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봄이다

carmina 2013. 1. 27. 00:11

 

 

2013. 1. 26일 강화 나들길 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

 

 

지난 해 12월 초부터 한반도 전체에 밀려 든 혹한이 해가 넘어가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렇게 오랜동안 추웠던 적이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살 때이후로 처음인것 같다.

그리고 주말마다 내리는 눈. 그 눈 때문에 토요일 걷기가 행복했고

매주 토요일마다 기대가 되었는데 소한때부터 내린 폭설이 대한에 와서야

기세를 멈추고 눈이 비가 되어 그동안 쌓인 눈의 높이를 조금 낮추고

땅을 조금 질퍽하게 하더니 다시 또 강한 추위가 밀려 들었다.

 

잠시 따뜻해 졌다가 다시 추워져서인지 이번 토요일은

몇 주 전의 혹한보다 조금 덜 춥긴 해도

바람이 불어 영하 12도라 하지만 거의 영하 18도 수준의 체감온도를 기록한다.

평소 아무리 추워도 경고 글까지 오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하루 전에 지병이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따뜻하게 입고

완전무장을 하고 참가하라고 주의 글까지 올라왔다.

 

강화를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미리 추위에 주눅들까봐

일부러 차를 가지고 나들길로 나섰다.

이렇게 추운 날인데도 모인 인원이 무려 35명 정도.

참으로 대단한 열성들이다. 모두 모두 두터운 옷으로 꽁꽁 감싸고도 모자라

얼굴까지도 마스크와 모자로 눈만 겨우 보일 정도로 랩핑해 놓아

마치 테러리스트들이 모인 것 같았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나이 칠순을 넘은 분들이 부지런히 우리 걷기에 동참하고 있어

건강은 부지런하게 움직여야만 유지되고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들길 4코스는 전체 15코스 중 제일 짧은 코스로 12Km도 안되는 거리라

약 3시간 반 정도면 여유있게 걸을 수 있고 나 혼자 걸을 때는 2시간도 채 안 걸렀었다.

 

나중에 돌아오기 쉽게 강화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시내 버스편으로 모두 출발점인 강화허브향기에 도착하니

모두 추워서인지 영업을 해야 하는 가게 안으로 밀려드느라 좁은 가게안이

등산복 입은 사람들로 가득차 버렸다.

 

비록 춥지만 둥그렇게 모여 잠시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길을 나서는데 얼었던 눈이 녹고 땅일 질퍽해 졌었는데 그대로 얼어 붙어

마치 탱크가 지나간 것 같은 톱니바퀴 자욱이 오히려 걷기에 편하게 만들었다.

 

길을 걷다 보니 숲 속에 시체가 즐비하다

우선 나무들이 모두 빛을 잃어 버려 회색빛 숲이 되고

지난 가을에 떨어졌던 밤송이들의 날카로운 가시가 힘이 없어지고

밝은 빛을 보여야 할 길가의 야생버섯도 그 색깔을 추위에 모두 뺏겨 버리고

농부가 애써 가꾸어 놓은 푸른 파 줄기들은 모두 펄펄 끓는 냄비에 넣어 푹 익어 버린 듯

흰 빛으로 변해 버렸다.

 

추위를 느끼는 체감온도는 아마 이제껏 길 걷기를 시작한 이래 제일 추운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도 바람이 생각보다는 조금 심하게 불지 않고 숲 속으로 들어가니 편안해 졌다.

 

가이드 하는 분의 가릉에 대한 유적지 설명을 듣고

예전같은면 가릉에서 사진 찍는 여유도 부릴 법 한데

오늘은 워낙 추우니 모두 길 떠날 생각만 한다.

 

숲이 모두 빛을 잃어 버려 평소 확연히 보이던 오솔길도 이 길을 자주 걷는 사람이 아니면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게다가 군데 군데 땅을 파고 공사를 한 곳들이 있어 혼자 왔으면 알바 좀 할 뻔 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여기 모든 길들이 눈으로 덮혀 있었지만 오늘은 길 옆이나 숲 속에 조금씩

그 밝던 흰 빛을 잃고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많던 눈들이 모두 어디로 스며 들었을까?

아니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증발했을까?

 

길을 걸으며 느끼는 건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산소에 대한 마인드가 바뀌고 있음이 보인다.

이전까지 개인 당 하나씩 가지려 하던 산소의 봉분을 이제는 그 자리에 납골당 식으로

여러개의 서양식 비석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아 앞으로 자연의 훼손이 조금은 늦춰질 것 같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얼어 버릴 듯한 강한 추위에도 계곡에는 눈이 녹은 물이 흐르고 있고

어쩌다 우연히 발견한 목련나무에는 하얗게 움이 트는 것을 보며 행복해 했다.

 

이런 강추위에도 걷는 길벗들의 표정은 모두 밝다.

도심 속에서 이렇게 추운 거리를 걸으면 저렇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자리에서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연과 길벗들 뿐일텐데..

자신에게 이렇게 견디기 힘든 추위에도 도전을 하는 만족감과 성취감도 있겠지..

 

정제두 선생 묘 앞에서 간식을 나누어 먹는데 서로 서로 챙겨 온 간식들이

가지 가지 종류로 풍성하여 입이 즐겁다.

워낙 추우니 약수터 앞에 있는 화장실도 얼어 붙었나 보다. 

이전같으면 약수터에 모여 사진도 찍고 물도 마셨을텐데 오늘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어야 하는 벤치 앞에는 색깔잃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밀려와

눈처럼 푹신하게 쌓여 쓸슬한 벤치를 위로하고 있다.

 

이 약수터에는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 벽에 써 있다.

"자유로운 영혼"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그리고 몇 년 전 내가 배우다 만 첼로를 연주하는 그림까지...

 

인적없는 마을에 부지런한 할머니 한 분이 밭에서 작은 나무 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셨을텐데도 머리를 들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마을을 지나니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바다 건너 큰 섬이 우리 입을 탄성짓게 하니

이 맛으로 길을 걷는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이지만 왜 그리 늘 새롭게 보여지는지..

 

그러다가 문득 앞서 가던 무리들이 어느 집 앞에서 무언가를 스마트폰으로 사진찍느라 바쁘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무 것도 특이한 것이 없는데 무엇이 저런 관심을 받을까 하며 가서 보니

아! 세상에 이 추운 겨울에 나무 가지에서 싹이 움트고 있다.

이게 무슨 나무인가? 싹에서 하얀 솜같이 솟아 나고 있다.

생명의 신비함이여. 

이전에 호주에서 불타 죽은 줄 알았던 나무꼭대기에 파란 싹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또 한 번 감탄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춥다고 엄살을 떨어도 봄은 기어코 오는구나.

이 사진을 잘 찍어 볼 수 없을까 하고 연신 카메라를 눌러댔다.

바로 그 옆에는 생선을 어망에 넣어 햇빛에 말리고 있고

흙벽도 무너지고 창문도 다 깨져버리고 부서져 버린 다 쓰러져 가는 집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지난 해 추수하고 남은 베어져 길 가에 버려진 포도 나무 가지들 사이에

미처 농부의 눈에 들지 못하고 썩어져 가고 있는 포도송이들..

그 모습들이 얼마나 평안해 보이는지..  

그렇게 내 삶도 인생을 살고 나이들면 버려지고 썩어져 갈테지만

생명있을 때 열심히 살고 나중에 어쩌다 나같은 이의 눈길을 끌 수 있으면 좋겠다.

삶. 삶. 삶.

 

숲길, 마을길이 끝나간다.

잘 다듬어진 산소 앞에서 리딩하는 이가 내게 노래를 부탁한다.

오늘은 무슨 노래를 할까 생각하다 문득 앞서 가던 이의 배낭에서 달랑거리던

명찰의 아이디에서 오늘 불러야 할 노래가 생각났다.

 

그리고 가사를 생각해 보니 우리같이 길을 걷는 사람에게 좋을 것 같아

7080세대의 가수인 '현경과 영애'가 불렀던 '그리워라'를 불렀다.

 

햇빛 따스한 아침 숲속길을 걸어가네.
당신과 둘이 마주 걸었던 이 정든 사잇길을

보랏빛 꽃잎 위에 당신 얼굴 웃고 있네.
두 손 내밀어 만져 보려니 어느새 사라졌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 날들
꽃잎에 새겨진 사랑의 이야기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 날들
지금도 내 가슴엔 꽃비가 내리네.

 

그 당시 노래말들은 참 아름다웠는데 요즘은 왜 그리 공격적인 가사와

영어가사를 삽입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바다가 보인다. 섬이 보인다.

열심히 바다로 나갔던 배들이 모두 얼어붙은 바다처럼 나루터에 묶여 있다.

바닷가에 쉼터도 있건만 그냥 패스.

밝은 햇살에 비치는 겨울 바다는 은빛으로 빛나고

구름 한 점 없는 시린 듯한 하늘로 뻗는 나무가지가 모두 투명하게 보이는 날이다.

길을 걷기 보다는 차라리 하늘을 걷고 싶다.

 

얼어붙은 갯벌 틈으로 스며든 바닷물위에 오리들이 옹기 종기 모여 바다를 향하고 있다.

저 녀석들이 동시에 하늘로 날아 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훠어이 훠어이 하며

외쳐 보았지만 조금 날으는 척 하다 말아 버린다. 에이~~

 

자연은 스스로 신비로움을 만든다 했던가?

바닷가에 겨우내 어름들이 녹았다 풀렸다 하며 저절로 만들어진 얼음덩어리가

마치 우주에서 날아와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비행체같이 기괴한 모습을 만들었다.

 

긴 긴 바닷가 도로를 걸었다.

4코스의 단점은 밋밋한 아스팔트를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앞을 보며 아스팔트를 걷기 보다는 왼쪽의 석모도를 보며

바다를 보며 걷는 즐거움도 있다.

특히 여름철에는 페리호에서 쏟아져 나오는 차량들의 행렬과

페리를 감싸고 돌며 새우깡을 받아 먹는 갈매기들의 무리들이 보는 재미가있다.

 

숲길보다는 바닷길이 더 춥다.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재잘거리던 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렇게 추위를 이겨 낸 겨울걷기가 끝이 났다.

외포리 인근 식당에서 평소보다 그다지 맛이 없는 꽃게탕을 먹고

일찍 끝났으니 이 겨울에 활활타는 난로가 있는 그린 할러데이라는 카페를 찾아

일행들끼리 맛있는 커피와 갓 구운 빵을 먹으며

이제까지의 즐거웠던 걷기 추억과 앞으로 떠나야 할  걷기 게획을 이야기하며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는 동안 문득 카페 창문 넘어 목련나무에

팝콘만한 흰 목련화가 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가 외친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