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흰 눈 세상의 나들길 1코스

carmina 2013. 12. 29. 14:28

 

 

나들길 1코스 (2013. 12. 28)

 

 

발에 갑자기 무리가 생겨 거의 2달동안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몸이 쑤시는 것 같다.

짧은 길을 걸어보기도 하고 한 2시간 코스도 걸어 보았다.

이젠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다음 달의 큰 계획을 앞두고 내 발의 상태를 체크해 보기로 했다.

마침 나들길 송년 걷기 모임이 있고 내 몸에 무리가 간다면

그 코스는 중간에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겨울 짐을 꾸렸다.

토요일 아침 서울 기온 영하 10도.

아이젠과 스팻츠를 챙기고 두터운 장갑, 털모자, 내복과 겨울 등산복.

 

아파트를 나서니 다행하게도 볼에 느끼는 날씨는 차가와도 바람이 없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 모두 내 발을 걱정해 준다.

뜨거운 커피와 물 그리고 간식으로 곳감을 사서 챙겨 넣고는 출발.

 

날씨가 추워 걷기 호응이 적을 줄 알았는데 빙 둘러서서 인사를 하는데 무려 30명.

도대체 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뜨거운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그래도 추운 날이라 모두 꽁꽁 싸매고 나섰다.

 

동문으로 가는 언덕길에서 바라보는 낮은 산들에 눈이 하얗게 덮혀 있다.

저 길들을 걸을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다.

 

그간 그냥 지나친 눈 덮힌 동문 내부의 천정을 보니 용한마리가 꿈틀대고 있다.

올해 내게 용한마리가 들어왔다가 별 볼일 없이 나가버렸다.

동문 앞에 수북하게 덮혀 있던 클로버들이 눈 속에 묻혀 버렸지만

그래도 눈을 헤집어 보니 아직도 푸른 빛의 클로버들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이게 잡초들이 한 겨울을 지내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인가?

이제 나도 그래야 할 지 모른다.

 

동문에서 용흥궁으로 가는 작은 주택 골목길. 난 이 길이 너무 좋다.

내 어릴 적  고향의 골목과 너무 비슷하다.

지난 여름 모진 바람에 굵은 가지 하나를 잃어 버린 600년 묵은 나무를 멀리서 보니

호주에서 보던 어린왕자 소설 속의 바오밥나무와 무척 흡사하다.

오랜동안 이 곳에 못와서인지 길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논이 있던 길이 도로로 덮히어 버렸고, 옆의 강화 성당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적지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강화는 고대 로마의 모습과 역사적인 면으로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은데

불행하게도 로마의 유적지 보존하는 방법과 강화의 유적지 보존은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기만 하다.

 

그 길에 유치원이 하나 생겼다.

한창 주변 작업중인 듯 돌틈에서 두 아가씨동상이 손을 꼭 잡고 겨울을 지내고 있다.

왜 그리 오늘따라 모든 것이 처량하게 보이는 걸까?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것일까?

 

강화성공회 한옥 성당 옆문으로 들어가 내부를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를 해 놓았다.

이 곳의 성당 기둥에 써 있는 한문으로 써 있는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 뜻을 적어 본다.

 

우선 지붕 밑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고 카톨릭 성당을 이렇게 쓰고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선파계중민영생지방)
“복음을 널리 펴고 민중에게 영생의 길을 깨우치라”

神化周流庶物同胞之樂 (신화주류유서물동포지낙)
"하나님은 (물이) 동산을 둘러 흐르게 하시고 만물을 살찌우시니 동포의 기쁨이라"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

"삼위일체 하나님 세상의 참 근원이시라"
宣仁宣義聿昭拯濟大權衡 (선인선의율소증제대권형)

"인(仁)을 베풀라 의(義)를 베풀라 스스로 밝히고 구제하는 일이 큰 정의라기"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 짓기 전에 소리를 드러내시니 참 하나님이시어라"

 

성당을 내려와 강화문화관에 들러 보자 해서 들어 가니

강화의 유명 인물에 대한 설명을 패널로 만들어 적어 놓았다.

화남 고재형선생, 정철선생, 함허 고승, 등등.

강화도에는 자랑할 역사적인 인물들은 많은데 이 것 또한 제대로 알리지 못함이 아쉽다.

누군가 강화를 디자인해 보기를 바래본다.

 

용흥궁으로 가는 길에 강화성당을 덮어 주는 파란 하늘아래 성모마리아상이

흰 눈 같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조용한 골목길. 늘 유심히 보는 집이 하나 있다.

그 집 대문에는 '행복이 가득한 집' 그리고 부부의 이름을  하트로 연결해 놓았다.

그렇게 자신있게 사는 부부가 있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 행복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강화여고 정문에 걸어놓은 프랭카드에 갑비랑제 라고 써 있는데 무슨 뜻일까?

마치 제주도 방언같은 글이다. 물론 강화여고의 축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강화여고 옆에 커다란 교사 기숙사와 학생 기숙사가 있다.

강화가 고향인 일행에게 왜 지역 학교에 기숙사가 필요하느냐 물었더니

강화는 교통편이 자주 있지 않아 학생들의 귀가가 쉽지 않아 이렇게 기숙사를 한단다.

 

강화향교를 지나 늘 쉬어가던 은수물 약수터에 오늘은 길벗들이 그냥 지나친다.

아마 추우니 앉아 있기 보다는 걷기를 원하는 것 같다.

 

진고개길을 넘어가는 눈 덮힌 길이 좋다.

하늘로 높이 솟은 소나무들,

그 사이의 오솔길을 걷는 길벗들의 등산복이 꽃같이 피어 있다.

누가 이런 멋진 길을 디자인했을까?

나들길 1코스는 이렇게 평지의 숲길을 걷는 코스가 많다.

 

북문의 진송루 앞에서 간식을 나누어 먹고

일부는 북문을 지나 오읍약수터로 바로 질러가고

우리는 눈 덮힌 성곽길을 오른다.

긴 성곽길이 끝이 안보이고 이어지고 그 넘어로 눈덮힌 벌판

그리고 벌판 넘어로 강을 건너 황량한 북한땅이 보인다.

나무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황해도 개풍군의 민둥산.

저렇게 초라하게 해놓고 대를 이어 통치를 하고 싶을까?

그리고 그런 어처구니 없는 통치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 불가능하다.

 

북장대에 오르니 가슴이 트인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색깔이 극명하게 세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피린 빛의 하늘, 흰색의 벌판 그리고 갈색의 나무들.

그 외의 색깔은 보이지 않는다.

 

북장대에서 오읍약수터로 내려가는 비탈길.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한 길벗들이 간신히 스틱에 의지해 길을 내려온다.

이런 곳에서 아이젠을 차고 걸으니 조심 조심 걷는 사람들의 옆을 걸으니

마치 주말의 고속도로에서 전용차선으로 달리는 기분이다.

거침없이 눈길 언덕을 내려와 주민 빨래터에 이르니

빨래터 자리만 눈이 치워져 있다.

누군가 이 한 겨울에 빨래를 할려고 눈을 치웠을까?

 

숲속을 지나 평소에 가던 대월초등학교로 가는 길이 코스가 바뀌어 버렸다.

이 깊은 강화 산골에도 산업단지가 들어선다고 대규모 부지 단지 공사를 시작되어

예쁘게 나들길 페인팅이 되어 있는 작은 터널과 오롯한 소나무숲속길을 잃어 버렸다.

강화 나들길을 처음 걸을 때 처음으로 고라니를 본 장소였기에 늘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주위를 둘로 보곤 했는데..이젠 그 추억마저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되었다.

 

공사용 중장비가 끼익 끼억 거리는 길 옆을 지나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없었던지 눈 덮힌 숲속길이 제법 운치가 있다.

우리가 가는 길 외에는 모두 짐승들의 발자국과 배설물들만 보인다.

나들길 안내하는 분이 새로운 길에 안내 리본을 많이 달아 놓아

숲속의 나무 사이로 연두색 리본이 흩날리는 것이 보기 좋다.

모든 잔가지들과 잡풀들이 푸른 색을 잃어 버렸어도 강한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의 푸른 빛은 아직도 푸르탱탱하다.

 

언덕 위에 올라서 보니 지난 해 가을 여기를 걸을 때 황금빛 벌판 풍경이 너무 좋아

사진을 찍고 자주 그 사진을 강화의 가을을 소개할 때 사용하곤 했는데

그 넓은 벌판이 모두 사라지고 파헤쳐진 누런 흙들만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강화주민들의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늘 여기 1코스를 걸으면 연미정식당에서 식사를 하느라 제대로 된 길을 가지않고

숲 사이로 질러갔는데 오늘은 식사를 민간통제선 안에 있는 황토라는 곳에서 한다기에

정코스를 가다보니 내가 처음 혼자 걷던 1코스의 모습들이 보인다.

어느 집 벽에 그려져 있는 축구선수. 박지성의 모습일까?

 

황토식당이 우리가 내려온 곳에서 한참 먼 곳에 있기에 식당에서 차를 제공하여

식당에서 직접 길러서 요리한 맛있는 오리백숙과 닭백숙을 먹고

길벗이 준비한 풍등을 날리기로 했다.

 

언젠가 꽃보다 할배에서 보았던 풍등은 작은 열기구처럼 생겼으며 밑에서

작은 주머니에 불을 붙이면 데워진 뜨거운 공기로 하늘을 날랐다.

우린 모두 그 기구에 각자의 소망을 쓰고 4개의 풍등을 날렸다.

그 중 하나는 바람을 잘못 맞아 사라지고 나머지 3개는 모두 하늘 높이 날라가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식사 후 연미정에 오니 썰렁한 공간.

그 여름의 시원한 바람은 이제 싸늘한 겨울바람으로 변해 있었다.

연미정에서 내려와 철조망 옆으로 길을 걷다가 초병의 제지에 모두 제길로 걸었다.장포

 

긴 벌판의 포장된 논둑길을 가는데 모두 눈이 덮혀 있다.

차가 지나간 바퀴자국을 따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걷는다.

오늘은 걸으며 쉴 수 있는 곳이 모두 눈으로 덮혀 있어 좀처럼

휴식의 시간이 없다. 오전에도 4시간 걷는 동안 평소 같으면 두번은 쉬었을텐데

한 번 밖에 쉬지 않고 점심먹고도 먼 길을 걷는데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사람들은 묵묵히 앞을 보고 걸어가기만 한다.

 

산을 올라가며 다시 아이젠을 차고 눈길을 뚜벅 뚜벅 걷는다.

만약 아이젠이 없으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언덕위 낙엽 쌓인 곳에서 간식으로 싸온 곶감을 내 놓으니 모두 어찌나 좋아하는지

간식 새 메뉴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긴 길.

봄에는 새싹들이 돋아 좋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져 좋고

가을엔 단풍이 고와서 좋고

겨울엔 흰눈이 덮히어 좋다.

 

같은 길을 수없이 걸어도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숲길들이 좋다.

 

올 한 해 참으로 긴긴 한 해였다.

어려운 일을 맡아 년말까지 노심초사하며 노력했고

가족들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내게도 큰 변화가 있었던 한 해였다.

 

늘 여러가지 빛깔로 나를 반기는 나들길처럼 늘 새롭지만

평온한 내 삶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이 문을 열면 또 어느 모습이 비쳐질까?

 

한 해 동안의 길벗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한해를 마무리한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