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54) 크리스마스 캐롤

carmina 2015. 12. 8. 11:01

 

 

크리스마스 캐롤

 

때는 1975년 겨울,

 

당시 나는 인천 YMCA에서 중학생들의 모임을 담당하는 청년 자원봉사자였다.

그 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행사를 같이 진행하고

형같이 고민을 상담해 주는 대학생으로 지내던 그 해 겨울.

 

우리에게 한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불우한 이웃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조금 특이한 곳을 방문하는데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가질 지 모르지만

이런 것도 이질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추천해 준 곳.

창녀촌에서 도망나와 갈 곳 없는 아가씨들이

이용기술과 미용기술을 배우는 학원 겸 기숙사라 했다.

 

인천에서는 해안도시고 공업도시이다 보니

학익동 창녀촌과 항동에 옐로우하우스라는 큰 창녀촌이 2군데 있었다.

여느 창녀촌이나 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한 번 그 곳에 들어가면 포주의 교묘한 술책에 강제적으로 

늘어나는 각종 개인 빚 때문에 빠져 나오기 힘들다 한다.  

그곳 생활에 환멸을 느껴 도망치면 깡패를 동원해서 다시

데리고 오는 시지프스같은 인생들을 보호하는 곳이

부평의 협*기술학교라는 곳이었는데 이 곳에서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기술을 가르쳐

사회에서 자립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었다.

 

그 들은 남자들에 대한 혐오증과 거부감이 있지만

동생같은 학생들을 보면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우리 중학교 모임이 가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부평의 어느 한적한 길에 있는 빨간 벽돌 담으로 둘러 쌓인

커다란 집에 도착하니 작은 문 하나 열고  우리를 들어가게 한다.

 

아가씨들이 가득 모여 있는 식당에 들어가니

모두 낯선 남자들인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들에 우리들도 주춤거려야 했다.

넓은 식당 가운데는 뜨거운 난로가 발갛게 열을 내고 있고

테이블 앞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아가씨들의 모습은 남루하고

머리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표본이 되어야 하므로

모두 단정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많은 아가씨들의 머리 일부는 당시 땜통이라고 하는 충 때문에

둥그렇고 허옇게 변색되고 있었다. 

 

우리 학생들은 아가씨들의 무리로 들어가 같이 앉게 하고

내가 기타를 치며 다같이 악보 없이도 부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캐롤들을 같이 불렀다.

먼저 조용한 노래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시작해서

첫번 크리스마스 그리고 분위기가 조금씩 달아 오를 때 쯤

신나는 캐롤로 바꾸어 나가고 돌림노래로 서로 경쟁하듯이

부르게 했더니 아가씨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은 손동작 게임들을 같이 하니

웃음소리가 커지고 모두의 얼굴에선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레크레이션과 캐롤을 부르고 가지고 간 과일을 나누어 주고

따뜻한 차 한잔을 같이 하니 아가씨들이 고항집에 두고 온

동생같은 우리 중학생들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고

도닥거려 주는 등 살갑게 우리를 대했다.

 

행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원장님이 '아가씨들 동생같은 학생들과 오랜만에 즐겁게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며

고마와 했다.

 

우리 아이들도 처음에는 왜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는 뿌듯함을 느끼는 듯 했고..

나도 많은 싱얼롱을 주관했지만 그 때 만큼 보람된 날이 없었다.

 

몇 년 뒤 내가 군 생활을 부평에서 하게 되어

그 지역을 지나쳐 봤지만 그 때 어둠 속에 찾아간 집을 찾지 못했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차가운 난로를 뜨겁게 만들어 주위를 훈훈하게 만드는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