은 내가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까...

 

다시 차가 다니는 도로로 내려왔다.

높은 빌딩의 웨딩 부페와 도로에서 줄지어 서 있는 차들을 보니 다시 산 위로 올라가고만 싶다.

 

차도를 가로 질러 둑길을 따라 가다 보니 늦게 내려온 일행 몇 명이 안 보인다.

분명히 시야가 훤하여 오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어디 갔을까?

여기 저기 전화로 때려 보는데 길을 가고 있단다.

누군가 차도를 가로 질러 와야 하는데 그냥 차도를 따라 갔나 보다

가다 보니 둑길과 도로길이 저 끝에서 만나고 있다.

 

어느 서울교회 수련원인 '나무들의 집'의 인적없는 쓸쓸함을 지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은 버려진 담배잎 건조장 흙집이 몇 개월이 지나도 그대로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이젠 배고프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긴 이 추운 길을 3시간을 걸었으니 많이 걸었다.

예약된 식당에 들어가니 이미 우리를 위해 매운 갈비찜이 기다리고 있어

모두 배고픔에 젓가락을 들었으나 금방 너무 맛에 갈비가 찬 밥되고 말았다.

대신 구수한 국물의 칼국수와 추가로 시킨 파전이 더 맛있어 그걸로 포식했다.

군청에서 나온 분이 올해의 마지막 정기걷기라며 기분으로 막걸리로 한턱 쓰신다.

좋다...기분이 좋다..

 

거의 모든 테이블마다 갈비찜을 그대로 둔 채 일어서 나와 다시 숲길을 걷는다.

하늘로 죽죽 뻗은 나무들 숲을 지나 잘 다듬어진 어느 묘지 앞에 둥그렇게 모여

노래로 여흥을 즐긴다.

 

내가 오늘 길 걷는다 했더니 누군가 주문을 했다.

겨울에 어울리는 가곡 하나 불러달라고 해서 어제 악보를 뒤지다가 선택한

이수인씨의 '고향의 노래'를 하고 앵콜로 모두 힘을 내라고 You raise me up을 불렀더니

다른 이가 햇살이 참 맑다며 이태리 가곡 '오 솔레미오'를 열창하는데 거의 성악가 수준이다.

흠..좋은 노래 벗이 생겼네..

 

길을 가다가 이상한 나무 하나 발견

큰 참나무 하나가 옆에서 쓰러지고 있는 나무에게 자기 가지를 내어 주어

나무가 기울어 진 채로 버티고 있다.

 

마치 강화도령과 분이의 사랑처럼 이 나무도 아름다운 스토리 텔링감이라며

이런 곳을 많이 만들어 사람들이 찾아 오게끔 해야 한다며 얘기에 열을 올린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왔다.

인적 없는 철종 외가에 우르르 몰려 들어가 마루에 걸터 앉았다.

눈 덮힌 마당에 발자욱 무늬를 만들고,

지붕의 눈이 녹아 처마 끝에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 겨울 속의 낭만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오늘 깊은 겨울 속의 의미있는 하루를 보냈다.

그 어느 겨울 행사보다 더 기분좋게 하고

직장의 송년회를 비싼 돈을 들여 좋은 레스토랑에서 갖는 것보다

이런 자연의 길을 같이 걸으며 가진다면 오래 오래 추억에 남고

더 값진 송년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램이 있다.

 

오늘 올 한 해 동안 지저분한 마음들이 눈 속에 다 덮히어 녹아 버렸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