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음악의 유산 (부천시립합창단 봄맞이 가곡의 밤)

carmina 2015. 3. 21. 21:05

 

 

2015. 3. 19

 

내게 클래식 음악이란 것이 제일 처음 다가온 장르는 한국가곡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집에 있었던 진공관 오디오로 큰 형님이 들으시던 LP판.

그 중 잘 들으시던 음악이 선구자와 엄정행씨가 부른 목련화였다.

그 외에도 형님은 슈베르트를 듣고,  베토벤을 들으셨다.

탐 존스를 들으실 때는 내 입에서도 저절로 따라 부르다가

그만 초등학교시절 팝송을 부르는 불량학생으로 찍혀 홈룸시간에

반장이 나를 앞으로 불러내어 자아비판을 하기도 했었다.

그게 왜 잘못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팝송을 불렀다는 이유하나로..

 

몇 해 전 작고하신 형님이 내게 유산으로 물려 주신 음악. 한국가곡...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유네스코에 무형의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가곡.

그만큼 한국 가곡은 판소리만큼이나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음악의 장르다. 

 

한국가곡을 무던히도 좋아했다.

결혼하기 전에 나도 한 권짜리 한국가곡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내도 학창시절 쓰던 한국가곡집 3권짜리를 가지고 왔기에

가끔 시간되면 아내가 피아노치며 노래하고 나도 노래하며

3권의 가곡집을 앞에서부터 맨 뒤까지 부르며 휴일을 즐기기를 참 좋아했었다.

강화도 나들길을 길벗들과 매주 걸으면서 잠시 쉴 때

길벗들이 내게 노래를 부탁하면 주로 자연과 계절이 표현된 가곡을 불렀다.

길벗들이 모두 좋아했고, 때론 다음에 부를 노래를

미리 신청해 주는 길벗도 있었다.

 

조익현 선생님이 지휘하는 부천시립합창단의 2015년 봄맞이 음악회. 한국가곡.

레퍼터리를 보니 거의 모두 눈에 익고 귀에 익은 노래들이었다.

 

단원들이 봄꽃같이 화사한 모습으로 남녀 쌍쌍이 입장한다.

마치 봄나비들이 쌍으로 날아다니며 노닐듯이...

그리고 여기 저기 피는 꽃들처럼 무대위의 대형도 일정한 규칙 없이

적당히 서 있는 모습이 흐뭇해 보인다.

누구나 아는 노래를 부를 때는 이런 연출도 필요할 것 같다.

 

'강건너 봄이 오듯'.

오래된 한국가곡집에는 없는 노래지만

임긍수씨가 작곡한 이 노래는 아마 신작가곡 중의 가장 널리 알려진 가곡일 것이다.

특히 조수미씨가 부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기에

에프엠에서 이 노래만 나오면 나는 볼륨을 높인다.

 

주로 서정적인 풍으로 작곡하는 임긍수씨의 독특한 멜로디에다가

허걸재씨가 허밍과 솔로와 합창으로 편곡한 

이 가곡은 솔로로 부르는 것보다 서정성을 더 돋보이게 한다.

아득한 곳에서 아지랭이 처럼 봄이 오는 풍경을 연상해서일까?

 

'봄이 오면', 그리고 '나물캐는 처녀'를 부르는 합창단원들의 목소리와

잠깐씩 보여주는 익살스러운 연출에 관객들이 무척 좋아한다.

조금 더 과장하게 불렀다면 관객들도 무대위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편안하게 듣는 음악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함께 하는 음악이다.

 

'봄처녀'가 멀리서 오고, 단원들이 노래의 시작과 끝을 멀리 남쪽을 응시하며 부른 '남촌'에서

어린 시절의 시골 풍경을 느끼는 것은 나 뿐만일까?

익히 듣고 부르던 합창편곡이 아니라 새로운 편곡으로 되어 있기에

더 귀를 쫑긋하게 듣는다.

 

이어지는 가곡 독창과 이중창.

테너가 나와서 부른 '내 맘의 강물'은 웬만한 요즘의 유명성악가들이

거의 모든 유명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고 부르는 노래라 처음에는 그냥 그저 그렇게 듣다가

음악의 후반으로 갈수록 놀라운 표현과 종반의 팔세토에 흠뻑 빠져 버려

부라보를 외쳤다. 나중에 기회되면 나도 저렇게 불러 봐야지.

 

김소월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꽃'

이 노래는 봄 산길을 걸을 때 마다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지만

한번도 끝까지 불러보지 못한 노래라 더욱 귀 기울여 들었다.

표정없이 부르는 소프라노와 심각한 표정으로 부르는 바리톤의

모습에서 마치 남녀의 이유있는 이별을 보는 것 같아 혼자 웃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없는 노래 '명태'

몇년 전 작고하신 바리톤 오현명씨의 명태가 제일 유명하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쉽지 않았다.

가끔 베이스하는 친구들이 이 노래를 호기있게 나와서 부르지만

노래에 위트있는 부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사람들의 감동을

못 받았었는데 오늘 명태는 어떨까?

 

단원 중의 눈에 익은 베이스 솔리스트.

명태...

가사가 무척 재미있지만 이걸 몸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노래의 맛이 죽는다.

가사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이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이 시가 되어도 좋다.

 

명태처럼 다양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선이 있을까?

명태, 동태, 생태, 노가리, 황태, 북어 등등

내가 아는 것말고도 이름이 무척 많은 것으로 안다.

 

역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성악가가 이 기대를 저 버리지 않는다.

소주잔을 꺽는 맛있는 모습과

꼬리를 흔드는 명태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모습.

그거 하나라도 이미 이 노래의 가장 핵심부분을 전한 것이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노래 중 헛 웃음 나오는 부분은 아무래도 오현명씨의

그 카리스마가 더 생각나게 한다.

 

인터미션 후 큰 형님이 좋아하시던 가곡이 이어진다.

'기다리는 마음'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 주오

 

단원 중 유독 젊은 테너가 나와 곡 중 솔로를 하는데

그간 단원 중 보지 못한 얼굴이다.

소리의 색깔이 참 부드럽고 좋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다른 솔리스트들은 악보를 가지고 나와 불러 조금 아쉬웠는데

이 단원은 솔리스트답게 암보로 노래하는데

노래하는 모습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포스가 느껴진다.

 

'동무생각'

봄의 모습이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악으로 시작되다가

갑자기 재즈 밴드가 반주하는 듯한 록비트로 이어진다.

단원들의 표정이 살아 움직인다.

Sounds Good, Looks Good.

 

오늘의 하이라이트, 테너 엄정행씨의 무대.

한국가곡의 대명사라면 이 분을 빼 놓을 수 가 없다.

한국에 가곡의 아름다움을 가장 널리 전한 성악가로

엄정행씨를 손꼽기를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한창 때나 그랬지...지금 나이도 드셨을텐데

그 시절의 목소리가 나올까 하고 아내와 반신반의했다.

왜..이 분은 특별게스트로 초청했는지 의아했는데

약간 굽은 등으로 무대에 나와 가곡 '보리밭'과 '목련화'를 부르는데

그만 노병은 죽지 않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직도 고음 내는데 주저함이 없고 아직도 젊은 시절 내가 듣던

엄정행씨 특유의 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다.

 

몇 해 전 이 분이 쓴 책 '목련꽃 진 자리 휘파람새는 잠도 안자고'라는 책에서

한 참 유명하던 시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한국 가곡이 이렇게 유명한 때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었다.

오늘 그 책을 일부러 가지고 나와 공연 후 책에 친필 사인을 받았다.

 

'청산에 살리라' 문득 팜프렛을 보니 김연준씨 작곡이 아니고

이현철씨 작곡으로 되어 있다.

선율은 비슷한데 색다른 맛이 난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이 곡을 들은 기억이 있다.

 

'금강에 살어리랏다' 현대음악으로 편곡한 이 곡도

언젠가 우리 합창단에서 비슷한 편곡으로 연주한 기억이 있다.

 

봄냄새가 물씬 풍기는 선곡들.

익히 아는 곡들이라 관객들이 따라 부르고 싶은 욕구를 미리 파악한 듯

마지막 '봄처녀'와 '희망의 나라로' 2곡은 관객들과 같이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핑계김에 가곡을 좋아하는 나도 크게 소리내어 불러본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표정이 무척 밝다.

귀에 익은 우리의 노래들.

비록 예술의 전당같이 음악애호가들이 몰리는 공연은 아니지만

많은 비용을 투자해서 적은 입장료, 공연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기에

많은 대원들이 오랜 시간 연습한 댓가를 본전도 못 뽑은 공연임을 알면서도

내가 사는 곳에서 이런 문화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는 행정에 심히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