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 성곽길)

carmina 2013. 2. 24. 22:07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고려궁 성곽길이라고 불리우는 강화 나들길 15코스

 

지난 해 강화 나들길이 몇 개의 코스를 새로 개발했다.

강화는 고려시대에 국가의 수도가 천도를 한 중요한 곳이기에

지금 서울의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처럼 도시를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의

성곽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중세시대 유럽처럼 성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강화에도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있다.

다른 몇 개의 코스를 지나가며 이 문들은 모두 지나가 보았지만 이 문들을 이어주는

성곽길을 한 꺼번에도 걸어보는 기회를 갖고 싶어 이번 토요일은 무척이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음에도 나들길 정기도보에 신청을 했다.

 

금요일 아침에 회사를 출근하기 위해 나서는데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을 밟으면서 내일 걸어야 할 눈길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그래서 발길이 가벼워졌는지 그만 눈에서 미끄러져서

오후부터 발목이 시큰거려 어쩔 수 없이 파스를 붙이고 토요일 길을 나섰다.

 

오늘 걷기에는 유난히 새로 참석한 길벗들이 많이 보인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께서 나이든 아들과 함께 오셨고

일산에서 걷기 동호회원들이 무더기로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평소의 배나 되는 60명 정도의 길벗들이 긴 열을 지어 산길로 올랐다

 

눈은 많이 쌓여 있지만 남문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이젠을 착용할 만큼 미끄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작부터 가파른 언덕 길을 올라가니 숨이 가쁘다. 나만 그런가?

강화길의 특색이라 함은 잘 다듬어져 있지 않은 길이라 하겠다.

지리산 둘레길은 마을 사람들이 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길이라 하고

제주도 올레길은 어부들이 바다일을 하고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라 한다면 

강화 나들길은 시골 어른들이 이웃집 마실 갈 때 다니던 길을 따라 걷고,

허리가 굽어진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길이다.

그래서인지 나들길의 높은 곳에 올라가면 군데 군데 마을의 모습들이 발아래

살포시 자리잡고 있다.

 

이전같으면 성곽옆에는 마을이 없었을텐데 이젠 성곽은 단지 성곽일 뿐

마을은 성곽과 함께 공존한다. 성곽과 함께 밭이 있고, 주택의 울타리가 있다.

 

남문의 성곽길을 따라 계속 걸을 것 같았는데 길은 눈 쌓이 숲길로 이어진다.

죽죽 뻗은 나무들 사이로 난 남문안길로 어어진다.

모든 나무가 빛을 잃어 무색인데 남문안 길의 어느 밭을 둘러싼 탱자나무의 가시는

'서슬 퍼렇게' 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로 길가는 나그네를 경계하고 있다.

 

남문안길로 가던 이정표는 청하동 약수터가는 길로 이어지는데 이 길이 가히 환상적이다.

나무들 사이로 난 이런 능선 길로 한없이 걸어간다면 인생이 행복할 것 같다.

비록 양지바른 곳에서는 눈이 녹아 걷기에 약간 불편하지만

언덕 위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같이 모두의 얼굴이 밝게 빛난다.

 

다른 나들길은 마주 오는 사람을 별로 볼 수 없는데

이 곳은 약수터가 있고, 그 곳에 쉼터와 운동기구가 있어 이미 아침을 즐긴 사람들이

마주 내려오면 인사를 전한다.

 군 시절 휴가나오면 어머니가 오랜만에 집에 오는 아들을 위해

이불과 요를 깨끗하게 빨아 빳빳하게 풀을 매겨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신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눈부신 흰 요처럼 넓은 약수터와 앞 마당에 흰 눈이 펼쳐져 있어 기분이 좋다.

 

간식을 즐기고 다시 나서는 길도 역시 눈 쌓인 숲길이다.

이렇게 좋은 길을 왜 제일 늦게 개발했을까?

마치 좋은 술은 나중에 내 놓는 것 처럼 숲의 진가를 알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일까? 

흰 눈이 쌓인 언덕 길에 벌목한 나무를 운송하기 위한 듯 보이는 레일이

산꼭대기부터 산아래 저 마을까지 이어져 있는 듯 하다.

길 옆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이 있어 몸 자국을 남기고 싶어

배낭을 멘 채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아차...그만 카메라를 목에 건 것을 잃어 버리고 엎어져 버렸으니

카메라가 모두 눈 범벅이 되어 버렸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걷는 길이 눈에 익은 듯하여 주위의 지형을 보니

강화도령길로 가는 길에 있는 남장대로 오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코스는 몇 개의 코스가 기존 코스와 겹친다.

남장대와 북장대 올라가는 길, 서문 가는 길, 고려궁지 가는 길, 국화리 저수지 등등..

 

남장대로 올라가는 길은 튼실한 숲이 양 옆으로 펼쳐져 있고

길도 완만한 곡선이라 최고의 기분을 누린다.

그 숲 사이를 일렬로 걸어가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장관이다.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대는 것 같다.  

잘 다듬어진 남장대. 2010년에 보수하여 이젠 마치 새로 지은 듯한 정자의 모습이다.

멀리 눈덮힌 강화벌판과 마을이 보이고 가슴이 탁 트인다.

남장대에는 산불 감시초소인것 같은 초소가 있는데 그 안에

산지기가 우리 모습을 보며 신기해 한다.

 

남장대위에서 모두를 위해 준비한 가곡을 불러 주었다.

옛날은 가고 없어도...

미리 가사를 읽어 주어 성곽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새기게 했다.

그리고 밀리는 앵콜로 젊은 시절 강화에 와서

중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노래 '눈 오는 저녁'을 부르고는

혹시 여기 강화에 나보다 6 ~ 7 살 어린 사람들이 어쩌면 내게 이 노래를 배웠을거라고

얘기해 본다. 설마 배웠어도 모두 다 잊었겠지.  추억은 그렇게 잊혀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추억은 늘 새로 덧칠해 나간다.

나는 그 잃어 버리는 추억이 아까와 이렇게 여행 후 늘 글을 적는다.

먼 훗날 내 여행기를 읽으면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남장대를 내려와 이전의 강화도령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는데

이 곳은 공동묘지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강화를 다니면서 공동묘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올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인지 묘지 사이의 길들이 많이 파여져 있어

아마 올 봄의 한식때는 묘지를 손 봐야 할 것같다.

아래로 내려 올수록 눈이 녹은 곳에 낙엽이 쌓여 있고

그 밑은 녹은 눈에 젖은 흙이 미끄러워 사람들이 조심 조심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큰 길로 내려 오니 5코스에 걸었던 국화리 저수지의 흰 벌판과 만나게 된다.

이제는 밑에서부터 서서히 얼음이 녹아 내리는지 저수지가의 조금씩 물빛이 비친다.

국화리 저수지 옆에 있는 작은 주택의 주인이 부럽다.

 

거리에 나와 대로에 있는 서문쪽에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 들어가자 마자 바로 식사 시작.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만한 식당이 있으니 다행이다.

일부러 처음 길을 걷는 사람들 옆에 앉아 강화나들길의 매력을 말해 주기도 한다.

 

이젠 북문을 향해 간다.

이젠 코스를 보지 않아도 뻔히 알 것 같다.

강화여고 뒷산과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눈이 녹는 야산에는 낮의 온도가 조금 올라가면 질퍽거려서 

거의 걷지 못할 지경일 것 같다.

1코스 중의 멋있는 코스 중의 하나, 강화 여고 뒷산.

이 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마음에 든다.

푸르는 리기다소나무와 울창한 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좁은 오솔길을 앞서 가는 낯선 이들이 도란 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오늘은 의도적으로 여기가 북문임을 확인하고 걷는다.

북녘을 바라 볼 수 있는 북장대로 올라가는 길.

성곽을 따라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눈 덮힌 경사진 길이 있다.

모두들 계단으로 올라갈 때 난 일부러 눈 길을 걷는다.

 

북한땅이 시원하게 보이는 북장대위에 오르니

오늘은 시야가 좋아 멀리 함경도 개풍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저 건너 세멘트 장벽도 보이는 듯 하다.

주의 깊게 보며는 북쪽의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다.

강 하나를 두고 마치 남북한이 국민소득 차이 나듯이 산의 나무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 곳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목놓아 불렀다.

몇 년 전 유명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불러 평화음악회라는 타이틀로

잠실 대 운동장에서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 공연을 할 때 우리 합창단 및 몇 개 합창단이

 파바로티와 함께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기로 했기에 열심히 연습했는데

공연 하루 전에 그만 곡이 바뀌어 버렸다.

이 노래를 부르면 북한을 자극시킬 수 있다나...

참 어처구니 없는 정권같으니라고..

결국 파바로티와는 '나의 살던 고향'을 불러야 했다.

 

북장대에서 사진을 찍고 좀 오래 쉬었다.

아니 쉬었다기 보다는 이 곳을 즐겼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곳. 북장대.

 

1코스는 북장대에서 내려와 연미정쪽으로 가야 하는데

15코스는 북장대의 이어진 길을 가야 한다.

아직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이었는데 북장대의 긴 성곽을 따라 가다가

모두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저 산 아래로 강화 마을이 있고 그 너머에 잔설이 남아 있는 낮은 산이

가로 막고 있다. 마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꼭대기에 와 있는 것 같다.

이태리 콜롯세움의 꼭대기에서 보던 웅장함,

미국 그랜드 캐년의 꼭대기에 바라보는 협곡, 그리고

스위스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 융프라우 꼭대기에서 느끼던 가슴 벅참이 밀려온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비스듬한 경사.

이 곳에 푸르름이 가득 차면 어떤 모습일까?

올 여름에는 일부러 이 곳의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와야 할 것 같다.

고려궁지로 가는 길에 작은 조약돌로 덮힌 길을 만들어 놓아 발 마사지에 좋을 것 같다.

그 곳에 벤치가 있어 쉬다 가고 싶지만 가는 곳 마다 다 쉬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지나친다.

한 여름에선 이 곳에 누워 낮잠도 자고 가리라.

 

언덕을 넘어가니 고려 궁지의 뒷산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고려궁지만큼이나 대문을 만든 이래로 몇 십면 아니 백년이 넘는 기간을 손을 보지 않은 듯한

대문이 있는 집에 기와 지붕밑의 흰 회벽에 목숨 수(壽)를 써 놓았는데

그 글자도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고 있다.

하얀 강아지 몇 마리가 노는 집에 담장의 울창한 덤불이 있어 여름엔 가히 장관일 것 같다.

 

그렇게 역사가 골골히 스며 있는 동서남북 성곽길들을 한 바퀴 돌고 동문앞에 서니

역사는 돌고 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곽도 역사의 한 부분이고, 나도 역사의 작은 점으로 이어간다

내 삶의 역사를 누군가 다시 돌아 볼까?

 

15코스를 마친 날은 아버님의 추도일이라 저녁에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971년 일동제약이 아로나민을 선전할 때 테마 광고로 '의지의 한국인'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우리나라 제철 산업의 산 증인이셨던 아버님은 그 시리즈의 첫 번째 광고모델이셨다.

 

나의 역사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봐왔기에 잘 알겠고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역사는 들려주지 않으면 모른다.

오늘 성곽길을 걷기 위해 강화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뒤져 보는 기회를 가졌다.

 

오늘의 길이 눈 앞에 삼삼히 어느 초록이 우거진 날 다시 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