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72) Amarilli Mia Bella (이태리 가곡)

carmina 2016. 3. 3. 09:47

 

 

Amarilli Mia Bella (Giulio Caccini)

 

 

Amarilli, mia bella,
Non credi, o del mio cor dolce desio,
D'esser tu l'amor mio?
Credilo pur: e se timor t'assale,

Dubitar non ti vale.
Aprimi il petto e vedrai scritto in core:
Amarilli, Amarilli, Amarailli e il mio amore.

 

아마릴리, 내 아름다운 사람이여

오 내 마음의 달콤한 소망

당신은 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게만 생각해 주어요

그리고 만약 두려움에 휩싸인다면 내 창을 가져요

내게 가슴을 열어주세요

그러면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

아마릴리는 내 사랑이라고 말이예요.

 

1985년 해외 현장에서 돌아와 본사에서 근무하는데

회사 옆에 교회가 있어 그 곳에서 금요일 정오에

인근의 직장인을 위한 에배를 드렸고,

즉흥적으로 직장인들 중 찬양을 하고싶은 사람들이 모여

잠시 연습하고 찬양대로 예배시간에 봉사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본 내 직장 상관이 어느 날

내게 자신의 처제가 피아노 전공인데 소개시켜 주겠다며 제안했다.

그런데 미리 상관의 부인이 나를 먼저 만나보겠단다.

 

어느 날 저녁에 집으로 초대받아 갔더니

내게 노래를 시켜 보고는 그 다음 주에 동생을 만나보게 해 주었다.

이런...오디션에 합격한거네..

 

곧 이어 어느 토요일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면서

상관의 처제를 만났다.

작은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는 여자와 인사하고

시내 명동에 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대한음악사를 찾았다.

그 곳에서 우연히 본 그 다음 주 토요일에  

윤학원씨가 지휘하는 대우합창단의 공연.

우리의 처음 음악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평소에는 가지 않던 공연도 눈여겨 보고

주말이면 열심히 공연을 보러 다녔다.

 

때로는 여자친구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들어가 노래도 불렀다.

나는 주로 한국가곡을 부르고 

친구는 가끔 이태리 가곡을 불렀다.

그 중 제일 인상깊게 들었던 이 노래

Amarilli, Mia Bella

실은 내 애창곡이 아니고 아내의 애창곡이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친구는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아마 학창시절 이 노래를 부전공의 실기시험으로 선택하였기에

더 신중하게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의 그 노래에 내 인생을 결정해 버렸다.

 

음악이 우선되니 다른 환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버님은 고향에서 예식장을 경영하던 지방유지셨으나

장로님이신지라 주일날 예식장을 영업을 하지 않다가

어느날 뜻한 바 있어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사업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서울 변두리에서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님으로 시작했다.

 

조그만 상가 2층을 빌려 반은 교회로 반은 살림집으로

써야 하는 환경에도 내 결혼에 대한 결심은 결격사유는 되지 않았다.

당시 아내의 여동생도 대학생이었고

남동생도 군 전역 후 곧 대학생이 되었다.

또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 있었고..

 

아내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혼자 벌어 부모님 살림에 보태던 

그런 환경에 우리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부터

정말 장인어른에게 죄송스러운 환경이었지만 

나도 결혼을 앞두고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결혼자금을 한 푼도

지원받지 않기로 마음의 결정을 했으니 오히려 모든 것이 편했다.

서로가 부족한 환경속에서 결혼을 하니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어

결혼식은 최대한 아끼고 최대한 축소했다.

 

나는 그 전 해 사우디 현장생활 1년하느라 모아 놓은 돈으로

우선 결혼 몇 개월 전 부천의 조그만 주공아파트를 하나 전세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결혼 자금은 하나도 없었다.

 

결혼을 11월에 하기로 약속한 뒤로 신부에게 해 주는 겨울코트도

여름 백화점 세일에 미리 사놓았다.

가능한 양가 가족에게 주는 예단은 서로 없는 것으로 했다.

신부에게 줄 목걸이나 시계 등 패물은 내가 사우디 근무시

누구에게 줄지 모르지만 준비해 놓은 것들이 있으니 그것으로 대신하고

내 예물시계도 이전부터 차고 다니던 것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계를 차고 다닌다.

남들 다가는 제주도 신혼여행도 당시 처음 생긴 철도청 신혼패키지로

경주와 부곡 하와이를 선택했다.

부족한 것들은 결혼 후 하나씩 하나씩 마련했다.

 

결혼 후 나는 약 3개월 만에 다시 사우디 현장으로 나가 1년을 넘게

지내다 오니 모든 환경이 변해 있었다.

나도 국내 급여의 2.5배나 넘게 주는  해외 급여로 충분히 돈을 모았고

아내도 피아노 학원을 성황리에 운영하며 돈을 모았다.

 

그 시기에 내가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부부합창단에 입단하여

그 이후 평생 노래하며 사는 사람들과 인생을 같이 하게 되었다.

 

결혼 2년만에 전세 살던 집 주인이 부도를 내서 그 집을

어쩔 수 없이 떠 안고 샀지만 몇 년 지나 집값이 올라

좋은 가격으로 팔고 그 돈으로 우린 부천 중동에 기존 주택보다

평수가 3배나 큰 아파트로 분양받아 탄탄대로로 들어섰다.

내가 직장을 그만 둘 때 마다 더 좋은 직장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생활의 여유가 생겼다.

 

비록 신혼생활은 초라하고 신혼여행도 국내로 대신했지만

결혼 10년만에 둘이 배낭을 메고 미국으로 여행을 다녔고

그 뒤로도 가끔 둘이 해외여행을 즐겼다.

오히려 신혼 때 못간 제주도보다 미국여행을 먼저 한 셈이다.

 

남들처럼 직장에서 임원으로 진급이나 혹은

좋은 사업아이템으로 일확천금하지는 못했어도

주어진 월급과 아내의 수고로 이제까지 평온하게 살아 온 것 같다.

 

우리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아들도 딸도 모두 음악을 전공하게 되어 자기 길을 가고 있고

나는 아직도 음악 특히 클래식음악에 대한 사랑이 끝이 없다.

지금도 주말이면 가끔 둘이 피아노 앞에 앉아

두툼한 한국가곡집, 이태리가곡집을 펴 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서로 불러 보고 있다.  

 

아마 음악이 없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인생이 어찌 변했을까?

 

31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이 곧 다가온다.

올해는 어떤 이벤트를 계획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