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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상식

carmina 2013. 10. 30. 16:53

 

강화도 상식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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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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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고구려 소수림왕 11)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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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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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1259),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1264),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 16년이 지난 1282(충렬왕 8)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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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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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도 이때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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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인 1678,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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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
,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
,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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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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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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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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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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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1.삼랑성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2.강화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3.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4.덕진진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5.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6.갑곶돈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7.강화외성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1233) 해안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8.택지돈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쌓고 그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강화 53돈대 중의 하나인 이 돈대는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모양으로 쌓아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하였는데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 위로 낮게 쌓은 담의 일부가 유일하게 남아있어, 1998년에 완전 복원해 놓았다. 인근 마을에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제단처럼 여기고 보호하여 지금까지 그 본모습이 잘 남아있다.

 조선 숙종 5(1679)에 축조된 것으로, 어영군 2천명과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승군 8천명이 동원되었다.

 9.삼암돈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평지가 높은 곳에 마련해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 외포리 마을에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둥글게 쌓여 있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4곳 설치되었다. 성위로 낮게 쌓은 담이 55개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숙종 5(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여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10.분오리돈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돈대는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넓으며,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평면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4곳에 문을 설치한 외곽 포대로, 관아에서 돈장을 따로 두어 관리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띠었다 한다.

 조선 숙종 5(1679)에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명이 동원하여 쌓았다.

 

11.강화역사관

 일단 강화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강화 역사관은 필수 코스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역사를 주제로 강화역사관은 시원한 파도가 넘실대는 갑곶돈대 옆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의 변천사를 알기 쉽게 전시한 역사관 내부는 물론이고 야외 마당에는 커다란 시선 1척이 자리잡고 있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이어받은 강화는 한반도 역사문화의 축소판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4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16 7천만원을 투입하여 1988 9 강화역사관을 개관하였으며, 2001 2월에는 기존 유물을 재배치하여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개관하였다.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40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관은 지하1, 지상2층으로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옥외에는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해선망 어선, 비석군 등을 있다.

 12.전등사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단군왕검의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372)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1544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으며 정화궁주의 시주물로 전해 내려오는 청동수조와 옥등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처음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866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강화도, 어린이 설명

 

선사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 강화도를 답사해 볼까?
강화도는 서울 바로 옆에 있는 큰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크지. 제주도가 가장 크고, 거제도, 진도 다음이 강화도야. 그런데 강화도는 한강 하구에 있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가까웠기 때문에 위기 때마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참 많이 일어났어. 우리 색깔을 따라 강화도의 역사를 탐방해 볼까?

선사 시대 - 빨간색 문화재
1. 고인돌(
청동기) : 강화도에는 고인돌이 참 많아.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있지. 가장 유명한 곳은 고인돌 공원이야. 5월에는 고인돌 축제도 열려.
2.
참성대(고조선) :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계속 고쳐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된 제단이 하늘과 땅을 상징한다고 해서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전국 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해 붙이고 있대
.
3.
삼랑산성 : 정족산성이라고도 하고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대
.

삼국 시대 -
노란색 문화재야
1.
전등사 : 삼랑성 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372)에 아도 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라 이름 지었대. 그 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할 전’ 자와 ‘등불 등’ 자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했어.
2.
보문사 : 신라 선덕왕 때 창건한 절로 창건 전설이 재미있어. 한 어부가 그물에 걸린 사람 모양의 돌 22개를 버렸는데, 꿈에 그것이 불상이라는 신선의 질책을 듣자 다시 돌들을 건져 산 속으로 옮기던 중 지금의 보문사 석굴 앞에서 돌이 무거워져 더 옮길 수 없게 되어 석굴에 안치했다고 해. 보문사에 가면 석굴을 꼭 들여다 봐
.

고려 시대 - 파란색 문화재야

1.
강화 외성 : 고려가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 외성을 쌓았는데,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대.
2.
고려 궁궐터 :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이야
.
3.
선원사 :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는 절이야. 고려가 몽골과 싸울 때 최우가 호국 사찰로 창건했고, 대장도감(
大藏都監)을 설치해 고려대장경 목판을 만들었대
.

조선 - 연두색 문화재야

1.
사고 : 다시 전등사로 왔네? 사고란, 조선 시대 역사책을 보관하는 곳이야. 처음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했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된 후에는 전등사로 옮겨 서적을 보관했대. 그 후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지.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자리잡고 있어.

근대 - 초록색 문화재야

1.
광성보 : 광해군 이후 강화 외성을 다시 쌓으며 대포를 설치한 해군 요충지인 광성보를 만들었어. 특히 여기 소속된 용두돈은 좁은 강화 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로, 작은 보트 한 대도 그냥 통과할 수 없는 절묘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병인양요미양요 때 적을 통과시키지 않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한 곳이야.
2.
초지진 :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때 구축한 요새야.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한 후 점령당해 군사 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끈질긴 공격으로 되찾았지.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요호를 공격할 때에도 여기가 중심이 되었어. 그 뒤 허물어진 초지진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대
.

강화 역사관 - 검은색 문화재야

1.
특징 : 선사 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역사를 주제로 한 강화 역사관은 시원한 파도가 넘실대는 갑곶돈대 옆에 있어. 강화의 변천사를 알기 쉽게 전시한 역사관 내부는 물론이고 야외 마당에도 배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지.
2.
한말 강화도에 유독 외적 침입이 많았던 이유는 뭘까
?
첫째,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황해안에서 큰 배가 드나들기 쉬운 항구가 부족하여 강화도가 근대의 창구 역할을 했어. 후에 인천항이 개항되고 나서는 강화도의 역할이 다소 줄어들었지. 둘째, 조선은 수로를 통해서 물자유통했기 때문에 한강 입구를 막으면 경제적 타격이 컸어. 그래서 외적은 강화도에 머무르며 한강 하구를 통제하고 수도를 위협했던 거야
.


 

 

질문 1  우리나라 섬크기 순위 : 4 ,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 남해도, 안면도, 울릉도,…
교동도 (16) 석모도 (19) //  왕족 유배지 연산군, 선비는 해남지방

 

질문 2 대한민국 (65) – 조선 (500) – 고려 (450) - 3국시대 (1000) -
삼한시대(마한,진한,변한) - 고조선 (2300)

 

질문 3 서기, 불기 (2557, +544) 이슬람력 (1434– 579) 단기 (4346, +2333),

단군 설화, 고조선 왕검, 마니산, 전국체육대회 성화

 

질문 4 고인돌의 용도 :지역 : 고창, 화순, 강화도 (고천리, 오상리 등)

 

질문 5. 선교사 영국성공회가 처음으로 성당지음. (1900)

 

질문 6 :우리나라의 걷는 코스 이름 아는 대로.

 

질문 7 걸으면 좋은 것 (산림욕, 운동, 다이어트, 자연공부, 스트레스 해소,….)

 

하지 말 것

1.     안전 코스를 벗어나지 말고 바다나 갯벌로 내려가지 말 것

2.     숲 속에 들어가지 말 것

3.     마을 지날 때 밤이나 채소, 열매, 꽃 등 줍거나 따지 말 것

4.     앞 사람이 안 보이면 반드시 그 자리에 멈출 것

5.     벌이 날아다녀도 겁내지 말 것.

6.     휴식 시간에 간식 먹고 주변 정리할 것

7.     식사장소에서 남의 도움없이 그네타지 말 것

8.     점심 음식 남기지 말 것

9.     산에서는 뛰지 말 것

10.   몸 아프면 즉시 얘기할 것

할 것

1.     마음껏 얘기하고 노래하고 떠들기

2.     사진 많이 찍을 것

3.     평지에서는 뛰어다녀도 됨.

4.     많이 먹을 것,

 

한국사 연표
BC 70
만전 구석기 시대
BC 2333
고조선 건국(단군왕검) 아사달,(기원전 2333)
BC 194
위만 조선 건국
BC 108
고조선 멸망(기원전 108)
BC 57
년에 신라 건국(박혁거세) 서라벌(기원전 57)
BC 37
년에 고구려 건국(고주몽)졸본(기원전 37)
BC 18
년에 백제 건국(온조)위례성(18)
AD 346
근초고왕 태어남.
AD 375
근초고왕 죽음 백제 전성기 이룸 광개토대왕(호태왕) 태어남

AD 391 고구려 19 왕위에 오름
AD 391~491
고구려 전성기 이룸
AD ?
신라 진흥왕 전성기 이룸
AD 660
황산벌 싸움 김유신 승리 .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 함락 의자왕 웅진으로 도망쳤으나 웅진성 함락 의자왕 항복 백제 멸망(서기 660)
AD 668
연개소문 세상을 떠남. 연개소문의 세아들 싸움 . 연합군 평양성으로 . 평양성 함락 보장왕 항복 고구려 멸망(서기 668)
AD 675
. 싸움(서기 675)
AD 676
신라 삼국 통일(서기 676)
AD 698
발해 건국(대조영),동모산(지금의 ?(서기 698)
AD 751
김대성 석굴암 불국사 건립
AD
발해 756 상경용천부로 천도
AD ?
발해 해동성국 이룸
AD 892
후백제 건국(견훤) 완산주(지금의 전라북도 전주)
AD 901
후고구려 건국(궁예) 철원(지금의 강원도 철원)
AD 918
후고구려 멸망 고려 건국(왕건) 송악,개경(지금의 북한 황해도 개성)(서기 918)
AD 926
거란의 요나라에게 발해의 마지막왕 애왕 항복 발해 멸망(서기 926)
AD 935
나라를 이끌어가지 못해 신라의 56대왕 경순왕 고려에 항복 신라 멸망(서기 935)
AD 936
후백제 멸망, 고려 천하 통일(서기 936)
AD 1392
이성계가 왕위에 오름 고려 멸망(서기 1392)
AD 1398
정종 즉위
AD 1397
세종 태어남. 3 1400 8 태종 즉위
AD 1418
성군 세종이 즉위(서기 1418)
AD 1446
세종, 우리글을 만들어 반포함.(서기 1446)
AD 1450
세종, 세상을 떠남.(서기 1450)
AD 1450
문종 즉위(서기 1450)
AD 1452
단종 즉위(서기 1452
AD 1453
세조 즉위(서기 1453)
AD 1453
계유정난 일어남.
AD 1592
임진왜란 일어남. 선조 급히 피난(서기 1592)
AD 1596
일본 본국으로 돌아감.(서기 1596)
AD 1598
이순신 전사. 임진왜란 막을 내림.(서기 1598)
AD 1909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살상(서기 1909)
AD 1910
국권을 피탈 당하고 조선 멸망(서기 1910)
AD 1919
3 1 고종 사망 유관순 독립만세운동 벌임.(서기 1919 3 1)
AD 1920
일본, 독립 만세 국민들이 잡아가 죽이거나 고문을 받게함.(서기 1920)
AD 1930~47
? 대한제국의 마지막 순종 사망 6 10 운동(서기 1930~47?)
AD 1945
8 15 광복 일제 강점기 해방일본 패망(서기 1945 8 15)
AD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 7 17 헌법을 정함.
AD 1950
6 25 * 전쟁(서기 1950)
AD 1953
7 27 휴전(서기 1950)

역사와 한의 고장 강화도

광주의 서쪽은 수리산이며 안산 동쪽에 있는데 안산에서 바라보면 산세가 독수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정맥이 한남정맥이다. 인천, 부평, 김포를 지난 다음에는 움푹 꺼진 돌줄기가 되어 강을 건너고 다시 솟아나서 마니산이 되었는데, 여기가 강화부(江華府), 즉 강화도다. 강화부 동북쪽은 강으로 둘러싸였고 서남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부 전체가 큰 섬이며, 한양을 지키는 나성(羅星)역할을 하고 있다.

한강은 통진의 서남쪽에서 굽어져 갑곶나루가 되고, 또 남쪽으로 마니산 뒤로 움푹 꺼진 곳으로 흐른다. 돌맥이 물속에 가로 뻗쳐 문턱 같고 복판이 조금 오목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손돌목(손석항(孫石項))이고 그 남쪽은 서해다. 삼남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실은 배가 손돌목 밖에 와서 만조를 기다려 목을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돌무더기에 걸려서 배가 난파하게 된다. 정서 쪽으로 흐르는 한강은 양화도의 북쪽 언덕을 돌아 뒤쪽의 서강과 합쳐지고, 또 문수산 북쪽의 조강나루를 돌아 바다로 들어간다.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땅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북한을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또렷하게 북한땅이 보인다.

『택리지』에는 “강화부는 남북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 길이는 50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강화도는 남북 길이가 약 28킬로미터( 71), 동서 길이는 약 16킬로미터( 40)이고, 면적은 405.2제곱킬로미터다. 북쪽으로 풍덕의 승천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으며 강 언덕은 모두 석벽이다. 석벽 밑은 곧바로 진흙 수렁이어서 배를 댈 곳이 없었다. 오직 승천포 맞은편 한 곳에서만 배를 댈 만하였다. 그러나 만조 때가 아니면 배를 댈 수가 없으므로 위험한 나루라고 일컬었다.

한편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 「강화부」편 ‘진도’조에 따르면, 강화부에는 다섯 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 바로 갑곶진, 인화석진, 광성진, 정포진, 승천포를 일컫는다. 지금의 송해면 당산리에 있던 승천포는 개성으로 통하는 나루였고, 인화석진에서는 교동도로 건너갈 수 있었다. 내가면 외포리 정포마을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던 정포진에서는 석모도로 건너갈 수 있었다
.

강화부의 좌우에는 성곽을 쌓지 않고 좌우편 산기슭의 강가에 쌓아 마치 성 위에 쌓은 작은 담처럼 돈대(墩臺, 조금 높직하게 만든 평지)만 쌓았다. 거기다 병기를 보관하고 군사를 두어 외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승천포와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을 만큼 좁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갑곶 양쪽을 지키면 섬 바깥에서 강과 바다가 지켜주는 천연의 요새가 된다. 그런 연유로 고려 때는 원나라 군사를 피해 이곳에다 10년 동안이나 도읍을 옮겨 고려의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을 거쳐 서울로 오는 까닭에 바닷길의 요충지라 하여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도 방영(防營)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광성보 안해루 강화도는 동북쪽이 강으로 둘러싸였고 서남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부 전체가 큰 섬으로, 한양을 지키는 나성(羅星) 역할을 하였다. 안해루(按海樓)는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담긴 성문이다.

강화도 관창리에는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 왕실이 39년간 머물렀던 고려 궁터가 있다. 그러나 왕족과 지배 계급은 백성의 고통과 절망에는 아랑곳없이 이곳에서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큰 행사를 꼬박꼬박 치렀다. 그 호화로움이 개경에서 벌이던 것에 못지않았다는데, 그중 한 예를 육당 최남선은 『고사통(故事通)』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고종 32년에 집권자 최우가 고종에게 진상한 음식상은 여섯 개였고 상마다 귀한 음식이 담긴 그릇이 일곱 개씩 놓여 있었다. 최우는 음식에 풍성함과 사치스러움을 다하고는 스스로 자랑하기를 “다시 오늘과 같이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한다.

고려 왕실과 지배계급의 잔치는 항상 음악과 춤을 곁들여 호화로운 것이었다. 「처용무」나 「가면잡기」 등으로 여흥을 돋우었고, 그때마다 담 밖에는 잔치를 구경하려는 강화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만 20만 명이 넘고 몽골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불에 타서 재가 되었음에도 지배세력이 그렇게 화려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국의 조세가 안전한 해로(海路)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강화도가 고려의 왕도였던 시대에 황룡사의 9층목탑과 대구 구인사의 대장경이 불타버렸다. 그러자 현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16년간에 걸쳐 다시 만들게 된다. 민중의 절박한 삶과 달리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한 집권 세력은 오늘날에도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이 『조선사화(朝鮮史話)』 「고적(古蹟)」편에서 강화를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강화는 역사 속에서 수난의 땅이었다. 삼별초의 난으로 뻘겋게 피로 물들었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66 9월 프랑스의 선박 세 척이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영종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강의 언저리 양화진까지 왔고, 뒤를 이어 미국과 여러 나라들이 ‘조선의 문호를 연다’거나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몰려들어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결국 그 조약들은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던 지역이 강화도이다.

외규장각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서적을 약탈한 이후로 아직까지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지난 일을 징계(懲戒) 삼아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말먹이와 식량을 저축하여 비상시에 대비하였다. 그 후 백여 년 동안이나 아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강화에 쌓여 있던 양곡이 백만 섬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말년에 해마다 흉년이 들자 이 양곡을 각 도로 많이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사용하였다. 추수 후에는 회수하여 각 고을에 그대로 쌓아두기도 하였고, 서울 각 관청의 경비가 모자라면 미곡을 옮기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리가 허술해지면서 군량이 해마다 줄어들어 이중환이 『택리지』를 쓸 무렵에는 10만 섬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 계유년에 이중환은 병자년의 일을 생각하여 왕에게 문수산에 성을 쌓자고 청하였다. 문수산성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 후 묘당과 여러 장수가 통진읍을 성안에 옮겨 따로 진을 만들고, 변란이 생기면 온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산성을 지키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끝내 통일된 의견이 나오지 않아서 실행되지 않다가 병인년에 강화 유수(留守) 김시혁이 장계를 올려 강을 따라서 성을 쌓도록 청하므로 조정에서 허가하였다. 그때의 상황이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시혁이 동쪽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북으로는 연미정(燕尾亭)에서 남으로는 손돌목에 이르렀다. 공사를 끝내자 임금은 김시혁을 발탁하여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장맛비에 성이 무너졌으나, 성을 쌓을 때 수렁을 만나면 번번이 흙과 돌로 메워서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강 언덕이 모두 견고해져 사람과 말이 다닐 만하고, 강을 따라 40리나 되는 곳곳에 배를 댈 수 있게 되어 이제는 강화도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전등사 대웅전

그 뒤 강화도에서 살다가 임금이 된 이가 강화도령이라고 일컬어지는 철종이다. ‘강화도령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는 말은 철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강화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냈듯이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철종이 살았던 곳이 고려 궁터 아래에 있고,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의 송정촌은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지은 이름인데, 이곳은 조선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이 마지막을 보냈던 곳으로 정송강 집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정철은 강직했고 청렴결백하였다. 정승을 지냈으며 서인의 영수였으면서도 말년에 호구지책을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더더욱 비참한 시절이었다. 평생을 청직으로 일관한 정철은 하는 수 없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야만 하였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평일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여태껏 감히 받지 않았는데, 지금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자못 본심에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는 약간의 것인즉 마음이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한평생 술을 좋아했던 그가 남긴 「장진주사(將進酒辭)」라는 시가 그 당시 더도 덜도 아닌 송강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고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상여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세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쓸쓸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이미 땅에 떨어져 내리는 한 잎의 낙엽과 같았던 정철은 빈곤과 울분 속에서 신음하다가 선조 26(1593) 12 18일 이 마을에서 58세를 일기로 파란 많던 생애를 마쳤다. 정철이 죽음에 임하였을 때 둘째 아들 종명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게 하였다. 정철은 눈을 살며시 뜬 채로 “이 아이가 헛된 일을 하는구나” 하고 말하였다 한다.

한편 이곳 강화에는 ‘넉살 좋은 광해년(강화년)’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광해란 강화를 강화 사투리로 발음한 것으로 흔히 강화 여자가 부끄럼을 타지 않고 검질기다고 하여 체면과 염치를 모르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암 강화, 숫 통진’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강화 처녀가 김포 땅으로 시집가면 잘살지만 김포 처녀가 강화 땅으로 시집가면 잘 못산다는 말이다. 그만큼 김포 처녀가 억척스럽다는 이야기다. 그런 연유로 한 시절 전만 해도 강화 사람들은 김포에서 행세하는 집안의 처가는 강화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피력했다고 한다
.

한편 이곳 강화와 통진 그리고 양천 사람들을 빗댄 ‘강화, 통진, 양천 사람들은 아침에 동풍 안고 저녁에 서풍 안고 밤엔 죽 상 안는다’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 길이 조선시대에 9대로의 하나인 강화로였기 때문인데,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나 곡식 등을 이고 진 채 동풍을 가슴에 안고서 서울의 시장까지 가서 내다 팔고, 저녁이면 서풍을 안고 피로에 젖은 채 돌아오지만, 수고한 만큼 벌지 못했기에 죽 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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