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2013년 새해 첫날 걷기 (나들길 1코스)

carmina 2013. 1. 1. 22:47

 

2013년 새해 첫날..

 

그러니까 지난 해 말 아들이 식사를 하며 묻는다.

새해 첫날 계획있어요?

아니 없어. 그냥 쉴라고...

걸으러 안가요?

쉬는 날 걸으러 가니 엄마가 자꾸 눈치를 주는 것 같아.

그럼 나랑 가요.

네가? 네가 걷는다고?

네.. 한번도 걷지 않았지만 걸을 수 있겠지요.

 

좋다..좋다..

아들과 아빠가 단 둘이 여행을 떠나 본 것이 몇 년전이던가?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개교기념일로 평일 수업이 없는 날이면

내가 일부러 직장에 하루 휴가를 얻어 둘 만이 춘천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날은 일부러 아이에게 절대 '하지마라'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떠나 보곤 했었다.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은 아들이기에

대학시절 공부를 제법 하니 유학을 다녀 오라해도 마다했고 

매년 방학이면 해외여행 다녀 오라고 내가 종용할 정도였다.

그런 아들이 나랑 떠나겠다고?

1일날 아들과 같이 걷기 떠나겠다고 하니 아내도 굳이 싫은 표정은 짓지 않고

본인도 따라 나설까 하다가 아들과 아빠 둘만의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듯 싶은지

둘의 여행을 허락해 준다.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오니 새벽 2시.

아들과 걷기 여행떠난다 생각하니 마치 소풍가기 전날 잠 못자는 어린애같아 잠을 설쳤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창가를 보니 밤새 눈이 많이 왔는데 차가 엉금엉금 기고 있다.

그래도 도로는 차가 다닐 정도라 내 차로 강화나들길을 가기로 했다.

 

비록 송구영신 때문에 1일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왔지만 아침 9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고 했고

나는 옷도 배낭도 다 준비하고 기다리는데도 아들은 그 시간에 머리를 말리고 있다.

오늘은 아무 얘기 말자.

 

나는 창 밖에 펼쳐지는 하얀 설원에 관심을 갖고 얘기하고픈데

클래식을 전공하는 아들은 강화까지 가는 동안

마침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와 베르디 오페라를 주제로 잡는다.

하긴 나도 이런 음악이야기라면 밥보다 더 좋아한다.

그렇게 1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강화도가 섬인지도 모르고 어디 붙어 있는지 조차 관심이 없는 아들이기에

지금 대학원을 다녀도 강화의 역사에 대해 무지함은 당연하다.

그런 아들에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강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강화가 우리나라의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곳이라것도 쉽게 설명해 주었다.

 

겨울 걷기를 위해 필요한 아이젠이나 스패츠, 스틱 등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그런 것도 설명해 주고 같이 어젯 밤에 사러 다녔다.

그러나 저렴하게 쓸수 있는 아이젠이 없기에 김포인근에 있는 아웃도어 용품 샵에서

살 수 있으려니 했는데 오늘이 1일이라 그런지 문 연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강화터미널에서 늘 걷기 전 음료수와 간식을 사는 상점의 가게 아저씨가

걷기 동호회이기에 사정을 얘기하니 주저하지 않고 본인의 아이젠을 빌려준다.

 

어제 일기예보에 오늘 무척 춥다해서 옷을 껴 입었는데 그게 불편할 정도로 날이 푸근하다.

특히 바람이 안 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 선택한 코스는 나들길 1코스

강화의 역사의 흔적들이 제일 많은 곳이고, 그런 교육적인 것 외에

숲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시간이나 날씨 때문에 중간에 그만 두어도 다시 터미널로 오기 편하다.

또 중간에 맛있는 식당이 있어 좋은 먹거리 여행도 된다.

 

길에 눈이 미끈 미끈.

동문으로 올라가는 길의 도보는 완전히 눈으로 덮여 있어 어쩔 수 없이 차도로 걸어간다.

순간 아들이 거부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아들은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이 삶의 기본이라 생각하기에

차가 뜸한 집앞 도로도 횡단보도가 아니면 건너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그 원칙도 포기한 것 같다.

 

토끼풀로 덮여 있어야 할 동문 앞마당은 흰 눈이 차지하고 있다.

설경이 좋아 아들보고 사진찍으라 했더니 선선히 포즈를 취한다.

사진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오늘은 아빠를 위해 인심쓰는건가?

 

동문앞을 지나 600년 묵은 느티나무로 가는 골목길에 동네 사람들이 집 앞의 눈을

깨끗하게 쓸어 놓아 편하게 걸었으나 마을앞을 지나니 다시 눈천지.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는 기분이 좋다.

 

지난 해 연이은 3개의 태풍에 커다란 가지하나를 잃어 버린 느티나무를 설명해 주고

다시 밭길을 걸어 성공회성당으로 가는 길을 찾는데, 길이 없어졌다.

공사중인가? 어쩔 수 없이 도로로 다시 나와 걸었다.

 

성공회 성당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고 고려궁지앞을 지나    

마을길로 들어서니 지붕에 고드름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다.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려진 연탄재.

우와... 천연 재래식 제설용품인 연탄재.

어릴 때 눈온 날, 집 앞 골목길에 연탄재를 안 뿌려 놓으면

어른들에게 혼나곤 했다.

 

휴일이고 방학하여 아무도 없는 강화여고와 그 옆 향교가 아직 눈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동네 앞에서 아이들은 눈 싸움을 하고 있고

담벽에 그려진 진달래 꽃 그림이 오늘은 참 어색해 보인다.

 

1시간 쯤 걸었나?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라 아이젠를 착용하느라 약수터에서 잠시 쉬는 동안

아들은 비상식량으로 사 놓은 빵 한 개를 뚝 딱 해 치운다.

약수터내에 있는 빨래터의 고인 물에 푸른 이끼가 공포영화처럼 끼어 있고

수면 위로 흰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르고 있어 겨울의 운치를 더해 준다.

 

산길로 올라간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등산화를 신고 눈 덮힌 평지를 걷는 것보다

아이젠을 낀 채 올라가는 산길이 더 편하다.

떨어진 낙엽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텁게 덮힌 눈길.

언덕으로 향하는 하얀 곡선이 예술이다.

 

하늘을 향해 주욱 주욱 뻗은 나무들과 발자국만으로 알 수 있는 등산로.

나들길에 최근에 이정표를 새로 해 놓아 비상시에 연락할 수 있는

관련 기관 전화번호와 위치정보를 새겨 놓은 것을 보니 반갑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 조금 부러워 했던 이정표 시스템이었는데..

그래도 이 나들길에사람들이 많이 찾아 주니 이런 혜택이 있겠지?

 

긴 능선길을 따라 끊임없이 감탄하며 걷는다.

가끔 가지 위에 얹혀 있던 눈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우수수 떨어진다.

이 능선길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쯤에 북문에 도착하니

몇 사람들이 사진찍기를 즐기고 있다.

 

날씨가 안 좋으면 북장대를 오르지 않고 바로 오읍약수로 향할려 했는데

오늘은 아들도 기분좋은 것 같아 조금 힘들어도 북장대를 오른다.

이 가파른 언덕 길은 아이젠도 없이 없이 올라가고 있는 여자들이 있고

북장대의 성벽 위를 걸어가고 있는 조금 몰상식한 사람도 있다.

 

북장대에 오르니 아래로 보이는 온 천지가 백색 세상이다.

멀리 염하강 저편으로 보이는 북녘땅도 흰 눈으로 곱게 장식되어 있다.

산 위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눈이 더 많이 쌓여 있고

이젠 우리 걸음도 쌓인 눈을 피하고 걸을 수 없을 정도이다.

 

북장대에서 내려 가는 길에 나이 든 아저씨 한 분이 올라오고 있다.

우리가 그 길을 내려가면서 발자국을 보니 오늘 이 길로 내려 간 사람은 없다.

아이젠으로 비탈길을 걸어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아

아무 곳이나 푹푹 빠지며 발을 내 딛는다.

이 길을 걸을 때 잠시 쉬었던 잘려진 나무의 그루터기에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눈이 내리듯 나무 위에 있던 눈들이 바람에 쏟아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지난 여름에도 이 길은 숲이 우거져 무척 환상적이었다.

 

오읍약수터에서 잠시 쉬고, 다시 길을 걸어 마을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작은 빨래터에도 인적이 없고 높은 나무 가지 위에 눈송이들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우수수 눈이 떨어질 것같이 간신히 매달려 있다.

 

대월초교 가는 인도에 누군가 눈 길을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놓아 기분이 좋았는데

멀리서 제설차량이 오면서 도로의 눈을 쓸어 버리니 도로에 있던 눈들이

인도로 밀려와 깨끗하게 쓸어 놓았던 눈 길이 도루묵이 되어 버려

아들과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도 지나가지 않는 길을 걸으니 눈이 푹푹 빠진다.

아마 이 길을 처음 걷는 사람들은 길 찾기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표시된 이정표는 이미 눈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아래에 신경쓰다 보니 나무에 매달린 이정표 리본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나들길 벽화를 그려 놓은 터널을 지나니 매어 있지 않던 동네 강아지가

심하게 짖으며 우리를 따라 온다.

아들에게 절대 겁먹거나 관심보이지 말라 했다.

그냥 길을 걸어야 개가 덤비지 않는다고..

 

다시 숲길로 들어 선다.

소나무가 빼곡한 길에는 길에 떨어져야 할 눈이

소나무 가지위에 쌓여 가지들이 눈 무게로 밑으로 축 쳐져 있고

조금 더 많이 오면 가지가 부러질 정도이다.

 

그런데 이 숲길 부터는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동물들의 발자국만 선명하게 보인다.

언젠가 이 곳에서 고라니를 보았는데 혹시 오늘도 볼 수 있을려나..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눈 덮히기 전의 발자국의 흔적을 찾는 수 밖에 없다.

가끔 헷갈리기 쉬운 길에 동물들의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 가면

전혀 다른 길로 빠질 수 도 있다.

 

잠시 선 채로 물 한모금 마시는 순간 아들이 갑자기 소리치기에

얼른 바라보니 작은 고라니 한 마리가 시야에서 멀어진다.

 

고라니 발자국이 이어지다가 어느 곳에서는 고라니가 바닥을 먹이를 찾아 입으로 헤집었는지

풀 숲을 뒤적인 자국이 선명하다.

그런데 어느 흔적은 고라니 발자국같지 않고 작은 동물이 몸으로 기어간 흔적도 보인다.

무엇일까? 무엇인지 분명 몸집이 작고 걸으면 몸집에 땅에 닿는 작은 발을 가진 동물일 것이다.

 

긴 숲속의 눈 길에 누군가 버려 놓은 의자 세 개에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 운치를 더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걷는 기쁨.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의 기쁨이랄까?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 오던 말던 눈 길을 헤치며 걸었다.

 

이제 걸은지 3시간 오늘의 여정이 거의 끝나간다.

아무래도 신발이 젖고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 양말이 젖어 더 걷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남은 길은 넓은 평원을 걷는 지루한 길이 될테니 아들보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자 하니 얼른 그러자고 대답한다.

 

내가 더 걷는다 하면 걸을 수 있다 한다.

한번도 긴 길 안 걸어보았지만 나이가 있으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배가 고파 연미정 할머니집이 오늘 장사를 할까 하고 문을 슬며시 여니

난로가에서 술 한 잔 하시던 동네 아저씨가 식사 된다며 대신 알아 봐 주고

할머니는 식사는 밥을 새로 해야 하니 30분 뒤나 가능하다기에

우린 연미정에 다녀 올테니 준비해 달라 하고 연미정으로 올라가니

멀리 민통선 벌판이 한적해 보이고 바다에 유빙이 수없이 많이 북으로 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곳의 유빙은 남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한 곳에서 이렇게 물결의 방향이 다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멀리 염하강 건너편 황해도 개풍산에 비록 흐린 날씨지만 선명하게 숲이 보이고

조각난 유빙들이 서로 다른 길로 흐르고 남북관계도 서로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어

현실을 조명해 주는 듯 하다.     

 

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가니 양은 냄비에 김치찌게와 조기찌개가 먹음직 스럽고

우리를 위해 별도로 준비한 양은냄비속의 공밥을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식사를 마칠 무렵 누룽지까지 만들어 내오는 할머니가 고맙기만 하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도 식사비는 인당 5000원.

 

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기에

택시를 불러 도심으로 오는데 그 사이 도로의 눈은 다 녹아 버렸다.

 

이제껏 많은 날들을 여러 군데 걸어 보았지만 오늘같이 눈이 많이 쌓인 길을 걸어본건

처음인 것 같다. 최근 금요일 마다 눈이 와서 매번 가슴이 설레었는데

오늘 그 조바심이 다 해소된 것 같다. 아니다 아니다. 눈이 마구 쏟아지는 날

한 번 더 걸어야겠다. 그래야 해소될 것 같다.

 

신발의 눈을 털고 차의 시동을 켜니 베토벤의 나인심포니의 2악장이 에프엠에서 흐르고 있다.

아들은 피곤했던지 차에 올라타자마자 잠에 빠지고 나는 환희의 송가를 즐긴다.

지난 밤 송구영신 예배의 찬양대에서 편곡한 이 곡의 솔로를 맡아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했는데 이젠 오늘 아들과 걸은 눈길의 환상에 젖어 환희의 노래를

마음 속으로 힘껏 따라 부른다.

도로는 눈이 녹아 운행하기 불편했지만 내 기분은 환희의 기분으로 드라이브하여

5악장의 프레스토 리듬이 끝날 때 쯤 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환희의 날이다.

올해가 그리고 내 인생이 오늘같이 환희의 날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