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나는 오늘 삶을 목욕했다 (나들길 5코스)

carmina 2014. 2. 23. 00:23


나들길 5코스 고비고갯길


고촌에서 강화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남쪽하늘에서
무척이나 많은 오리떼들이 커다란 V자 열을 그리며 북녘으로 날아간다.


봄이 느껴진다.


오늘 강화 장날이라 장터에 봄나물이 풋풋하게 살아서 나와 있고
이제 막 태어난 듯한 강아지들, 고양이들이 나 좀 데려가 주세요 하는 듯하고,
엿을 파는 품바아저씨의 소리가 더 낭랑하게 들린다.

 

처음으로 합창단에서 같이 노래하는 한 커플을 이번 여행에 초대했다.
나만큼이나 트레킹을 좋아해서 은퇴후의 생활을 여행을 보내는 분이기에
오래전 부터 같이 여행을 계획해 오다가 처음 실행에 옮겼다.

 

약 30명이 넓은 공터에서 준비운동을 간단히 하고 길을 떠난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모두들 활발한 발걸음과 밝은 얼굴들.
일주일 열심히 일하고 쉬고 싶은 토요일에 이 곳을 찾아나서는 길벗들은
모두가 이 트레킹이 쉼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도 주말에 가능한 집에서 쉬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어쩌다 주말 이틀을 집에서 쉬고 월요일 직장에 가면 왜 그리 몸이 불편한지..
아무래도 오랜세월 생활의 리듬을 이렇게 만들어왔기에 쉬는 것이
몸에 익숙치 않은가 보다.

 

오랜만에 찾은 5코스 고비고갯길의 시작부터 풍경이 바뀌어 버렸다.
없었던 곳에 새로운 도로가 생기고, 서문 쪽에는 대형 토목공사가 한참이다.

개울에 눈녹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아직 그 곳에 물고기는 없지만 이제 어디선가 흘러온 작은 씨고기가 자랄 것이다.

나들길을 찾는 사람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개울따라 만든 나무데크위를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작은 차도가 있는 길이라 안전을 생각한 것 같다.
길 옆 어느 집 앞 마당에서 커다란 털복숭이 개가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털이 온 얼굴을 덮어 도무지 눈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국화리 저수지에 오르니 수면의 반 정도가 아직 얼음에 덮여 있는데 그 경계선에
오리들이 모여서 놀고 있다. 이상하게 양쪽 경계선에만 모여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이 잠시 쉬면서 따스한 봄날씨에 아침에 두텁게 입고나왔던 옷들을
모두 벗어버렸다. 웃도리를 벗었을 때의 무언가 큰 혹을 하나 떼어낸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5코스를 걷다가 숲길 올라가기 전에 오른편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 앞에 아주 오래 된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멋지게
디자인한 집이 새로 들어섰다.


안타까움을 느껴야 하나, 멋진 집을 부럽게 바라보아야 하나.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커다란 소들이 지난 해 송아지였었는데
이젠 커다란 소가 되어 있었다. 반면에 어느 집옆에 늘 닫혀있던 개집에
있던 커다란 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강아지 2마리가 우리 일행을
무척 반가와 하고 있다. 집도 세대교체 사람도 개도 세대교체.


산길을 올라간다. 이전에 학생야영장으로 가는 길이 변경되었다.
그 곳이 걷다가 잠시 쉬며 간식 먹기에 참 좋은 장소이고 화장실도 있어 좋았는데
야영장측에서 불만을 제기해 길을 우회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는데 차라리
그 숲길이 좋고 새로 마련해 놓은 화장실도 깨끗해 보여 좋았다.


즐거운 간식시간, 가방을 푸니 온갖 먹거리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익히지 않은 돼지감자, 묵무침, 각종 과일과 떡과 음료들.
단체 걷기의 가장 큰 즐거움. 먹는 것의 풍요로움.


이제 내가 좋아하는 숲길을 걷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도심에서는 녹아도 산속에선 남아있는데
일주일간 따뜻해서인지 숲길 그늘 속에서만 잔설이 있고
나머지 길은 모두 낙엽만 가득 쌓여 있다.


와삭대는 낙엽을 걷는 기분이 등산화 밑으로 봄이 느껴져서인지 더 좋다.
마주오는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고려산과 혈구산의 갈림길에서 내려 가는 길은 지난 번 눈이 많이 올때
그 길을 가고 싶었다. 여름에 비가 와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이 좁은 계곡에 눈이 쌓여 푹푹 빠지며 걸을 때는 어떤 기분일까 하고 느끼고 싶었다.

 

그간 이길을 걸을 때마다 보았던 돌무덤이 있는 당산나무에 걸려있던
색동저고리와 치마도 이제 낡디 낡아 부서질 것 같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이 곳에 그래도 제법 굵은 나무가 가운데 있었는데
그 나무가 사라졌다.

 

이 길을 지나 원래 세멘트 마을길을 걸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숲속으로 우회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놓아
더 기분이 좋았다. 길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길을
많이 밟고 다녀서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새로 길을 만드는 개척자의 기분이랄까?

 

조용한 마을길을 걷는다.
길가 펜션에도 사람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나무들과 들판은 모두 빛을 잃은 채 멀리 보이는 산만 푸르게 보인다.

오른 편 비교적 눞은 산에 지난 고인동탐방길 트레킹시 다녀온 적석사와 낙조대가
5코스를 걸을 때는 엄두도 못냈는데 이젠 그곳에 다녀왔다는 생각에 시선이 친근해졌다.

 

오상리고인돌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내가저수지로 향한다.
어디선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 궁금했는데 엠티를 하던 젊은이들이
공터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이제 겨울은 지나갔다.

 

내가 저수지 주변도 조금 바뀐 것 같다. 저수지 옆의 커다란 나무가 사라졌고
물가 가까이 내려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 놓았다.


내가 저수지에서 차도를 따라 가던 길을 우회하여 이제 막 저수지 보공사를
끝낸 길을 걸어가는데 아직 흙들이 다져지지 않아 걷기에는 불편했지만
다음 길에선 그 부드러운 흙들 사이로 어디선가 날라온 풀씨들이 자라
부드러운 잔디길로 바뀔 것 같다.

 

늘 5코스 걸을 때 먹던 밥집에서 오늘은 조금 점심식사 메뉴가 소홀했다.
자주 오는 고객에게 잘해야 하는데 이젠 자기 식당으로 당연히 오겠지 하는
자만심에 빠진 것 같다. 대기업에서 하는 사업마인드가 이런 작은 식당에도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 곳도 이제 눈밖에 날 것같다.

 

덕산휴양림을 가는 세멘트길에 세멘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칩엽수의 낙엽이
가득 덮여 있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본능을 보는 것 같다.
만약 덕산휴양림의 계곡에 산사태를 막기 위해 쌓아놓은 돌더미들이
또 한 번의 산사태가 난다면 자연은 인간을 향해 '내가 이겼다'라고
외칠 것 만 같다.

 

덕산에서 외포리를 가는 넓은 숲길. 이 길이 지난 해 있었던 전국체육대회의
MTB코스라 길이 넓어져서 좋은데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라 불편함을 오히려
좋아하는 우리들은 모두 이전 길을 좋아할 것 같다.

 

곶창 굿당 앞 잔디밭을 발로 헤집어 보니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다.
발 아래 외포리 앞의 파란 바닷물이 햇빛에 비쳐 반짝거리고 있다.


외포리로 내려가는 마을 언덕에 늘 이 길을 걸을 때 마다 보았던
할머니가 앉아계셔서 반가왔다. 할머니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늘 이 곳에 앉아서 먼 바다를 보고 계신다.
예전처럼 내 주머니에 과자를 드렸더니 싫다고 하시기에 손주 주라했더니
얼른 받아 챙기신다.


오랜만에 걸은 나들길이 끝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마침 강화장날이라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며
이것 저것 시골정취를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멸치볶음도 하나 사서 챙겨넣었다.

 

길은 내게 바쁜 디지털 삶 속에서 아날로그적인 행동을 통해
삶에 덕지 덕지낀 때들을 씻겨 내는 세정제 역할을 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삶을 목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