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부천시립합창단 신년공연 - 까르미나 부라나

carmina 2015. 1. 30. 20:35

 

 

2015. 1. 29

 

부천시립합창단의 신년연주로 까르미나 부라나를 택했다.

티켓은 미리 받아 놓았는데 그만 해외출장일정이 잡혀 출국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공연 하루전에 귀국하여 무사히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무대의 가운데 멋진 드레스를 각각 다르게 입은 합창단,

피아노 두 대가 합창단 앞에 자리 잡고  

왼쪽에 각종 타악기, 오른쪽에 어린이 합창단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휘자의 곡 설명이 이어진 후 

첫곡, 첫 마디, 첫 박자를 알리는 힘찬 북이 울리고

거대한 합창의 첫 마디가 나를 사로잡는다.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고 필하모니아 합창단이 연주하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쇼크를 회상해 본다.

25년전 사우디 현장 생활하면서 사 모은 씨디중 하나.

까르미나 부라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합창음악이라 해서 샀다.

그리고 당시 신혼 혼수품으로 구입한 인켈오디오에 씨디를 올려 놓았더니

스피커가 찢어질 듯한 강한 큰 북의 첫음으로 시작되는 첫곡

'오, 운명의 여신이여'

거대한 합창의 소리가 나를 어느 오디오 광고처럼 스피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이 곡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아마 내 생전 칸타타나 모음곡 중 제일 많이 들었던 곡이

헨델의 메시아와 까르미나 부라나 일 것이다.

 

이전에 우리 합창단을 오랜동안 지휘하셨던 오세종선생님이

고양시립합창단을 지휘하실 때 이곡을 독특한 연출로 연주하고

서울시립함창단과는 브레이크 댄스팀과 같이 공연하기도 했었다.

합창과 연출이 같이 하면 좋기는 하지만 시선을 여러 군데 두어야 하기에

합창 고유의 맛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라틴어인 까르미나 의 뜻을 찾아보니 '노래'라는 뜻의 복수라

내게 가장 좋아하는 단어임을 확인하고

당시 인터넷 검색사이트인 다음에 가입해 

내 아이디를 "까르미나"라 했고, 한메일은 "burana"라 했다.

지금도 다음 카페에서 내 아이디는 늘 까르미나이고

그룹으로 트레킹을 즐기는 내 배낭에는 "까르미나"라는 명찰이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을 때마다 달랑 거리며 따라 걷고 있다.

그리고 길벗들은 내게 노래를 불러주길 원한다.

 

나는 합창이라는 것을 주로 교회를 통해서만 접했기에

음반을 통해 듣는 오페라 합창 이외에는 그다지 잘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까르미나 부라나를 알고 부터는 세속 합창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독일의 작곡가 칼 오르프가 1937년 작곡한 이 곡은 종래의 바로크적 교과서같은 합창의

개념을 무너뜨렸다. 

 

보이렌 수도원에서 찾아 낸 세속적인 시에 리듬을 붙인 세속합창이라 아마 당시에는

종교적인 핍박이 있었을 것이다. 이 곡의 가사도 술과 여자 그리고 사랑을 즐기는 보헤미안들의

삶이 그려지고 있어 상당히 세속적이고 섹시한 춤에 어울리는 리듬도 가득하고

엇박자와 변박이 어우러져 정해진 클래식 리듬에서 벗어나려는

보헤미안들의 자유스러움을 연상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멕시코에 출장 갔던 어느 해에

줄장 중 주말이 끼어 있어 다른 직원들이 금요일 저녁 일과 후에 술에 취해 휴일을 호텔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홀로 빠져 나와 멕시코시티의 UNAM 국립대학을 찾았다.

이 대학은 유명한 화가 디에고의 작품이 대학건물에 벽화로 남아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고, 대학내에 공연장이 몇 개 있어 주말이면 거의 축제 분위기이다.

 

작은 홀에서 재즈 연주를 보고, 대강당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보니 까르미나 부라나.

표를 구할 수 없어 3층에 올라가 기웃거리다가 요행히 자리를 잡고 들어가니

100 여명의 대학연합 합창단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곡을 연주하고 있다.

씨디로 음악을 많이 들었던 터라 관심을 가졌고 합창단원 대머리 여학생의

진지한 태도에 완전히 매혹되어 버렸었다.

다른 학생들이 악보에 파묻혀 있을 때 그 학생은 머리를 꼿꼿이 들고 지휘자를

보면서 열창하고 있었다.

 

이 곡의 가사는 사람의 인생을 수레바퀴로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서주를 비롯하여 인생의 화양연화같은 봄의 노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방황,

그리고 사랑이야기로 귀결짓는다.

 

서주로 연주되는 첫곡 O Fortuna는 음악이 너무 강열해 광고,  

시상식, 영화나 드라마 OST, 팻션쇼에서 자주 쓰여

일반인들도 곡 이름이나 작곡가는 물라도 '아~ 이 곡'라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내가 우리 부부합창단에서도 80년대 말에 이 첫 곡을 연주하여 귀에 익숙하다.

 

O Fortuna,
오, 운명의 여신이여
Velut luna
그대 마치 달과 같아
statu variabils
변덕스럽기 그지없구나
Semper crescis
늘 차오르다가도
aut decrescis
다시 이지러지니
vita detestabilis
저주받은 삶이여

nunc obdurat
한편으로는 억지로 버티게 해주고
et tunc curat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정하게 달래나니
ludo mentis aciem
얄미운 인생, 나를 희롱하는가?
Egestatem
엄청난 재산이며
ptestatem
강력한 권력도
dissolvit ut glaciem
운명앞에 얼음 녹듯 사라지네

Sors immanis
운명, 그대여
et inanis,
모는 이도 없이
rota tu volubilis,
멋대로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여
status malus,
언제나 악의에 가득 차 있으며
vana salus
호의는 찾아볼 수 없으니
semper dissolubilis
나 평안히 지낼 도리가 없구나

obumbrata
그늘에 숨은 채
et velata
베일에 가리운 채
michi quoque niteris
그대 나를 괴롭히네
nunc per ludum
승부에서 진 나는 이제
dorsum nudum
헐벗은 등판을
fero tui sceleris
그대 모진 손아귀에 넘기도다

Sors salutis
내 마음의 평안에서나
et virtutis
내 육신의 건강에서나
michi nunc contraria
운명, 그대는 나의 적
est affectus
넘치는 호의도
et deffectus
부족한 결함도
semper in angaria
언제나 그대 뜻에 묶여있나니

Hac in hora
바로 지금
sine mora
주저하지 말고
cordum pulsum tangite
악기를 쥐고 떨리는 현을 뜯어 노래하라
Quod per sortem
운명, 그대는
sterit fortem
강한 자를 무너뜨리나니
MECUM OMNES PLANGITE!
세상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울어다오

 

그러나 이 노래를 번역된 가사로 부르는 합창단은 없는 것 같다

워낙 가사가 난해하고 원어로 부르지 않으면 노래의 맛이 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세속칸타타의 첫 곡에 매료되었는데

바로 이어지는 남성베이스의 웅장한 합창은

앞서 노래한 운명의 여신에서의 감흥을 잊게 해 준다.

혹시라도 주위에 까르미나 부라나를 아는 사람이 있어

운명의 여신을 안다면 나는 꼭 그 다음 곡도 들어 보라고 권한다.

 

운명을 노래하는 숙연한 합창이 이어진뒤에

맑은 봄의 멜로디가 흐른다. 재잘거리며 부르는 합창

서로 노래를 주고 받으며 봄의 화원에서 노닐고 있는 정경이 보인다.

이런 멜로디에 작은 타악기의 반주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시원한

화이트와인에 치즈를 얹은 카나페를 먹는 기분이랄까?

 

까르미나 부라나에는 3명의 솔리스트가 같이 한다.

소프라노 테너 그리고 바리톤.

매번 에프엠으로 이 노래의 바리톤 솔로를 들을 때마다

참 특색있게 부르는구나 했는데 지금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바리톤이 그런 음색이다.

이 노래는 중세 특유의 발성으로 노래하도록 유도하는 것일까?

 

합창이 이어진다.

까르미나 부라나의 곡들은 전 곡의 패턴이 비슷하다.

어깨가 들썩거려질 정도의 리듬과 비트들..

남녀가 사랑하는 장면을 표현하듯 남성이 노래하면 여성이 이어 받는다.

 

합창이 있는가하면 춤이 있는 곡이 까르미나 부라나이다.

보헤미안들이 그렇게 지냈을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고..노래하고 춤추고..

무대의 양 옆에 자막으로 보여주는 가사가 다소 자극적이다.

아마 그대로 해석했다면 더 야한 가사였을텐덴 많이 순화시킨 것 같다.

합창은 거대하게, 합창은 아주 작게 이어진다.

사랑과 애증의 시간들같이...

 

자막에 문득 보이는 이상한 가사

만약 이 팔에 영국의 여왕을 얻는다면 기꺼이 세상을 버리겠노라.

술에 취해 무슨 말인들 못하랴

기분에 취한 남성이라면 무슨 호기를 부리지 못하랴.

 

술집에서 노래부른다.

노래는 고뇌하고 노래는 거칠게 몰아 붙인다.

어찌 이런 합창이 있을 수 있을까?

노래에 따라 두드리는 악기들이 더 힘차게 리듬을 탄다.

 

까르미나 부라나의 백미. 테너독창

감히 테너 성악가로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아주 높은 음역대를

일부러 뾰족한 방성으로 노래한다.

늘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노래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무대에서는 합창단의 테너 수석이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노래를 한국인이 이렇게 부를 수도 있구나.

 

술집에서 노래를 즐겨부르는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 이 음악들을 통해서 보여진다.

술이 있고 친구가 있고, 여자가 있고 음악이 있고 춤이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그 속에서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음악을 들을 자격이 없다.

 

음악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아니, 사랑이 음악을 이야기한다.

소프라노와 어린 아이들의 청아함이 공명이 그다지 좋지 않은 시민회관 홀에

울려펴졌다가 잔향이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바리톤 독창자가 마이크 앞으로 나올 때마다 기대가 된다.

가사는 잘 몰라도 분영 사랑을 얘기하고 있으리라.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틀에 박힌 사랑얘기가 아니고

독특한 방법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까르미나 부라나는 극적인 요소가 많다.

노래가 절정에 이르다가 갑자기 끊어진다.

더 극적인 요소를 보여 줄 법하다가 언제 그랬냐는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거대한 사운드.  무대 뒤로 줄 끊어진 연처럼 날라가는 음표가 보이는 듯 하다.

 

무반주 남성합창이 이어진다.

남자들끼리 골목에 모여앉아 옆집 여자를 그리워하며 시시덕거리는 것 같다.

소곤 소곤..그러다 낄낄낄...

이 곡이 그렇다. 상상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다.

 

두대의 피아노가 서로 마주보며 멜로디를 주고 받는다.

내게 오라 오라 오라.  Veni, Veni, Veni...

소프라노의 고운 목소리가 이어지고, 어린이들 합창이 어우러지며

곡은 마지막을 치닫는다.

 

운명의 여신이여, 세계의 여왕이여

가장 아름답고 정금같은 여왕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세상의 빛이여

찬양하라 세상의 장미여

브란찌프로와 여인 헬레나를...

 

운명의 여신은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그게 까르미나 부라나이다.

보헤미안의 축제를 위해 열었던 커다란 수도원의 대문이

다시 거대한 합창으로 문을 닫는다.

 

O, Fortuna를 들어보고 흥분한 이들이여

지금 오디오에 씨디를 올려 놓으라.

그리고 눈을 감으라

나머지 곡들이 당신을 또 한 번 거대한

합창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취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슬퍼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이 음악에 있다.

 

거대한 합창이 끝난 뒤 나홀로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쳤다.

이 곡은 나를 위한 곡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까?

 

오늘 공연을 보면서 씨디로만 듣던 외국의 유명합창단이 부르는 사운드를

부천시립합창단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합창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휘자의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지휘를 연주 내내 뚫어지게  바라보며

언제나 뒤에서 바라보아야만 확인되는 마에스트로의 포스가 느껴졌다.

 

손바닥의 핏줄이 터질 정도로 기립 박수를 치며 외쳤다.

부라보.. 부천시립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