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아시아방문기

서울싱잉커플즈 일본연주여행 3 (2001. 10)

carmina 2015. 6. 8. 11:50

일본 여행 3일째

 

오늘은 공연하는 날.

어제 헤어지기 전에 지휘자님께서 오늘 공연을 위해 오전의 관광코스를 취소하고 싶다는 의견이 있어 단원들의 의사를 거수로 물었더니 모두 다 오전관광은 하고 싶다고 해서 스케쥴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아침에 식당에는 여전히 내가 먼저 오는 편이고 메뉴는 어제 그제의 한식이 아니고 토스트를 시켜 먹으며 외국에 나와 있는 기쁨을 아주 조금 누렸다.

 

오늘도 모두 오쓰로 인사하며 특히 무척이나 친절한 나이 지긋한 버스 기사가 오늘도 여지없이 밝은 얼굴로 일행을 맞는다.  매번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탈 때마다 인사하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오늘은 아침에 명치신왕의 황궁을 찾기로 했다. 이 곳에서 결혼식 예비 사진을 찍는 커플이 많다 하는데 오늘은 이른 시간이고 비가 와서 그런지 볼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의 역사에 유명한 사람 하나, 명치신왕, 메이치 황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시내를 통과했다.  동경시내를 통과하다 보니 지나 간 곳을 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명치신궁의 입구에는 황거처럼 넓은 도로에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었고 이런 자갈이 사람들을 빨리 걷지 못하게 한단다.  하긴 늘 종종걸음치는 것이 일본사람들의 전통습관이니 모든 것이 이렇게 연관되어 있다. 황거입구에 커다란 나무기둥이 양쪽으로 서있고 일본 천황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홍살문같이 생긴 것이 거대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나무가 너무 거대해 이게 혹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닌가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는데 완전히 나무 하나 그 자체이다. 이 나무가 삼나무이다.

 

수없이 많은 나무 숲사이로 난 큰 길을 가니 두개의 거대한 삼나무 기둥에 일본 전통의 홍살문 같은 것이 서 있다.  혹자는 이 삼나무가 몇 개의 나무를 이어 만든 것이라 하나 자세히 보니 삼나무는 완전히 나무 한 그루였다. 이렇게 큰 나무가 있을까 하는 것은 하꼬네에 가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아이가 태어난 후 남아는 33일 여아는 32일째 되는 날 포대기에 애들을 싸가지고 와서 명치유신께 보여야 한다.  그리고 3 5 7살에 반드시 이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아마 정신적인 혼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리라.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 와 신사에 참배하고 그 해의 안녕을 비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떠 밀려 갈 정도이다. 나도 이미 몇 년 전 이러한 광경을 경험했던 터라 그 광경이 가히 짐작된다.  그리고 불교식의 시주를 동전으로 하는데 그 신궁앞에까지 가지 못하니까 동전을 던져서 신궁 주변의 기둥에는 동전 자국이 많이 패어져 있다.

 

아울러 결혼 전에도 거의 이곳 명치신궁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일본의 결혼식 문화를 들은대로 옮겨보았다.

 

일본에서 공간적인 사정 때문에 결혼하객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피로연도 일인당 약 이만엔정도 비용과 결혼답례품도 개당 약 7~8천엔정도 소모되니 많은 하객을 부를 수 없고 대략 100명정도가 보통이다. 

 

신랑은 주로 검정옷과 흰 넥타이를 입고 신부는 주로 핑크빛이나 흰색의 기모노를 입는데 기모노 한 벌이 거의 2~300만원정도를 홋가하기에 무척 부담되는 비용이라 요즘은 렌탈해서 많이 쓰는데 그래도 한 25~30만원정도 주어야 한다. 학모양의 모자, 화장등을 모두 갖추면 무게가 거의 20~25키로그램정도 나간다. 

 

신궁으로 들어가는데 왼편에 하얀 도포를 걸친 건장한 젊은이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신궁에는 전통 제례악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오늘은 제례는 기업인들이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모이는 행사라 한다.  들어갈 수 없었지만 멀리 제례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왼편에 전통 의상을 입고 제례를 드리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편에는 기업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검정양복을 입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엄숙하게 제주의 낭송을 듣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큰 북소리가 나더니 의식이 끝나고 제례자들이 일렬로 서서 걸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았고 그 사람들이 비를 맞아야 하는 마당으로 가로 지를 때는 일본 전통 우산을 하나씩 들고 가는 모습이 마치 내가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기도 했다.

 

모두 모여서 사진 하나 찍고 신궁을 빠져 나오는데 신궁 앞 선물 코너에는 운전기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커피나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다.

 

비가 오니 가까운 곳에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실내에서 구경이 가능한 곳이 국제 포럼이라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곳으로 차를 돌렸지만 비는 주룩 주룩 내리고 찾아간 국제 포럼빌딩은 오늘 따라 대부분의 시설이 문을 닫아 놓았다. 그러나 그 규모나 건축물이 보통 이상이다.

 

일행 중 건축을 전공한 단원이 열심히 단원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사이를 가로 질로 혼자 빠져 나와 건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에 들어가니 한 눈에 천정의 설계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보았던 배 건조시의 빗살처럼 생겼다. 외관도 그렇게 유선형이고 천정은 채광이 잘 되게 되어 있어 비가 오지 않는 낮에는 굳이 조명을 이용하지 않아도 책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몇 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책을 보고 있고 그 건너편 지하엔 대규모 전시장의 공간이 있으나 오늘은 아무 전시회도 없다.

 

한 쪽 구석에서 실용디자인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어 들어가 보았으나, 그다지 전시물품이 많지 않고 특별한 이슈를 찾을 수 없어 그냥 나와 다른 곳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던 중 내 눈에 아주 높은 천정을 배경으로 일본의 사무라이동상이 커다란 활을 차고 서 있다.

 

일본의 역사에 무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머리를 그렇게 상투를 틀고 양쪽으로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 버리는 것은 워낙 전쟁을 많이 하고 사람을 많이 죽이다 보니 열이 머리로 올라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다. 명예로 죽을 줄 아는 사람들이기에 할복자살의 무사 최대의 명예로 아는

사람들.  전쟁을 위해 여자는 단지 소모품으로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기에 일본의 동남아 침략시에도 무사 아니 군인들을 즐겁게 해 줄 여자들이 필요했다. 

 

어쩌면 일본 여인들을 비하하는 근거없는 소문일수도 있겠지만 사무라이들이 전쟁 중 성욕을 느낄 때 상대하는 여자들의  옷 벗는 동작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가차없이 목을 베어 버렸기에 일본 여자들이 입는 전통의상인 기모노도 무사들이 유사시에 언제라도 손을 집어 넣을 수 있고 옷을 벗을 수 있기 편하게 디자인되어 있고, 펼치면 넓은 요와 방석이 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동상 옆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긴 경사면의 곡선이 좋아 사진 하나 찍으려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어 잠시 기다렸는데 가까이 보니 우리 단원이고 그 이어 줄을 지어 우리 단원들이 내려 오고 있다.

 

우르르 모여 사진하나 찍고, 밖으로 나서려니 굵어진 빗방울이 좀처럼 그칠 줄 모르기 비가 잠시 추막한 틈을 타서 버스로 내달렸다.

 

이제 공연을 위해 공연장으로 향했다.  비는 어제보다 더 쏟아 지고 모두들 관람객이 적을까봐 걱정들이다.  공연장은 전철역이랑 바로 통해 있어 굳이 자가용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배려되어 있다.

 

일본의 28개의 구 중에서 하나인 문경구의 공연장의 시설이 어느 정도일까 하고 궁금은 했지만 공연장에 들어 서는 순간 우린 모두 입을 벌릴 정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공연자 대기실로 들어가니 잘 정돈된 테이블과 의자, 옷걸이와 코인락커룸까지 때 하나 묻지 않았고, 부서진 기물하나 조차 보이지 않는다. 공연현황을 볼 수 있는 TV가 벽에 부착되어 있고 분장을 위한 거울까지 깨진 것 하나 볼 수 없다.  이럴수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구민회관정도로만 생각했고, 휑한 공간만 생각했는데 이 곳 시설은 완전히 서울의 에술의 전당 수준이다. 

 

대기실로 가는 복도에는 한국사람과 공연을 하니 이곳 저곳에다 간단한 한국말을 일본의 언어로 붙여 놓았다. 이런 배려까지 누가 생각해 낸 것들일까?

 

무대 뒤로 들어서는데 이곳은 간단한 공연장이 아님을 깨닫는다. 오페라가 가능할 정도의 넓은 공간과 각종 시설들, 예술의 전당 같은 모양의 객석.  우리가 제대로 걸렸다. 호락호락한 공연이 아님을 직감한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지휘자님이 이 곳은 공명이 잘 되니 작은 소리로 노래하라고 지시하고, 우리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노래하고자 했다.  우리가 리허설하는 동안 일본팀 파트너인 콜샹티의 지휘자가 우리 모습을 보더니 서 있는 간격이 너무 좁다고 조금 넓혔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사이 간격을 조금 떼었더니 금방 불만이다. 옆 사람 소리가 안들린다고..

우리가 모두 자신이 없어서인가? 자신있게 자기 음을 내지 못하는 우리들이 갑자기 초라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우리의 소리가 한국에서 연습하던 대로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겨우 겨우 우리 팀에게 할당된 연습을 마치고, 이런 시민회관에서조차 아주 편안하고 깨끗하게 꾸며진 공연자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공연자 대기실에는 하얀 의자, 하얀 테이블, 하얀 벽 그리고 하얀 옷장 겸 개인 사물함이 준비되어 있는데 개인사물함은 동전을 이용하여 열고 나중에 다시 열쇠를 반납하면 코인이 나오는 식으로 되어 있어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우리의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때는 대기실에서 단원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문을 잠그는 식에 비하면 너무 대조가 되기에 이런 것조차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를 보이는 건지..

 

우리가 처음 연습하고 나중에 같이 공연하는 3팀이 각자 맡은 시간씩 연습한 후 한 자리에 모여서 200명이 넘는 전체 공연 참석자가 다같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아리랑 솔로 부분을 일본 합창단의 단원 중 한 명이 한국발음도 정확하게 거의 전문성악가 수준으로 노래하기에 우린 모두 감탄했다. 

 

전체 모인 장소에서 내가 한국 합창단 대표로 인사하는 시간이 있어, 미리 준비한 대로 한국에 수입된 일본영화 중 하나인 러브레터의 인상깊은 장면인 주인공이 손을 모으고 산너머를 향해 오겡끼데스까? 하는 모습으로 인사말을 시작했던지 일본인들의 반응이 웬지 시큰둥.. ? 이 영화가 이곳에선 유명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 영화를 볼만한 연령층이 아닌가?

 

박형이 내 인사말을 일본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하는 내 인사말에 내년에는 일본팀이 한국에 와서 같이 공연했으면 좋겠다며 한국으로 초대한다 했더니 박수가 우레같이 터진다. 

 

우리의 공연은 가히 살인적인 연주였다.  어쩌면 그리 연습 때와 판이하게 틀린지첫 곡부터 지휘자, 반주자, 노래 따로 연주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원래 어려운 곡이라 우리도 신경쓰기는 했지만 우리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우리가 듣기에도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인상과 함께 일그러지는 지휘자의 인상만이 정말 제대로 맞는 화음다웠다.

 

다행히 어려운 곡이 지나고 흥겨운 우리 민요를 노래할 때는 그런대로 화음이 제대로 맞아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 올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음이 찜찜한지 즐거운 표정이 아니다. 우리도 자칭 연주자인데 연주의 실패가 이렇게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줄이야.

 

우리의 연주 후 다른 연주팀 중 여성합창단의 공연을 객석에서 보았다. 거의 100명에 가까운 여성단원들이 노래를 하는데 나이가 할머니쯤 정도로 보이는 단원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거의 전 곡을 외워서 부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지휘자가 일본에서는 무척 유명한 사람으로 프로필로 기록되어 있다.

 

악우회라 불리는 다른 혼성합창단의 아마츄어 냄새가 많이 났고, 우리의 파트너 콜샹티는 혼성합창단이고 나이폭도 두터운데 아주 젊은 노래를 불러 주었다.  특히 헨델의 할렐루야를 편곡해서 춤으로 추는 모습은 가히 본받을만 했다.

 

마지막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좁은 무대에 빽빽이 올라가서 다같이 모여서 합동 공연을 하고 내려올 때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민족이 이렇게 노래 하나로써 전혀 의사나 감정전달이 쉬울줄이야.. 그 들이 아리랑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애절하게 부르는 화음이 그 모든 의미를 대신해 준다. 

 

그렇게 우리 부부합창단 최초로 한일합동공연은 끝나고, 우리는 비오는 동경의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버스에 몸과 마음이 피곤한 채 호텔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연주가 성공적이었던 실패작이었던 뒤풀이는 해야겠기에 호텔에 양해를 구해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을 장소만 빌리는 것으로 전세냈다.

 

레스토랑에는 다른 한 팀이 모여서 담소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우선 맥주라도 한 박스 있어야  단원에게 빨리 옷 갈아입고 내려오라 하고 기다리는 사이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일본 합창단 지휘자가 새빨간 페라리모양의 승용차를 몰고 호텔에 와서는 기린, 아사히등의 캔맥주를 잔뜩 내려놓기에 이러한 고마운 배려가 있나 하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는 급히 이미 객실로 올라간 단원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레스토랑은 우리 단원들이 편한 옷차림으로 내려오고, 한국에서 사온 각종 땅콩, 오징어등의 안주는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우리의 밝은 웃음과 이야기들은 온통 기분을 날아가게 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