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여기저기 코스

태백 하늘길

carmina 2013. 5. 4. 00:41

 

2013년 5월 1일 근로자의 날

 

나 만의 휴일. 근로자의 날

난 매년 근로자의 날이 다가오면 이번엔 어디를 혼자 떠나볼까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업무 때문에 하루 전 저녁에 떠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당일 다녀 올 수 있는 곳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태백에 '하늘길'이라는 트레킹코스가 금방 떠 오른다.

주말부부인 내가 주중이라 숙소에 등산화나 스틱같은 장비가 없어 편한 길을 고르는데

하늘길이 거의 산능선을 따라가는 편한 길이고 떠나는 곳도 가까운 동서울터미널이기에

다행이라 생각하고 5월 1일 아침에 일찍 떠났다.

 

한적한 신고한터미널. 버스시간표도 출력은 했는데 시간이 안 맞아

택시를 타고 하이원호텔로 향했다.

원래 하늘길은 강원랜드에서 시작하여 하이원호텔에서 끝나는데

다녀 온 사람 후기가 역방향으로 걷는 것이 하늘길 접근에 편하다는 정보를 이용했다.

 

주차장 뒤에 있는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올라 가는 옆의 넓은 공간에는

드라이빙 레인지와 필드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파란 잔디위에 옹기 종기 모여 있다.

내 나이에 내 정도 위치면 당연히 저 골프꾼들의 무리 속에 있어야 하건만

나는 오늘도 배낭하나 메고 이렇게 산을 오른다.

아울러 산 너머로 높이 스키어들을 위한 곤돌라들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다.

 

하늘길 시작은 무려 1140미터 지점에서 시작한다.

1140미터면 월악산보다 높고 관악산의 2배에 가까운 높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버스에서 약간 귀가 먹먹한 것을 느꼈다.

오늘 이 곳 중부지방의 날씨는 비가 오락 가락한다 했는데

지금 이 곳에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트레킹코스이고 평일이고 날씨가 흐려

아마 오늘 코스에서는 누구도 오고 갈 때 만나지 않을 것이다.

하이원호텔에서 뒷산까지는 코스에 나무조각들을 깔아 놓아

약간 푹신한 느낌으로 기분좋게 걸을 수 있다.

 

도심지 서울의 인근 산에서는 이미 봄이 한창인데

지금 이 곳 고산지대에서는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숲 속의 큰 나무들은 아직 물기가 덜 오르고

길가의 작은 나무들은 이제 겨우 꽃망울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곳 코스에는 꽃보다는 산죽이 가득 덮여 있다.

산죽은 낮은 대나무과의 나무로 겨우 무릎 정도의 크기로 자라고 있는데

걷는 내내 이 산죽들이 온 산을 채우고 있다.

 

이 곳의 오래된 이름은 화절령 운탄로이다. 

걷는 길은 전체 코스가 차가 한 대 다닐 정도로 폭이 넓고

포장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석탄 트럭들이 지나다닐 만 했다.

원래 이길은 탄광에서 캔 석탄을 운반하던 길로

이제 석탄을 캐지 않으니 사람들의 산책을 위한 길로만 이용되고 있다.

 

홀로 걷는 즐거움.

더 이상 글로 쓰고 말을 해서 무엇하랴.

특히 이 곳은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산이라

많은 나무에 수목명이 달린 패찰이 걸려 있어

나무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과 나무가 서로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가 된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전망대에 도착하니

커다란 돌에 김소월의 시 '산유화'가 새겨 있다.

숲속의 나무들에게 가곡 산유화를 내가 들려 주었다.

그리고 뒤를 보니 태백산맥의 수없이 많은 산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대 장관의 모습.

높이가 제 각각 다른 산들이 내 시야에 끝없이 이어져 있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과 그 사이로 가끔 맑은 하늘.

그 밑으로 눈을 좌우로 돌려 봐도 어디 하나 인공건축물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완벽하게 자연 속에 들어와 있다.

어느 산은 구름사이로 비친 햇살을 받아 선명하고

어느 산은 푸르름이 가득하고

어느 산들은 봄 햇살을 받지 못해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이 산에는 유난히 자작나무과의 나무들이 많다.

주로 러시아나 북유럽의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흰 색깔의 자작나무도

여러종류가 있음을 이 곳에서 알았다.

사스레 나무, 물박달, 거제수나무 등등..

그 밑에 여기 저기 보이는 정선의 별미 콧등치기국수같은 동물의 배설물.

어느 동물이 이 곳에 자기 영역을 표시했을까?

 

높은 곳에 있는 산이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해도 좋을만큼

길이 넓고 평평하며 시원하게 뻗어 있다.

굳이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위험하지 않은 길.

골프를 치러 온 남편은 필드에 남겨두고 아내와 가족은

이 곳을 충분히 즐길만 한 곳이다.

 

그런데 걸으며 보니 다른 산과 유난히 다른 면이 있다.

수없이 많은 곳에 발파 흔적이 있고

많은 산 언덕에 인공언덕을 만들어 놓았다.

이전에 갱도였던 곳을 모두 복구하느라

언덕을 새로 쌓고 나무들을 규칙적으로 심어 놓았다.

그리고 자주 보이는 검은 흙들.

흙들이 아니고 석탄가루들일 것이다.

 

문득 차량통행을 가로 막는 철구조물.

산림청의 관할이라며 통행금지라고 써 놓았다.

그 뒤로 나무들이 하늘로 시원하게 쭉 쭉 뻗어 있다.

그런데 산에 있는 나무들의 색깔이 이상하다.

중간부분이 검게 변해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산불로 인한 피해일까?

가만히 보니 나무들이 죽지는 않았다.

 

길 아래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갇힌 물이 보였다.

물 색깔이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이 물이 광산에 흘러나오는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일 것이다.

 

중간 중간 왼편에 산중 마을이 보인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구불 구불한 도로가 골짜기 사이로 지나가는

뱀의 모습같다.

 

바람은 없는 것 같은데 하늘에 회색구름이 흘러간다.

혹시라도 비가 올 것 같으니 발길을 서둘러야겠다.

갱도가 철수 된 곳에 언덕을 쌓고 전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는데

심은지 몇 년 지난 듯 나무들이 허리만큼 자라 있다.

다른 나무들 처럼 크게 자랄려면 몇 년이나 더 기다려야 할까?

새로 심어 놓은 전나무 언덕 한가운데 아주 큰 나무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왜 저 나무는 그대로 두었을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문득 10미터 정도 앞에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

작은 다람쥐 한 마리.

얼른 카메라로 움직임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사진은 찍었지만 모니터로 보아도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길 한 켠에 누군가 나무토막에 불을 놓았다.

이런 위험한 짓을 누가 했을까?

하마터면 커다란 산불이 났을 것 같다.

 

하늘길, 하늘로 가는 길.

지형상으로도 하늘로 가는 길이 분명하다.

장례식장에서 자주 부르는 찬송가가 흥얼거려 진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만약 이 곳이 비탈진 경사로 계속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더욱 멋진 트레킹코스 이름이 되었겠지만 그러지 못함이 아쉬었다.

 

왼편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눈 아래 산들, 협곡들,  수풀들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멋이다.

비록 탄광으로 인해 산이 무척 많이 훼손되었지만

앞으로 몇 십년 지나 그 상처도 아물고 나무가 자라면 그나마 잊혀질 것이다.

 

한없이 가도 가도 평평하고 넓은 길.

내가 꼭 가고 싶은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의 길이 이런 모습일까?

이런 길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도 힘들 것 같지 않다.

 

2시간을 넘게 걸었나?  쭉 뻗은 길이 서서히 밑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제는 하산길이다.

길 옆에 군데 군데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나 좀 봐 달라며 얼굴을 내밀고 있다.

민들레같이 생긴 노란꽃, 사루비아같은 비슷한 자색꽃..

나무가지에 좁쌀같이 매달린 새싹들.

산죽들도 조금씩 더 푸르러 지는 것 같다.

 

멀리 갈래길이 보이는 것을 보니 저 곳에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될 것이다.

큰 나무를 잘라 쌓아 놓은 갈래길 한 가운데 자연의 나무로 만든 정자.

굽은 나무가지들을 이용하여 멋도 내고

나무가 굽이친 대로 기둥을 만들고 의자와 탁자도 만들어 놓았기에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쉬는데 문득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아래에서 내려와 백운산으로 가는 길을 묻고는 언덕길로 올라가는데

다리를 약간 저는 모습이 프랑스 영화 '남과 여'에서 걸음걸이가 비슷한

애견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던 남자가 생각났다.

남자가  올라 온 곳에 보니 작은 연못하나. 이름하여 도롱이 연못이다.

이 연못에 도룡뇽들이 살아 있는 한 갱도에 들어간 남편이 무사히 귀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혹시라도 도룡뇽을 볼 수 있을까 해서 한 참 들여다 보았는데

사라진건지, 아니면 내 눈에 안 보이는지 수면의 움직임이 없다.

그 연못은 이제 산속 동물들의 갈증을 해소하고

하늘의 거울이 되어 흰 뭉게구름들을 맑은 수면에 비추어 주고 있다.

 

지도상으로 보니 강원랜드로 내려가는 길이 이 곳을 지나치게 되어 있어

길을 가다보니 아차...지도를 잘 못 보았다.

도롱이 연못을 끼고 내려가야 하는데 그만 사북방향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길도 역시 강원랜드로 가는 길이니 그냥 가자.

어디선가 중장비 소리가 들려오고 깊은 산중에서 포크레인이 움직이고 있다.

 

사북으로 향하는 길은 공사판이 많다.

세멘트도로가 파헤쳐져 있고, 여기 저기 검은 도로가 뒤 덮고 있다.

아직도 석탄을 캐고 있는 것인가?

길이 없고 중장비가 지나쳤음직한 길을 따라 내려가니

멀리 화려한 강원랜드 건물 몇 동이 보이는데 내 지척에는

지붕과 벽이 거의 무너져 가는 판잣집이 바람불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검은 흙더미 앞에 세워져 있다.

저 건물은 무슨 용도였을까?

탄광촌 사무실 아니면 식당?

 

판잣집 앞 건너편 언덕 밑에는 검은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다.

멀리서 보아도 갱도입구부터 나무로 버팀목을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광부들이 아침에는 빨려 들어가고 저녁이면 지친 얼굴에

검은 석탄 땀을 흘리고 안도의 한 숨을 쉬며 나왔겠지.

 

이제 거친 길도 다 내려왔고, 건너편엔 내가 원래 내려왔어야 화절령 가는 길 앞에

작은 초소가 있고 그 안에 인적이 보인다.

 

여기부터는 잘 다듬어진 세멘트 내리막 길.

여기 저기에 개발을 위한 공사가 한참이다.

하다못해 현대판 사찰도 지어지고 있다.

개발은 어디까지 올라갈까?

검은 석탄길은 지금 이 길 같이 세멘트로 덮여 버리겠지?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싶을거고 도롱이 연못도 그냥 두지 않을 것 같다.

그걸 예견이라도 하듯 멀리 산 위로 곤돌라가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흙더미 언덕에 소나무 한 그루가 옆으로 뿌리를 고

쓰러질 듯이 기울어져 있는데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억지로 허리를 굽히어

하늘로 향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워 보인다.

 

언덕으로 내려가는데 왼쪽 산에 철조망이 쳐 있다.

이 곳에서 산양삼을 재배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 놓았는데 산양삼이 무엇일까?

철조망 옆에 버섯 재배하는 통나무를 잔뜩 쌓아 놓았는데 그 나무에 버섯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길 끝에 쑥을 캐내는 아주머니와 차에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이제 막 올라가는 사람을

보며 내려가는데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높은 언덕에 강원랜드가 있고

그 언덕 밑에 넓은 주차장. 폭포 주차장이다. 상당히 넓은데 주차된 차는 서너 대 뿐.

오늘은 평일이라 카지노 손님이 없는지..

주차장에서 카지노의 뒤로 올라가는 가파른 나무계단에 오르다가 의자에 앉아 쉬는데 파란 하늘의

흰 뭉게 구름이 바로 손 앞에 잡혀 진다.

 

참 좋다. 몇 개의 산 능선을 넘으며 걸어본 하늘길.

곤돌라로 휙 날라 가 버릴 길들을 나는 타박 타박 걸었다.

내겐 허공으로 날아가는 골프공보다

설원을 날으는 스키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카지노보다

두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하늘로 가는 것이 더 큰 꿈이며 소망이다.

 

어느 녹음이 우거진 날 이 곳에 다시 한 번 와 봐야겠다.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니 크게 마음 먹지 않아도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할 수 있으면 아이들 손을 잡고, 혹은 연인과 팔장을 끼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