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내 우상과 함께 한 싱어롱 (대한민국 통기타 음악 50년 기념 노래박물관 행사)

carmina 2015. 4. 19. 00:38

 

 

2015. 4. 18

 

며칠 전 부터 내가 가입한 음악카페에 대중음악평론가인 박성서씨가

대한민국 통기타 음악 50주년 행사로 남이섬에 노래박물관이 생기고

개막행사에 세시봉을 시작해서 포크가수들을 키워낸 방송 PD이자 음악평론가인 이백천씨

우리나라 DJ 1호인 최동욱씨 그리고 포크음악 전도사인 전석환씨가

대담하는 시간을 갖고 싱어롱시간도 갖는다고 공지를 올렸기에

내 눈이 초롱 초롱 빛났다. 그 이름 전석환..

 

나의 영원한 우상. 늘 스포츠 머리인 전석환씨는 내가 포크음악에 입문했을 때

제일 많이 듣던 이름이었다. 해방 이후 슬픈 트로트가 음악계를

대세이던 60년대 중반 미군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외국 팝송도 아닌 건전한 노래를

보급한다는 뜻 있는 사명을 가지고 외국의 민요를 번역하기도 하고 가사가 밝고

리듬도 활기찬 음악을 직접 작곡하여 몇 명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 몇 명의 참여가 몇 백명이 되고 수천명이 되니

방송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전국민 삼천만의 합창이 되었고

정규 TV  프로그램도 만들어 국민들에게 포크송을 가르쳤다.

그리고 서울과 인천에 Sing Along Y라는 상설프로그램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가르치고

학생들, 군인들, 노동자들을 찾아 다니며 열심히 이 사회에 밝은 노래들을 보급했었다.

노래 뿐만이 아니라 기타도 가르쳐 우리 나라에는 기타 열풍이 불고

젊은이들 사이엔 기타를 못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타는 청바지와 함께 젊은이들 모임에 절대적인 상징이 되었다.

나도 일요일 아침이면 흑백 TV앞에 앉아 '노래의 메아리'라는 프로그램을

기타치며 노래를 따라부르며 보기도 했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같은 교회에 다니던 동네 친구가

자기 삼촌이 노래를 가르치니 같이 가자고 해서 찾아 갔던 인천 Sing Along Y.

당시 인천 Sing Along Y는 전석환씨 후임으로 지금 숭실대 교수인 유수현씨가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고 그 모임에 처음 가서 처음으로 내가 노래에 재능이 있음을

아는 기회가 되었다.

 

리더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 가르치는데

나는 굳이 한 소절씩 배우지 않아도 바로 악보를 보고 노래를 따라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나 형제들로부터 음악적인 환경이라고는 거의 물려받지 못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아마 천부적인 실력은 없었어도

음악적으로 천부적인 감성은 지닌 것 같았다.

 

그 뒤로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이 모임에 거의 개근을 했고

매주 몇 곡씩 수록된 악보를 무던히도 많이 모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 인가 모은 악보 한권을 써클 선배에게 빌려 주었다가

잃어버린 뒤로 두터운 내 Sing Along Y악보는 내 보물이 되고 어떤 경우든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전석환씨를 만난다는 기쁨에 내 악보를 다시 찾아 보니

내가 젊은 시대에 전석환씨에게 노래를 배우지는 않았어도

악보를 챙겨 놓은 것이 있어 이번 행사에 사인을 받아야겠다고 하고 챙겨 넣었다.

 

토요일 아침, 평소 그런 적 없었는데 오늘은 괜히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마치 선보러 가는 총각처럼...

이 옷도 입어 보고, 혹시 젊게 보일까 해서 아들 옷도 입어보고..

 

주최측에서 서울-남이섬간의 교통편과 남이섬 입장료까지 모두 제공한다기에

아침 일찍 인사동에서 몇 몇 카페회원들을 만나 남이섬 가는 버스를 탔다.

 

토요일 시내를 빠져 나가려는 차량들의 도로체증에 서울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오늘 행사 주최하는 분에게 내 악보를 보여드리니 깜짝 놀란다.

빛 바랜 고서같이 부서질 것 같은 악보.

표지를 여니 전석환씨가 가르쳤던 1968년도 첫 주의 악보에 희미하게 전석환씨 이름이 보인다.

종이 질이 낡으니 조심스럽게 들쳐 달라는 부탁을 하고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감탄사를 연발한다.

모든 악보를 펜으로 그려서 등사한 내 악보집.

 

작년 모임 때 내가 노래하는 것을 들은 적 있는 분이라

오늘 행사 때 본인이 사회를 보니 전석환씨와 함께 앞에 나와 노래를 불러 달란다.

이런 기회가 내게 주어질 줄이야..

 

배꽃과 벚꽃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가득한 북한강길을 따라 가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더니 그 곳에서 전석환씨를 만났다.

자리에 앉아 내 악보를 보여 드리니, 신기하고 놀라워 하신다.

본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거의 4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악보.

거봐 거봐 하면서 내 존재를 묻는다.

선생님과 같은 동네가 고향이라니 더욱 반가와 하시고

악보 첫 장에 사인을 해 주셨다.

덩달아 이백천씨도 사인 해 주시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차산차해였다.

전선생님이 손에 오늘 같이 부를 악보뭉치를 들고 계시기에

들어드리겠다고 했더니 본인이 들어야 된다며 한 부를 꺼내 주시는데

눈에 익은 노래들.

사모하는 마음, 정든 그노래, 석별의 정, 그리워라, 좋아졌네 좋아졌어,

그리운 고향, 노을, 남미로 가는 길....

내가 이런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실 것이다.

그런데 악보에 이상한 점이 보인다.

세상에...이 악보를 모두 본인이 손으로 그리셨단다.

지금 이 시대에 악보를 손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80세된 연세로 그 악보를 모두 펜으,로 그리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내 우상다운 모습.

옛 전통을 고수하고 계시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남이섬입구의 넓은 주차장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차가 가득하고

뱃터에는 625때 함흥에서 군함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전쟁피난민처럼 사람들이 많다.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세월호의 영향인지

뱃터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도 적당한 인원만 태우고 출발한다.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외에

하늘을 날라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마치 군대 유격대의 외출타기처럼 높은 곳에 섬과 육지 양쪽을 연결하는 외줄을 걸어

남이섬으로 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얼마나 스릴이 있을까?

젊은이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다.

 

교통 정체로 이미 행사 시간이 지나 버렸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빨리 걸어가는데 전선생님은 나보다 더 빨리 걸어가신다.

놀라움은 계속 되고 있다.

이전에 악기박물관이 있던 건물에 포크음악 50년 행사를 알리는

대형 걸개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박물관 앞에 있는 박시춘 탄생 100주년을 기면하기 위한 노래비.

 

건물 안에 내 젊은 시절 나를 울리고 웃겼던 가수들의 정든 모습들이

가득하게 사방의 벽을 메꾸고 있다.

김정호, 김민기, 김세환, 윤형주, 송창식, 박인희, 박상규, 양희은, 한대수 등등

수없이 많은 가수들..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가수들의 대부였던 이백천씨께서 인사를 하고

젊은 시절 라디오로 통해 가슴을 콩당거리며 듣던 두 유명한 DJ분들의

환한 표정과 훤칠한 키의 전선생님의 모습이 이 시대의 음악을

내가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했노라 라고 표정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다. 

 

행사를 끝내고 무대로 돌아와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난 50년간의

포크 음악의 발자취를 대담과 함께 들으며 그 시절들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영상에 아나운서 이상벽씨가 나와 무슨 말을 하는데 이백천씨와

최동욱씨가 '에이 그게 아냐...'하시며 손사래를 치신다.

그 영상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기타하나로 젊은이들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석환선생님의 기록들이 보여진다.

나도 그 꿈많던 젊은이 중의 하나였었다.

 

영상을 마치고 선생님 올갠 리드로 싱어롱을 시작하며 나도 앞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는데 내가 주로 멜로디를 하고 선생님이 화음을 맞추셨다.

아직도 내가 젊은 시절 방송을 통해 보던 선생님의 유쾌한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노래에 대한 철저한 지론.

노래는 절대 밝은 노래들을 웃으며 불러야 세상이 밝아진다.

아직도 노래를 하며 손 동작을 따라 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랐던지

앞으로 나가 발동작까지 시범을 보이신다.

내겐 익히 아는 노래들이라 굳이 악보를 보지 않아도 열심히 선창했고

최대한 밝은 모습으로 노래할려고 애를 썼다. 

노래 중 '그리워라' 같은 노래는 원래 악보에 4분의 4박자인 것을

즉시 4분의 3박자 스윙으로 바꾸어 부르시며 내게 같이 하자고 표정으로

지시하시기에 나도 선생님의 리듬을 따라 불러 보지만 한 번도 연습해 보지 않았기에

가사를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 조금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나도 그런 류의

변박을 좋아하는지라 즐겁게 선생님과 서로 마주보며 부르고 나니 노래는 틀려야 제맛이라며

유쾌하게 넘어가신다.

 

내가 그렇게 변박의 노래를 하며 생각하기를 노래를 많이 하는 나도 겨우 따라 하는데

이런 리듬에 익숙하지 않은 변박을  저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즉석에서 따라 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선생님과 마주 보며 화음을 맞출 때의 내 기분을 남들이 알까?

교회 CCM 찬양을 많이 하는 나는 이런 노래도 후렴같은 부분은

여러번 반복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거의 있는 가사대로만 하고는 끝내셨다.

 

그렇게 아쉽지만 싱어롱을 끝내시고는 대담시간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저녁에 미8군에 행사가 있다고 급히 가야 한다며 나가시기에

인사라도 할 겸 따라 나가니 박물관측에서 못 쓰는 통기타를 들고 나와

통기타에 선생님 사인을 받았다. 아마 전시용으로 쓰겠지.

아마 박물관측에서 내가 그 시절의 싱어롱 악보 원본을 가진 것을 알았으면

기증해 달라 했을텐데 굳이 알지 못하기에 나도 기증하고픈 마음은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일행들과 남이섬을 천천히 산책하는데 수없이 많은 외국인들이

남이섬의 쭉쭉 뻗은 수목처럼 가득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적한 잔디밭으로 걸었다.

이전에는 이 곳 잔디밭에서 대학가요제가 열리기도 했었다.

 

남이섬은 내게 노래로 참 인연이 깊은 곳이다.

1979년 군대 전역 후 복학 전까지 기간에 교회에서 남이섬으로 여름 수련회를 가는데

누군가 먼저 가서 텐트칠 자리를 맡아 놓아야 한다기에 마침 내가 가진 것이

시간밖에 없어서 당시 군용 1인용 텐트인 A텐트를 가지고 하루 먼저 도착해

자리를 맡아 놓고  기다렸다. (당시는 남이섬에서 텐트를 칠 수 있었다)

 

혼자 석유 버너를 지펴 코펠에 밥을 해 먹는데 방송으로 저녁에 남이섬 강변에서

음악방송 에프엠 녹음한다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노래경연대회도 한다기에

찾아 갔더니 약간의 오디션을 거친 후에 참가하는 것으로 하고 저녁에 찾아 갔는데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노래하고 나중 시상을 하는데 학생증을 보여 달라는데

나는 복학전이라 학생증이 없다니까 1등상은 못주고 대신 노래를 제일 잘했으니

상금은 제일 많이 주었다. 그 상금을 다음 날 도착한 교회행사 진행팀들에게

전액 다 기부했더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날 참석가수인 이태원씨가 자신의 노래인 '솔개'를 부르는데

나보고 화음 넣어달라고 부탁해서 노래를 같이 하기도 했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기타를 치며 혼자 노래부르고 있는데

젊은이들 몇 명이 내 옆을 지나치다가 같이 노래하자며 내 옆에 앉아 같이 노래하는데

특히 여자 한 명의 노래 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알고 보니 그 날 낮에도 라디오 공개방송이 그 곳에서 있었는데 그 젊은이들은

당시 최고 히트가수였던 이 용의 백코러스들이었다.   

 

잔디 위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발가락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짧은 잔디의

느낌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시원하다.

 

남이섬을 나가는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긴 행렬.

늦은 시간임에도 계속 사람들이 들어 오고 있다.

남이섬을 나오니 눈 앞의 높은 곳에서 사람이 추락하고 있다.

번지점프장. 용기있는 젊은이들이 긴 줄을 몸에 묶고 뛰어 내리고 있다.

 

원래 서울가는 것도 타고 왔던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는데

워낙 차가 많이 밀리니 진즉 포기하고 전철역까지 걸어가 

가평역에서 전철과 ITX를 갈아타고 집에 돌아오는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오늘 정말 뿌듯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