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아시아방문기

서울 싱잉커플즈 일본 연주여행 후기 (2001)

carmina 2015. 12. 8. 13:00

 

 

내가 노래하는 서울싱잉커플즈에서 2001년도에 다녀온

일본 연주여행기를 이제야 올립니다.

당시 글을 쓰다가 내 느낌으로 써야 할 여행기를

여행기간 내내 가이드가 해 주었던 말만 옮겨 적는 것 같아

후에 쓰기를 포기했습니다만 이제서야 오래 전 파일 속에서 찾아 내

여기 실어 봅니다.

 

 

일본 연주 여행

 

일본에서 도착한 날 밤에 그간 장모님 댁에서 지내고 있었던 딸을 데리러 차를 몰고 가면서 갑자기 외친 말.  야. 정말 즐거웠다.”

 

그래. 정말 즐거웠다.  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추억이 또 하나 만들어진 날이었기에 그 즐거움의 마음을 혼자 미소 지으며 행복해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크게 외치며 표현하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으리라.

 

사람이 일생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하 웃으며 지낼 수 있을까? 한 1000분의 1? 하루가 1440분이니 하루에 1.4분? 그래. 아마 걱정 반 근심 반 정도 가지고 사는 보통사람이라면 그 정도 될 거야.  그런데 이번 일본 여행에는 그 지수가 아마 1000분의 200 정도는 되었을거야.

 

음악이라는 것만 있어도 나에겐 즐거움의 세상인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며칠간의 생활, 그리고 또 내가 음악 다음으로 좋아하는 여행까지  이런 기회가 내 일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올해 합창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몇 년 전부터 일본에 유학 가서 8년째 살고 있는 박형이랑 의논해 왔던 일본 공연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유럽음악여행을 다녀 온 지도 몇 년이 지나 단원들도 해외로 가고 싶다는 희망과, 11월의 공연 전까지의 긴 여백을 채우기에는 아주 좋은 프로젝트라 가능성을 타진하니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단원들의 일본공연에 대한 참가 의사를 묻고 개략적인 추진계획을 알려 주며 잘만 하면 스폰서를 받아 비행기 요금 정도면 다녀 올 수도 있겠다는 언질도 주었다.  그러나 진행 과정에서 교과서 문제, 일본 수상의 신사 참배 강행등으로 한.일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이에 따라 한국. 일본의 문화 교류는 감히 입도 벙긋 못할 정도로 정부 측에서 강경하게 나온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제의 급락적인 하강으로 예정되었던 스폰서 금액의 3분의 1 정도 밖에 지원받을 수 없었다.

 

우리 단원들의 사정상 추석 연휴밖에 부부가 해외 나들이 할 기회가 없기에 비행기 요금도 성수기의 가장 비싼 요금을 물어야 했고, 스폰서 비용도 축소됨에 따라 단원들의 마음도 차츰 멀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합창단의 발전을 위해 계획했던 공연은 실행하기로 합의했으나 당초 계획했던 인원에 비해서 몇 커플이 여러가지 이유로 중도하차했다.

 

인천공항이 생긴 이래 처음 외국을 나가 보는 날.  부천에서 인천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라 마침 김포공항에 종일 주차 요금이 5000원으로 대폭 변경했다는 뉴스가 있어 주차요금을 5일치를 내는 것이 버스나 택시 이용하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겠다 싶었는데 더 경제적인 방법이 저절로 생겼다.

 

가까이에 사는 최근에 입단단원이 아침에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이렇게 고마울데가..  아침 6시에 우리 집에 오겠다기에 저녁에 아이들에게 추석 연휴기간동안의 행동지침 및 생활 지침을 모두 알려 주고 짐 정리하고 밤 12시가 훨씬 더 지난 시간에 2개의 알람 시계를 5시 20분에 맞추어 놓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가 받아 보니 공항까지 우리를 데려다 준다는 단원이 한 20분 정도 늦게 출발해도 될 것 같다기에 시계를 보니, 아차 지금 몇 시냐6시 5분전.  이런 황당한 일이  1개의 자명종시계는 먹통이고 또 하나는 오후 5시 20분에 맞추어져 있다. 만약 합창단원이 아침 시간에 전화를 안 걸었다면 꼼짝없이 늦잠으로 일본행이 좌절될 뻔 했다.

 

새삼 미국 휴스톤 출장후 귀국시에 호텔에 모닝콜을 부탁해 놓고는 내가 지난 밤 모뎀을 쓰느라 전화코드를 빼 놓고는 까맣게 잊어 버려 허둥대던 일이 생각났다. 

 

같이 가는 합창단원도 지난 밤에 새벽 2시 넘어 잠이 들었다고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을 보인다.  인천공항을 가기 위해서는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인천 공항 IC로 가는 것만 생각했는데 고속도로 톨케이트비가 저렴한 다른 길이 있다며 계양 방면으로 핸들을 돌린다.

 

계양산으로 가는 길은 어릴 때 그리고 군 시절에 그토록 황량한 곳이었는데 어느 새 아파트와 공장지대가 가득 차 버렸다.  그 곳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10 키로 완전군장 구보를 뛰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25년정도이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 내게 남은 것은 흰 머리와 허약해진 기력, 고지식한 생각들만 가득차 버렸으니 세월이 이렇게 지나가는 구나 생각한다.

 

북부 IC를 통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 비용이 3000원. 가격은 절반이긴 하지만 3000원치 영종대교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가 버렸다. 이 쪽으로 가면 영종대교위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대교 밑으로 달리게 되어 있다.  대교 밑의 도로는 앞으로 건설될 전철과 평행으로 달린다. 

 

아침에 허둥대느라 면도도 못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모임 시간인 7시에는 늦지 않았다. 단원 모두들이 일본가서 저녁에 출출할 때 먹으라고 빵을 잔뜩 사서 챙겨 오는 고마운 마음씨의 아저씨와 함께 출국장으로 올라가니 벌써 많은 대원들이 모여서 서성대고 있다.

 

밝은 미소들, 아들부부 여행간다고 배웅나오신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 여행가신다고 딸이 배웅을 나왔과 단원들 배웅을 위해 이른 시간에 온 가족이 다 출동한 못가는 대원들도 있다.

 

아침도 못먹고 나왔기에 몇 단원과 함께 카페테리아를 찾아 갔다가 모든 음식들이 비싸서 간단하게 먹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래도 스낵코너가 하나 생겨서 비교적 작은 금액으로 따끈한 국물이 있는 우동을 즐겼다. 

 

점점 비싸지는 공항 이용료를 내고 짐검사를 하니 평소에는 문제없던 스위스제 속칭 맥가이버 칼 때문에 보안 검사에 걸렸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가 이 칼로 자행된 것이라 하니  보관했다가 나중에 도착해서 찾으란다.

 

평소같으면 비행기를 타자마자 무슨 영화를 볼 수 있을지 궁금해 기내 잡지부터 펼치는데 이번엔 아침을 주는 지가 더 궁금하다.  아직은 조용한 아침. 웃음꽃이 피어나기 전이다. 모두 일찍 나와서 그런지 기내에서도 잠을 청하는 모습들이 더 많아 보인다.

 

일본에 도착해, 막내 단원의 짐을 누가 다른 사람이 가지고 나갔다며 당황해 하고 있다.  짐의 외관이 너무 비슷해 저질러진 실수. 그러나 이 곳에서부터 일본 사람들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나온다.  손님에게 그런 신고를 받자 마자 잘못 가지고 간 승객을 찾느라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가 한참 만에 우리 단원의 짐을 찾아 가지고 온다. 또 한 단원은 워낙 웃음에 빠져서인지 그만 자기 짐도 찾지 않고 그냥 나와 버리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이 때부터 우리는 웃음과 터지는 요절복통에 정신을 빼 놓고 다녔다.

 

마중나오기로 한 박형 부부가 공항에 얼굴을 비치지 않아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핸드 폰 번호가 적혀 있는 전자수첩의 데이터가 며칠 전 몽땅 날라가는 사고가 생겨 이런 때 난감하다.  직장 다닐 때 자주 만나던 일본 거래처의 손님 전화 번호도 잊어 버려 이번공연에 초대도 못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40대로 보이는 여자 가이드. 이름도 일본식 이름이다. 김양자. 말이 또렷하고 여행 내내 해박한 일본 지식을 보여 주었다.  일본에만 있었다면 한국의 실정을 잘 모를텐데 한국 사정도 잘 알고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도 폭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 어느 하나도 막힘이 없다.

 

나리타 공항은 시바현에 있는 작은 위성도시에 있는데 이 곳은 일본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관동지방에 있어 겨울에도 섭씨 4도를 웃돈다고 한다. 그런 열대성 기후이기에 나무가 잘 자라고 따라서 목조 건물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이 곳에서 자라는 나무는 습기를 머금고 있어 뜨거운 열을 방지하기에 주택 재목으로 알맞다고 한다.  또한 지진이나 화산이 많은 나라이기에 콘크리트나 석재 건물보다는 나무 건물이 지어야 안전하고 유리창 하나 조차도 지진에 깨져도 안전한 강화 유리도 만들어져 있다 한다.

 

모든 도로가 겨우 왕복 2차선에 불과하지만 차가 막히는 적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일본은 길가에 장시간 주차해 놓는 경우가 거의 없어 이렇게 도로가 좁아도 차가 다니는 데는 불편이 없음을 이미 체험한지 오래다.  비가 자주 오지만 도로사정이 좋아 물이 고이거나 그로 인해 물이 튀겨서 지저분하지 않고 고속도로 또한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어 도로는 늘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  비가 자주 와 도로에 먼지도 없고 차 또한 먼지가 끼어 있는 차를 보기 힘들다. 이는 일본의 차의 광택 기술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어 그렇기도 한단다.

 

늘 지진이 많은 나라라 가옥의 난방은 연료를 때우지 않고 주로 다다미로 지내는 일본은 그 다다미에 벌레라던가 지저분한 것들이 많아 첨단 기술을 이용해 다다미를 살균하고 세척하는 방법이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모두 베란다에 따뜻한 태양의 기운을 담기 위해 요와 이불을 널어 놓는다.  내일과 모레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가 거의 틀림없이 맞는다 하니 오늘 따라 유난히 아파트나 단독주택에 이불을 걸어 놓은 집이 많다.

 

일본에 많이 와 보았지만 이렇게 일본인의 생활 습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조금 더 적어 보았다. 

 

일본도 요즘 한류(韓流)가 불어 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들이 대단히 인기라 한다. 우선 소주는 진로 소주가 단연 인기이지만 우리 같이 스트레이트로 먹는 것이 아니고 거의 칵테일을 해서 마신다. 이들은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고 거의 즐기기 위해 마시기에 우리같이 폭주는 하지 않는다.

 

한국김치에 대한 열풍은 가히 최고조에 달해 김치를 다이어트 식품으로 생각하여 여성들에게 인기이고 우리 김치의 매운 맛에 반해서 모두 눈물을 흘려가며 억지로 먹는다고 한다. 김치의 매운 맛을 즐기다가 이젠 고추장까지 한국산을 먹으며 살빼기에 열중인 일본 여자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일본..  이제는 평범한 것도 싫을 세대가 되었지.

 

일본 민족은 남방민족이라 얼굴이 그다지 이쁘지 않다. 필리핀 여자나 인도네시아 여자들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 들창코, 못생긴 치아, 얼굴에 검은 점이 많고 키도 작고 늘 자기 얼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들과 같은 동양인인 한국 여자들이 자기들 모습보다 나은 비결을 매운 음식에서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국음식을 즐겨 먹고 요즘은 또 한국부인들이 찜질방과 목욕탕에서 가서 때미는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한국에서 특별히 초청되어 온 목욕탕 때밀이 선생들이 때밀이 교습을 강의할 정도라 한다.  일본은 이러한 것에 대한 제도를 잘 만들어서 때밀이도 자격증이 있어야 영업을 할 수 있게 했다.

 

일본의 이러한 상술에 대해서 김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몇 천년을 김치를 먹었지만 미국 FDA에 규격을 인정받을 만한 김치 제조 매뉴얼과 효능에 대한 매뉴얼이 없는데 일본에서 이러한 매뉴얼 및 국제 표준에 맞게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 기무치란 이름으로 상표를 먼저 등록하는 바람에 국가적으로 망신당한 적이 있다. 또한 전주 비빔밥도 맛의 비결을 각종 재료의 배합량에 있다고 생각하여 비빔밥 자동 제조기를 만들 정도이니 감히 일본의 상업적인 마인드에 혀를 내두른다.

 

기내에서 아침을 먹은 지 몇 시간도 안되었는데 공항 근처에서 점심을 먹는단다. 많은 인원이 움직이기에 갑자기 일정을 바꿀 수 없어 모두 따르기로 한다. 식당은 부페로 마련되어 있고 샤브샤브가 가능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모두들 제일 먼저 스시가 있는 곳에 줄을 지어 선다.  조용하던 일본 식당에 갑자기 한국사람들 때문에 왁자지껄하여 먼저 와서 식사하던 일본인 몇 명이 조금 언짢은 눈치다.

 

한 테이블에서 샤브샤브에 김치를 넣어 만든 김치 칼국수가 이국이라 그런지 더욱 맛이 들어 있다.  본격적으로 보는 일본 말 히라가나, 가타가나들을 하나 하나 짚어 본다.  이제 이 말이 이렇게 생소할 수가 20년 전만 해도 일본말과 글을 보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웠는데 이젠 동사 변화하나 각종 부사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우~ 몰려 식사하고 버스는 동경 시내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동경의 거리들. 눈을 들어 공중을 보면 한국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지만, 수평으로 보는 일본의 거리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1억이 넘는 인구에 비해 그리 많은 않은 차량 소통, 깨끗한 거리, 잘 정리된 빌딩의 간판들, 깨끗한 쓰레기통 이루 말할수 없이 많을 정도의 정리 정돈된 것들이 일본에 왔음을 알게 해 준다.

 

사거리 신호도 보행 신호 한 번에 좌..대각선 모두 건너게 하고, 별로 많지 않은 버스들로 거리는 그다지 붐비지 않는다. 동경에서는 98프로의 사람들이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을 이용하고, 승용차를 타거나 버스는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탄다 한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은 일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반드시 내 행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그 들.  정이 없는 민족인가? 아니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아니,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한 정의는 어디에도 없을거야.

토요일이라 조금은 한산한 동경시내를 달려 호텔에 체크인 하기 전에 우선 현재 천황이 살고 있다는 황거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 곳은 황거를 둘러 쌓고 있는 연못이 있고 황거의 담장 뒤에 또 연못이 있어 적의 습격으로부터 천황을 보호했다 한다. 

 

일본 사람들은 천황은 살아 있는 신이라 생각하기에 천황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 복종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때 가미가제 특공대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폭했고 지난 번 천황이 죽었을 때도 일본인 3명이나 할복 자살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본에 기독교의 전도가 어려운 것은 이 사람들이 천황을 신으로 생각하는데 굳이 다른 신을 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황거로 가는 길은 탁 트인 공간에 깨끗하게 다듬어진 잔디, 그리고 듬성 듬성 소나무 숲을 지나 작은 자갈들이 깔린 길로 가야 한다.  소나무 밑에서 오수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잔디가 어찌나 푹신한지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어느 여성단원은 급기야 신발을 벗어 들고 걷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황거의 출입이 금지되기에 그냥 먼 발치서만 바라다 보고 신년 초에는 천황이 황거 안에서 국민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을 메운다고 한다.

 

황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단원들이 하는 말 하나 하나를 모두 성적인 것으로 묘사해 생각하는 바람에 모두들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이러한 우리들의 야한 이야기는 여행 내내 얼굴 근육이 아플 정도로 박장대소하며 웃을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황거에서 잠시 머물고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아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상가 타운인 아키하바라를 방문했다.  일본에 오면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이 곳이다. 내가 컴퓨터 쪽에 관심이 많고 이 곳에 오면 앞으로 우리 전자 산업이 대충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 곳 아키하바라는 주로 내수용 전자제품만을 취급한다고 한다. 가끔 이 곳에서 물건을 사면 한국과 전압이 틀려 늘 불편했다.  몇 년전 왔을 때는 GPS 시스템이 참 인기를 끌었는데 이번에는 온통 핸드폰 전시장이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핸드폰이 가게들마다 그득하고 MD 들이 여러가지가 출시되어 있다.

 

혼자 다니면 이것 저것 차근 차근 볼 텐데 일행이 있어 그냥 우리 아이들 선물로 시계하나 씩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키하바라는 사람들로 붐비고 일본 특유의 물건들이

 

저녁에 있을 일본 합창단의 환영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3일간 우리 숙소가 될 YMCA 호텔로 향했다.  이 호텔은 한국 YMCA에서 운영하는 호텔로 현관 앞에 삼일운동 전에 2.8 독립선언이 이 곳에서 있었다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 때 호텔의 경영난으로 매각처지에 있었으나, 재일동포와 한국에서의 후원으로 매각은 모면했단다.

 

우리 인원이 40명을 넘으나 호텔의 트윈 룸 숫자가 우리 부부 인원 수보다 적어 어쩔 수 없이 두 부부는 싱글에서 따로 자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하기에 누구 다른 사람보고 해외에 까지 와서 따로 자라는 부탁을 할 수 없어 진행을 맡은 총무 부부와 우리 부부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싱글 룸을 사용하기로 했다.

 

각층마다 복도에 오랜 손 때가 묻은 책들이 꽂혀 있지만 대부분 전집류로 보기 힘든 것들이다. 대개의 일본 호텔들이 이렇게 복도에 책을 두는데 단편 소설들을 주로 비치하는데 이 곳은 아마 형식적으로 해 놓은 것 같다.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저녁에 일본 합창단체들이 준비한 환영식장으로 이동했다.  환영회를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는 이미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계획서를 보았던 터라 알고는 있었지만 홀에 들어 가자 마자 우린 모두 조금씩 놀랐다. 

 

넓은 홀에 목에 소속 합창단 이름 자기 이름을 크게 써서 건 여자 남자들이 열심히 음식테이블을 정리하고 있고 우리에게도 명찰이 하나씩 주어졌다. 비록 허름하게 생긴 명찰이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과 만날 때 이름이라도 알고 있으면 대화가 쉽겠다라는 생각에 이런 준비를 해 둔 일본인들의 아이디어가 본받을 만 했다.

 

초밥, 주먹밥, 각종 과일, 스낵 맥주 등등 차려 놓은 음식의 푸짐함도 놀랐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말로 인사하는 내용을 쪽지나 혹은 한글 안내 책자를 가져와, 머쓱해 하는 우리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잘 표현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친절을 베푸느라고 열심인 그들의 모습들이 서먹한 우리들을 기쁘게 하고, 인사를 한 일본측 지휘자의 인사가 우리를 웃음으로 시작하게 만들었다.

여자의 치마와 인사는 짧을수록 좋다며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세요로 환영 인사를 끝내는 그의 재치에 우린 한바탕 웃어 버렸다.

 

우리가 배 고플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인사보다 우선은 먹기를 권했고, 먹으며 자연스레 우리 일행들은 테이블 앞으로 나와 일본측 사람들과 잘 안되는 영어, 일본어지만 섞어서 이야기하느라 우린 서로 웃음 반, 손짓 반으로 즐거운 만남을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유독 영어를 못하지만 그 중 영어를 떠듬거리며 할 수 있는 젊은 단원들이 있어 대충 상대 합창단의 성격을 알 수 있었고, 맥주잔에 조금이라도 맥주가 없으며 즉시 즉시 와서 맥주를 따라주는 이네들의 주도를 알 수 있었다.  늘 손님의 잔은 차 있어야 한다.

 

같이 공연할 일본 3개 단체 중 두 팀은 혼성 합창단이고 한 팀은 여성합창단인데 비교적 나이들이 많이 이번 공연을 같이 주관한 콜 샹티는 젊은 멤버들도 많아, 그 들의 공연이 자못 기대되었다. 

 

게임을 준비했다 하는데 보통 우리 나라에서도 하는 2인 3각 그리고 귓속말로 말 전하기. 일본은 우리 한국말을, 우리는 일본말을 모두들 즐거움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다가 사회를 보는 박형에게 같이 노래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한 후 우리가 한국에서 준비한 악보를 모두 전해 주었다.  뜻도 없는 말이지만 멜로디 하나로 우린 모두 한 마음이 되었다.  다바다바담. 다바다바담.  귀에 익은 멜로디.  거기에 무슨 언어가 필요 있으랴, 무슨 가사의 이해가 필요하며 무슨 국가간의 이해가 필요할까.. 그냥 우리는 노래를 좋아하는 세계인일 뿐인 것을

 

공연이 모두 끝나고 모두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우린 모두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모두 차에 올라 탄 후에도 그들은 버스 밖에서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있었고, 우리 또한 잠시나마 같이 했던 즐거운 시간들로 미소로 그리고 손을 흔들어 화음을 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루가 갔다. 오늘은 모두 피곤한지 저녁에 호텔 로비에 서성이는 사람없이 모두 일찍 정해 놓은 방으로 들어가 내일을 준비했다.

 

좁은 방에 들어 가 겨우 겨우 몸을 옴추릴만한 샤워장에서 하루를 씻어 내고 있는데 아내가 방에서 소리를 지른다. 새끼 손가락만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빠르게 벽을 횡단하고 있어 일격에 박살내 버렸다.  모든 것이 조그마한 일본에 가끔 이렇게 큰 것도 있구나.

 

 

 

 

 

일본 연주 2일째.

 

지난 밤 좁은 방에서 따로 자야했다. 아내는 침대 위에서 나는 침대 아래서.. 대개 외국의 침대는 싱글이라도 침대 하나에 둘이 잘 만큼 넉넉하게 큰 편인데 이곳은 그 나마 허용되지 않는 일본이기에

 

어디선가 찬 바람이 바닥을 통해 들어와 내 발 사이를 휘집고 들어 옴을 느끼며 밤새 뒤척였다.  잠을 설쳐서 그런지 아침에 일찍 잠이 뜨고 식사 예정시간이 8시 보다 일찍 식당으로 내려가니 나이 드신 단원 한 분이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일본이니까 일본말로 인사하고 식사를 달라 하니 야채 때문에 4사람이 앉아야 식사를 준단다.  그런가 보다 하고 다른 단원 올 때까지 기다려 갈비탕 한 그릇을 받았는데 야채라는 것이 김치 하나 나물하나.  아니, 이 것을 4사람분 야채라고 기다리라고 했던가?

 

하도 어이가 없어 일본에 와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역시 식당에 먼저 내려 오는 사람들은 모두 고참단원들이다.  밝은 얼굴들, 이렇게 단원들이 아침을 함께 할 때마다 우린 무언가 즐거움의 행사 속에 있다.

 

오늘은 주일. 오전엔 한국인 교회와 오후엔 일본인 교회에서 찬양해야 한다.  일본의 아침거리를 보고 싶어 아내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우리가 있는 YMCA 호텔은 학원가에 있어 호텔 주위에 모두 학교 또는 학원들로 가득 차 있다. 

 

아침에 호텔 앞 여자중학교 같은 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듯한 아이들이 열심히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 정겨워 보인다. 앞치마를 두른 아이들이 마당에서 무언가를 나르고 그릇을 준비하고 김이 모락 모락나는 그릇도 보인다. 

 

깨끗한 학원가 골목을 지나는데 어느 학원 앞에 비닐봉투가 바람에 날리고 있는데 갑자기 학원 안에서 경비보는 아저씨가 나오더니 비닐봉투를 주워가 버린다.  아하. 이게 깨끗한 비결이구나.  버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 앞은 자기가 치운다. 이 광경에서 우리나라의 완장이란 소설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완장만 차면, 모자만 썼다 하면 제복만 입었다 하면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의 우리 나라와 제복만 입었다 하면 자기가 맡은 일이 천직이려니 생각하는 일본.  도대체 우리 나라의 이런 사고 방식은 언제나 바뀔 수 있을까?

 

이런 모습은 일본의 어디가나 볼 수 있다. 길에서 도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의 제복이 그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제복이 흐트러지지 않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나 지하철의 안내원까지도 감히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다.

 

주일 아침인데도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등교를 하고 있다. 짧은 치마, 그다지 미끈하지 않은 다리, 무릅가까이 올린 양말들,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다. 일본에서는 중고등학생은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한단다.  치마 길이는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더 짧아지고

 

일본식 24시간 점포와 도쿄 돔 호텔이 우뚝 서 있는 배경으로 사진 하나 찍고 아침 집합 시간이 가까워 호텔로 돌아오고 있는 깨끗한 거리의 도로 한편에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어젯 밤 젊은이들이 이 곳에 머물렀는지 그냥 길거리에 꽁초를 버린 것 같다.

 

꽁초를 유심히 살펴 보니 하나같이 휠터가까이 태운 알뜰함을 보여준다. 낭비하지 않는 이 들의 습관, 작은 것이 습관이 되어서 욕심까지도 적은 사람들. 그러나 나라의 꿈은 커서 세상을 집어 삼킬려 하는 사람들

 

가이드가 아침인사말을 가르쳐 주었다. 보통 아침에는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하는데 이것마저 길다고 느껴진 줄이기의 명수 일본사람들은 오쓰로 간략하게 인사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인사할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 이후로 우리의 아침 인사는 누구나 오쓰가 되었다.  또한 남의 말을 경청하기 좋아하는 일본인은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마다 아! 스바라시 (아, 훌륭하네요.) 하며 감탄한다 하여 우리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스바라시를 외쳤다.

 

비가 오는 주일 아침, 이미 전날부터 비가 오는 것으로 예고가 되어 있고, 기상예보는 거의 맞춘다는 일본이기에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우산을 준비해 왔지만 다른 사람들 것은 우산을 한 25개 정도 미리 준비한 버스기사의 친절함을 이용해야 했다. 

 

일본은 태풍이 무척 많다. 일년에 한 50번 정도  태풍, 해일, 화산, 지진등 워낙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신이 많다. 길가의 모든 것이 신이고 모든 것들에게 아무 일 없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한다. 

 

일본의 거리는 유난히 신호가 많지만 교통위반을 지키지 않는 운전자는 많지 않다. 길도 좁지만 그 좁을 길을 달릴 때 방해하는 시설물이나 도로변 주차 같은 것이 없어 도로가 좁아도 차량소통에는 지장이 없다.

 

비가 추적 추적 오는 날 버스 창문 너머로 영구차가 보인다. 리무진 승용차의 위에 절의 지붕처럼 모양을 만들어 관을 올렸다.  일본은 죽으면 누구나 다 화장을 하기에 일본의 산하에서 무덤은 찾아 보기 힘들다.  가끔 고속도로변에 유럽처럼 공동묘지가 있는 것이 보이긴 하지만 산 기슭에는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하나 볼 수 없다.

 

이전엔 사람이 죽으면 화장한 재를 49일 동안 집에 모셔 두었다 한다. 49일 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상주와 친한 친구도 매일 정성을 들여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웬만한 친구는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같이 하지 못하기에 그 정도 고락을 같이 하지 못할 사람은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게 초상기일동안 사람이 찾아 올 수 없기에 이들은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닌 다음에야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한다.  그래서 더욱 남에게 마음을 열기 어렵고, 친절하게 하는 것과 마음을 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들은 이렇게 저녁 시간에 혼자 하는 생활에 익숙해 있기에 정밀제품을 만드는 공업이 발달되었고 특히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하기에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 혹은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분야는 거의 전집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한다.

 

하긴 내가 회사 다닐 때 일본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손바닥만한 두터운 노트에 빼곡하게 필기가 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사양서도 큰 A4사이즈의 책으로 가지고 다니지 않고 책을 축소해 크기를 반으로 줄여 가지고 다니기에 하도 그것이 편리해 보여 우리도 출장 시에는 항상 그렇게 책을 축소 복사해 다니곤 했다.

 

혼자 하는 잡기 중에 제일 좋은 것이 일본에 흔하디 흔한 빠징코.  누구랑 의논하지 않고 혼자만의 결정으로 돈을 벌기도 하고 잃기도 하기에 스스로의 판단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국민성 때문에 빠징코가 이 사람들 적성에 맞고, 빠징코 사업이 대단히 번창한 사업인데 일본 빠징코 사업의 98프로는 재일교포가 운영한다고 한다.

 

가이드는 교회가기 전까지 부지런히 일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일본사람들은 태생이 왜인이라 신체가 작아서 큰 사람에 대한 동경이 대단하다. 그래서 일본에서 유명한 스포츠가 큰 사람들이 겨루는 일본 씨름 쓰모다.  옛날에는 제사 때 큰 사람을 앞장 세우곤 했기에 큰 사람을 모아서 별도로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큰 사람이 점점 줄어드니 외국에서 일본계의 큰 사람을 수입해서 쓰모를 하게 했다. 대표적인 외국계 쓰모 선수가 하와이 태생의 고니시키다.  고니시키는 일본의 유명한 연예인과 결혼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그 문하생이 무척 많았다 한다.

 

언젠가 고니시키의 다큐먼터리를 하는데 고니시키의 팬티 안에 정상인의 남자 5명이 들어 가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다.  이들은 워낙 신체가 크기에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특별 제작된다. 변기라던가, 차량이라던가, 집의 구조라던가

 

쓰모 선수들은 화장실에서 일을 본 후 혼자 휴지로 뒷처리를 할 수 없기에 별로 문하생이 그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일 때문에 절대적으로 제자들이 필요하고 자기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 칼로리가 높은 양고기를 많이 먹는다. 이들의 기념관에는 신체중의 머리카락을 보관한다. 일본의 스포츠나 연예인들 중에 한국계가 상당히 많지만 숨기는 경우가 많다 한다.

 

오늘 오전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한인침례교회. 이런 비싼 동경에서 번듯한 건물하나 갖기 어려운데 한인 침례교회는 그래도 자그마하지만 4층짜리 교회건물을 갖고 있다. 몇 년 전 이 곳에 왔을 때는 남의 건물을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그 건물이 헐리는 바람에 이 곳에 새로 지었다.  친구가 내부 인테리어 설계를 하고 친구 아내가 성가대 지휘, 그리고 딸이 피아노 반주를 한다.  떠날 때는 코흘리개 어린애였는데 벌써 장성해서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배실 의자의 반 이상을 우리 단원들이 앉고 나머지 반은 교인들이 겨우 채울 정도의 작은 공간에서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몇 분이랑, 영락없이 한국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친근한 얼굴들.  목사님은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렇게 작은 교회라도 동경에서 5번째 안에 드는 큰 교회라는 것을 알아 달라 하니 일본에서의 기독교 선교활동이 얼마나 힘든지 가히 짐작할 정도이다.

 

찬송가는 한국말로 부르는데 어느 여자 분의 대표기도는 일본말로 기도한다.  그래도 모두 다 알아 듣겠지.  은혜로운 찬양, 올라설 자리도 없는 좁은 공간에 힘차게 찬양하니 듣는 성도들이 눈이 밝아 진다.  우리의 소리를 혼자 듣기 안타까웠던 일본말로 기도하시던 여자 집사님이 닫혀 있는 유아실의 문을 조금 열어 둔다.

 

한 사람이라도 우리의 노래가 필요한 곳에서는 노래를 하고싶다. 그 곳이 미리 마련된 장소이건 혹은 노래할 수 없는 악조건이건 우리의 노래를 듣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노래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많이 사용해야 달란트가 더 커질 테니까..

 

예배 후 일본 전통의 고기덮밥을 모두 나누어 먹는 중 우리 단원 중 수학교사인 분이 우연히 그 곳 교회의 교인으로 있는 제자 청년을 만나 반가운 해후를 했다. 나 또한 그 곳 교인 중 내가 잘 아는 분의 친구를 만나 인사를 하고

 

그렇게 오전에 한인 교회 예배를 마치고 오후에 있을 일본 침례교회 방문을 위해 약간의 시

안된다는 의견이 더 지배적이어서 예상 시간 보다 조금 일찍 일본 침례교회에 도착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고층 아파트 숲 가운데 우리네 전통 형식의 교회가 있다.  일본인 교회, 일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과연 그 들의 신앙은 어떠할까.. 왜 아프리카나 동남아인의 교회는 대충 어떤 모습인지 연상이 되는데 일본인 교회는 쉽게 상상이 안되는 걸까?

 

오후에 찬양 예배시간에 우리의 찬양이 준비되어 있어 교인들이 그다지 많을 것 같지 않다는 사전 이야기가 있었고 비가 조금씩 내리는 오후 우리가 들어 간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교회 정문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조금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따뜻한 느낌의 목조 바닥 및 의자에 천정은 콘크리트 구조를 페인트칠 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내 모든 것 벗어 던지고 주님께 온다는 의미일까? 

 

이 교회의 목사님은 다카끼라는 일본인인데 목회하시기 이전에 검사생활을 하셨으나 부르심을 받아 목회를 시작하셨다하는데 말씀이 무척 가슴깊이 와 닿는 설교를 들려 주셨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씀으로는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이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린 하나님 안에서 모두 같으니 하나님 안에서 서로 존중해야 한다. 어차피 천국에 올라가면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천국시민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고 서로의 존재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 곳은 일본 교회지만 부목사님이 젊은 한국인으로 음악목사님으로 재직하신단다. 기타를 들고 리드하는 목사님과 베이스기타를 든 턱수염의 일본인.  그들은 서로 민족이 다르고 말이 다르지만 역시 음악 안에서 하나님의 찬양을 한 목소리로 인도할 수 있다.

 

무척이나 잘 울리는 성전안에서 우린 마음속으로 힘찬 찬양을 불렀다. 성도들 중 맨 앞에서 뚱뚱한 몸매의 일본인이 얼마나 가슴에 손을 모으고 기쁜 얼굴로 찬양을 듣는지 부르는 내가 눈시울이 뜨거웠고, 어떤 남자 분은 가사의 내용도 전달되지 않을텐데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었다. 바로 이게 우리가 찬양하는 즐거움이다. 어찌 그 기분을 다른 사람들이 알랴?

 

연주가 끝나고 모두 함께 일어나 다 같이 찬양을 하니 가슴이 뿌듯하다. 일본차를 대접하며 교인들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데 그 중 한 일본인이 한국말을 떠듬 떠듬 제법하고 있기에 물어 보니 한국 가곡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웠단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알게 되었고 이젠 찬양이 좋단다. 할렐루야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떠듬 떠듬 기억을 되살려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안녕을 고하고 나오니 비가 부슬 부슬 자 이제는 어디로 갈까나

 

일본의 역사에 유명한 사람 하나, 명치신왕, 메이치 황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시내를 통과했다.  동경시내를 통과하다 보니 지나 간 곳을 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명치신궁의 입구에는 황거처럼 넓은 도로에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었고 이런 자갈이 사람들을 빨리 걷지 못하게 한단다.  하긴 늘 종종걸음치는 것이 일본사람들의 전통습관이니 모든 것이 이렇게 연관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나무 숲사이로 난 큰 길을 가니 두개의 거대한 삼나무 기둥에 일본 전통의 홍살문 같은 것이 서 있다.  혹자는 이 삼나무가 몇 개의 나무를 이어 만든 것이라 하나 자세히 보니 삼나무는 완전히 나무 한 그루였다. 이렇게 큰 나무가 있을까 하는 것은 하꼬네에 가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3살 5살 7살에 반드시 이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단다. 아마 정신적인 혼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리라.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 와 신사에 참배하고 그 해의 안녕을 비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떠 밀려 갈 정도라 한다. 나도 이미 몇 년 전 이러한 광경을 경험했던 터라 그 광경이 가히 짐작된다.  그리고 불교식의 시주를 동전으로 하는데 그 신궁앞에까지 가지 못하니까 동전을 던져서 신궁 주변의 기둥에는 동전 자국이 많이 패어져 있다.

 

신궁으로 들어가는데 왼편에 하얀 도포를 걸친 건장한 젊은이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신궁에는 전통 제례악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오늘은 제례는 기업인들이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모이는 행사라 한다.  들어갈 수 없었지만 멀리 제례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왼편에 전통 의상을 입고 제례를 드리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편에는 기업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검정양복을 입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엄숙하게 제주의 낭송을 듣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큰 북소리가 나더니 의식이 끝나고 제례자들이 일렬로 서서 걸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았고 그 사람들이 비를 맞아야 하는 마당으로 가로 지를 때는 일본 전통 우산을 하나씩 들고 가는 모습이 마치 내가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기도 했다.

 

모두 모여서 사진 하나 찍고 신궁을 빠져 나오는데 신궁 앞 선물 코너에는 운전기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커피나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위해 찾아 간 곳은 한국식당.  그러나 식당이 얼마나 조그마한지 한꺼번에 우리 많은 인원이 앉을 자리도 부족하여 겨우 겨우 끼어 앉아 식사를 해야만 했다. 

 

이런 조그맣고 좁은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 일본 사람들은 불평도 하지 않나 보다.  하긴 내가 일본 갔을 때마다 제일 여유로운 공간에서 식사할 수 있던 곳은 고속도로 휴게소 밖에 없었으니까

 

식사 후 인근 슈퍼에서 밤에 아내와 함께 마실 와인 한 병을 샀지만 매일 밤 따로 떨어져 자야 했고 매일 밤 합창단원들과 같이 회식을 하느라 결국은 그 와인아닌 포도 샴페인은 단원들끼리 마셔야만 했다.

 

오늘 밤에는 동경의 야경을 보기로 예정되어 있지만 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실내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를 찾았는데 일본의 신개척지구인 오다이바를 찾았다. 오다이바는 포대라는 뜻인데 이 곳에서 미국의 상선에 포 사격을 했던 곳이라 한다.

 

일본은 각 가정의 쓰레기가 처리가 바로 쓰레기 소각로로 통하는 압축펌프로 이송되어 한 곳에서 처리하는데 그 곳에서 나온 재를 매립하여 거대한 대지위에 만들어진 테마 파크식의 현대식 쇼핑센타와 놀이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오다이바로 가기 위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데 무지개 다리의 야경이 볼 만 했다. 도시는 다리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다리에 온갖 치장을 다 해놓는다 한다. 하긴 세계 어느 도시나 유명한 다리가 많다.  영국의 금문교, 샌프란시스코의 다리, 프랑스의 미라보다리나 퐁네프 다리,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 등등  우리나라도 근간에 들어와서 다리에 등을 밝히며 다리를 아름답게 치장할려 하지만 아직은 요원하기만 하다.

 

오다이바에 내려 대형 쇼핑몰로 가는데 비가 와도 우산없이 걸을 수 있고 햇빛도 받을 수 있도록 거대한 육교의 양 옆에 지붕을 해 놓았다.  어쩌면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갈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쇼핑센터로 향하고 있다. 

 

우리 일행을 쇼핑센타 안에 풀어 놓았지만 이 곳은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곳이라 모두 시큰둥하며 시간을 때웠다.  일행에서 빠져 나와 혼자 어슬렁 거리며 바다가 보이는 난간을 산책했다.  목조 난간에 있는 노천 카페에 많은 젊은이들이 쌍쌍으로 바다를 보며 음료를 즐기고 있고 그들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마치 미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라 유심히 쳐다 보게 되지만 일본인끼리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어느 문 앞에선가 많은 젊은이들이 줄을 지어 입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어 간판을 읽어 보니 라이브카페라고 써 있다. 이 들도 이렇게 라이브를 좋아하는구나.  아이들이 오면 좋아할 듯한 게임기의 대명사 세가코너가 있어 상당액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지만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없어 포기했다.

바닷가에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작은 규모로 세워 놓았고 난간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참으로 좋았다. 비가 와서 그리 붐비지 않고 깨끗한 공간들, 우리 나라 같이 열심히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도 별로 없고, 각 쇼핑코너의 뛰어 난 디스플레이가 마음에 들었다.

 

언제 시간 되면 아이들과 이곳에 다시 한 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모임 장소로 오니 모두 피곤한 눈치이다.

 

숙소로 돌아와 어제 밤같이 호텔의 지하 강당에서 연습을 할려는 계획이었으나 강당의 연습조건이 안 좋아 일찍 해산하기로 하고 헤어졌지만 이 밤을 그냥 보낼 위인들이 아니라 삼삼 오오 호텔 앞 공간의 의자에 둘러 앉아 한국에서 가지고 온 진로 팩소주와 각종 마른 안주 그리고 컵라면으로 11시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일본 여행 3일째

 

오늘은 공연하는 날.

어제 헤어지기 전에 지휘자님께서 오늘 공연을 위해 오전의 관광코스를 취소하고 싶다는 의견이 있어 단원들의 의사를 거수로 물었더니 모두 다 오전관광은 하고 싶다고 해서 스케쥴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아침에 식당에는 여전히 내가 먼저 오는 편이고 메뉴는 어제 그제의 한식이 아니고 토스트를 시켜 먹으며 외국에 나와 있는 기쁨을 아주 조금 누렸다.

 

오늘도 모두 오쓰로 인사하며 특히 무척이나 친절한 나이 지긋한 버스 기사가 오늘도 여지없이 밝은 얼굴로 일행을 맞는다.  매번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탈 때마다 인사하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오늘은 아침에 명치신왕의 황궁을 찾기로 했다. 이 곳에서 결혼식 예비 사진을 찍는 커플이 많다 하는데 오늘은 이른 시간이고 비가 와서 그런지 볼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의 역사에 유명한 사람 하나, 명치신왕, 메이치 황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시내를 통과했다.  동경시내를 통과하다 보니 지나 간 곳을 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명치신궁의 입구에는 황거처럼 넓은 도로에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었고 이런 자갈이 사람들을 빨리 걷지 못하게 한단다.  하긴 늘 종종걸음치는 것이 일본사람들의 전통습관이니 모든 것이 이렇게 연관되어 있다. 황거입구에 커다란 나무기둥이 양쪽으로 서있고 일본 천황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홍살문같이 생긴 것이 거대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나무가 너무 거대해 이게 혹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닌가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는데 완전히 나무 하나 그 자체이다. 이 나무가 삼나무이다.

 

수없이 많은 나무 숲사이로 난 큰 길을 가니 두개의 거대한 삼나무 기둥에 일본 전통의 홍살문 같은 것이 서 있다.  혹자는 이 삼나무가 몇 개의 나무를 이어 만든 것이라 하나 자세히 보니 삼나무는 완전히 나무 한 그루였다. 이렇게 큰 나무가 있을까 하는 것은 하꼬네에 가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아이가 태어난 후 남아는 33일 여아는 32일째 되는 날 포대기에 애들을 싸가지고 와서 명치유신께 보여야 한다.  그리고 3살 5살 7살에 반드시 이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아마 정신적인 혼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리라.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 와 신사에 참배하고 그 해의 안녕을 비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떠 밀려 갈 정도이다. 나도 이미 몇 년 전 이러한 광경을 경험했던 터라 그 광경이 가히 짐작된다.  그리고 불교식의 시주를 동전으로 하는데 그 신궁앞에까지 가지 못하니까 동전을 던져서 신궁 주변의 기둥에는 동전 자국이 많이 패어져 있다.

 

아울러 결혼 전에도 거의 이곳 명치신궁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일본의 결혼식 문화를 들은대로 옮겨보았다.

 

일본에서 공간적인 사정 때문에 결혼하객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피로연도 일인당 약 이만엔정도 비용과 결혼답례품도 개당 약 7~8천엔정도 소모되니 많은 하객을 부를 수 없고 대략 100명정도가 보통이다. 

 

신랑은 주로 검정옷과 흰 넥타이를 입고 신부는 주로 핑크빛이나 흰색의 기모노를 입는데 기모노 한 벌이 거의 2~300만원정도를 홋가하기에 무척 부담되는 비용이라 요즘은 렌탈해서 많이 쓰는데 그래도 한 25~30만원정도 주어야 한다. 학모양의 모자, 화장등을 모두 갖추면 무게가 거의 20~25키로그램정도 나간다. 

 

신궁으로 들어가는데 왼편에 하얀 도포를 걸친 건장한 젊은이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신궁에는 전통 제례악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오늘은 제례는 기업인들이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모이는 행사라 한다.  들어갈 수 없었지만 멀리 제례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왼편에 전통 의상을 입고 제례를 드리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편에는 기업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검정양복을 입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엄숙하게 제주의 낭송을 듣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큰 북소리가 나더니 의식이 끝나고 제례자들이 일렬로 서서 걸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았고 그 사람들이 비를 맞아야 하는 마당으로 가로 지를 때는 일본 전통 우산을 하나씩 들고 가는 모습이 마치 내가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기도 했다.

 

모두 모여서 사진 하나 찍고 신궁을 빠져 나오는데 신궁 앞 선물 코너에는 운전기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커피나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다.

 

비가 오니 가까운 곳에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실내에서 구경이 가능한 곳이 국제 포럼이라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곳으로 차를 돌렸지만 비는 주룩 주룩 내리고 찾아간 국제 포럼빌딩은 오늘 따라 대부분의 시설이 문을 닫아 놓았다. 그러나 그 규모나 건축물이 보통 이상이다.

 

일행 중 건축을 전공한 단원이 열심히 단원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사이를 가로 질로 혼자 빠져 나와 건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에 들어가니 한 눈에 천정의 설계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보았던 배 건조시의 빗살처럼 생겼다. 외관도 그렇게 유선형이고 천정은 채광이 잘 되게 되어 있어 비가 오지 않는 낮에는 굳이 조명을 이용하지 않아도 책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몇 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책을 보고 있고 그 건너편 지하엔 대규모 전시장의 공간이 있으나 오늘은 아무 전시회도 없다.

 

한 쪽 구석에서 실용디자인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어 들어가 보았으나, 그다지 전시물품이 많지 않고 특별한 이슈를 찾을 수 없어 그냥 나와 다른 곳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던 중 내 눈에 아주 높은 천정을 배경으로 일본의 사무라이동상이 커다란 활을 차고 서 있다.

 

일본의 역사에 무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머리를 그렇게 상투를 틀고 양쪽으로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 버리는 것은 워낙 전쟁을 많이 하고 사람을 많이 죽이다 보니 열이 머리로 올라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다. 명예로 죽을 줄 아는 사람들이기에 할복자살의 무사 최대의 명예로 아는

사람들.  전쟁을 위해 여자는 단지 소모품으로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기에 일본의 동남아 침략시에도 무사 아니 군인들을 즐겁게 해 줄 여자들이 필요했다. 

 

어쩌면 일본 여인들을 비하하는 근거없는 소문일수도 있겠지만 사무라이들이 전쟁 중 성욕을 느낄 때 상대하는 여자들의  옷 벗는 동작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가차없이 목을 베어 버렸기에 일본 여자들이 입는 전통의상인 기모노도 무사들이 유사시에 언제라도 손을 집어 넣을 수 있고 옷을 벗을 수 있기 편하게 디자인되어 있고, 펼치면 넓은 요와 방석이 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동상 옆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긴 경사면의 곡선이 좋아 사진 하나 찍으려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어 잠시 기다렸는데 가까이 보니 우리 단원이고 그 이어 줄을 지어 우리 단원들이 내려 오고 있다.

 

우르르 모여 사진하나 찍고, 밖으로 나서려니 굵어진 빗방울이 좀처럼 그칠 줄 모르기 비가 잠시 추막한 틈을 타서 버스로 내달렸다.

 

이제 공연을 위해 공연장으로 향했다.  비는 어제보다 더 쏟아 지고 모두들 관람객이 적을까봐 걱정들이다.  공연장은 전철역이랑 바로 통해 있어 굳이 자가용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배려되어 있다.

 

일본의 28개의 구 중에서 하나인 문경구의 공연장의 시설이 어느 정도일까 하고 궁금은 했지만 공연장에 들어 서는 순간 우린 모두 입을 벌릴 정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공연자 대기실로 들어가니 잘 정돈된 테이블과 의자, 옷걸이와 코인락커룸까지 때 하나 묻지 않았고, 부서진 기물하나 조차 보이지 않는다. 공연현황을 볼 수 있는 TV가 벽에 부착되어 있고 분장을 위한 거울까지 깨진 것 하나 볼 수 없다.  이럴수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구민회관정도로만 생각했고, 휑한 공간만 생각했는데 이 곳 시설은 완전히 서울의 에술의 전당 수준이다. 

 

대기실로 가는 복도에는 한국사람과 공연을 하니 이곳 저곳에다 간단한 한국말을 일본의 언어로 붙여 놓았다. 이런 배려까지 누가 생각해 낸 것들일까?

 

무대 뒤로 들어서는데 이곳은 간단한 공연장이 아님을 깨닫는다. 오페라가 가능할 정도의 넓은 공간과 각종 시설들, 예술의 전당 같은 모양의 객석.  우리가 제대로 걸렸다. 호락호락한 공연이 아님을 직감한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지휘자님이 이 곳은 공명이 잘 되니 작은 소리로 노래하라고 지시하고, 우리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노래하고자 했다.  우리가 리허설하는 동안 일본팀 파트너인 콜샹티의 지휘자가 우리 모습을 보더니 서 있는 간격이 너무 좁다고 조금 넓혔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사이 간격을 조금 떼었더니 금방 불만이다. 옆 사람 소리가 안들린다고..

우리가 모두 자신이 없어서인가? 자신있게 자기 음을 내지 못하는 우리들이 갑자기 초라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우리의 소리가 한국에서 연습하던 대로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겨우 겨우 우리 팀에게 할당된 연습을 마치고, 이런 시민회관에서조차 아주 편안하고 깨끗하게 꾸며진 공연자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공연자 대기실에는 하얀 의자, 하얀 테이블, 하얀 벽 그리고 하얀 옷장 겸 개인 사물함이 준비되어 있는데 개인사물함은 동전을 이용하여 열고 나중에 다시 열쇠를 반납하면 코인이 나오는 식으로 되어 있어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우리의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때는 대기실에서 단원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문을 잠그는 식에 비하면 너무 대조가 되기에 이런 것조차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를 보이는 건지..

 

우리가 처음 연습하고 나중에 같이 공연하는 3팀이 각자 맡은 시간씩 연습한 후 한 자리에 모여서 200명이 넘는 전체 공연 참석자가 다같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아리랑 솔로 부분을 일본 합창단의 단원 중 한 명이 한국발음도 정확하게 거의 전문성악가 수준으로 노래하기에 우린 모두 감탄했다. 

 

전체 모인 장소에서 내가 한국 합창단 대표로 인사하는 시간이 있어, 미리 준비한 대로 한국에 수입된 일본영화 중 하나인 러브레터의 인상깊은 장면인 주인공이 손을 모으고 산너머를 향해 오겡끼데스까? 하는 모습으로 인사말을 시작했던지 일본인들의 반응이 웬지 시큰둥.. 어? 이 영화가 이곳에선 유명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 영화를 볼만한 연령층이 아닌가?

 

박형이 내 인사말을 일본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하는 내 인사말에 내년에는 일본팀이 한국에 와서 같이 공연했으면 좋겠다며 한국으로 초대한다 했더니 박수가 우레같이 터진다. 

 

우리의 공연은 가히 살인적인 연주였다.  어쩌면 그리 연습 때와 판이하게 틀린지첫 곡부터 지휘자, 반주자, 노래 따로 연주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원래 어려운 곡이라 우리도 신경쓰기는 했지만 우리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우리가 듣기에도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인상과 함께 일그러지는 지휘자의 인상만이 정말 제대로 맞는 화음다웠다.

 

다행히 어려운 곡이 지나고 흥겨운 우리 민요를 노래할 때는 그런대로 화음이 제대로 맞아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 올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음이 찜찜한지 즐거운 표정이 아니다. 우리도 자칭 연주자인데 연주의 실패가 이렇게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줄이야.

 

우리의 연주 후 다른 연주팀 중 여성합창단의 공연을 객석에서 보았다. 거의 100명에 가까운 여성단원들이 노래를 하는데 나이가 할머니쯤 정도로 보이는 단원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거의 전 곡을 외워서 부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지휘자가 일본에서는 무척 유명한 사람으로 프로필로 기록되어 있다.

 

악우회라 불리는 다른 혼성합창단의 아마츄어 냄새가 많이 났고, 우리의 파트너 콜샹티는 혼성합창단이고 나이폭도 두터운데 아주 젊은 노래를 불러 주었다.  특히 헨델의 할렐루야를 편곡해서 춤으로 추는 모습은 가히 본받을만 했다.

 

마지막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좁은 무대에 빽빽이 올라가서 다같이 모여서 합동 공연을 하고 내려올 때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민족이 이렇게 노래 하나로써 전혀 의사나 감정전달이 쉬울줄이야.. 그 들이 아리랑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애절하게 부르는 화음이 그 모든 의미를 대신해 준다. 

 

그렇게 우리 부부합창단 최초로 한일합동공연은 끝나고, 우리는 비오는 동경의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버스에 몸과 마음이 피곤한 채 호텔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연주가 성공적이었던 실패작이었던 뒤풀이는 해야겠기에 호텔에 양해를 구해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을 장소만 빌리는 것으로 전세냈다.

 

레스토랑에는 다른 한 팀이 모여서 담소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우선 맥주라도 한 박스 있어야  단원에게 빨리 옷 갈아입고 내려오라 하고 기다리는 사이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일본 합창단 지휘자가 새빨간 페라리모양의 승용차를 몰고 호텔에 와서는 기린, 아사히등의 캔맥주를 잔뜩 내려놓기에 이러한 고마운 배려가 있나 하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는 급히 이미 객실로 올라간 단원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레스토랑은 우리 단원들이 편한 옷차림으로 내려오고, 한국에서 사온 각종 땅콩, 오징어등의 안주는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우리의 밝은 웃음과 이야기들은 온통 기분을 날아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본여행 4일째.

 

이제 모든 공식행사는 어제부로 끝내고 아침부터 모든 단원들이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체크아웃을 하느라 부산하다.  어제의 그 부슬비는 간 곳이 없고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모두들 속으로는 어제 비가 오지 않았어야 공연장에 사람이 많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만이라도 비가 안오니 무척 다행이라며 담소를 나눈다.

 

오늘의 일정은 도심의 좁은 호텔을 벗어나 후지산을 관광하고 저녁에는 온천에서 하룻밤 자기로 되어 있다. 

 

하늘은 맑고, 후지산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고속도로. 이미 몇 년 전 이 길을 가족과 함께 다녀보았기에 낯설지는 않지만 같이 가는 동료들이 많아졌기에 오늘 기분은 더 없이 좋다.  가이드가 어제 우리 공연이 무척 멋있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가는 길은 멀고 가이드의 이야기는 그치지 않는다.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지진.  지진은 수평과 수직으로 흔들리는 지진 두가지가 있는데 최악의 경우 10초에 6000명이 사망한 예도 있다.  일본의 지진은 약 70년 주기로 일어나는데 그 주기가 가까워 졌기에 일본사람들은 모두 불안해 한다.  지진과 아울러 동반되는 것이 해일이다. 해상지진일 경우 해일이 일어나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일본은 더 피해가 심하다. 

 

지진다음으로 화산, 아직도 폭발 위험성이 있는 후지산이 폭발할 경우 동경전체가 위험하다. 일본에서는 화산으로 오쿠시도라는 섬이 가라앉아 사라진 예가 있다.   용암이 흘러내릴 경우 용암의 속도가 시속 120키로 정도라니 웬만해서는 피할 재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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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여행기의 본질을 잃어 버린 것 같아 작성 중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