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연재를 시작하며. D-1일

carmina 2016. 6. 6. 08:56


2016. 5. 18


독일에 유학중인 딸을 파리에서 만나 2박 3일의 일정을 보내고

나 홀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 지점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도시인

생장 피에드 데 포트 (생장)에서 가까운 공항인

비아렛츠로 가는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근처 IBIS Budget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혹시라도 늦잠잘까봐 알람을 해 놓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이미 충분히 긴장되어 있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스페인 북단을 동서로 횡단하는 산티아고 까미노 프랑스 길은

단 한 줄에 불과하지만 생장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까지는

서울 부산 왕복길이보다 긴 약 800km라는 여정이다.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해서 나폴레옹길이라 불리우는 고도 1400m의 피레네 산맥길은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동안 눈이 많아 위험하니 먼 길로 우회하게 되어 있는데

올해는 그 길이 4월이 되어도 눈이 안 녹아 그간 통행을 금지시켰는데

불과 3일전 열렸단다.

마틴 쉰이 주연한 영화 'The Way' 의 설정 배경도 주인공의 아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다 조난당해 목숨을 잃고 아들 대신 아버지가

아들의 배낭을 유품으로 받아 길을 대신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개 사람들은 경치가 좋은 프랑스길을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이 길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정말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아니, 몸이 아파 갈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생기지 않을까 하며 지난 5년간을 수없이 고민하고 걱정하며

한편으로 그 날을 위해 도상으로 길을 숙지해놓고

관련된 책을 통해서 까미노의 역사와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읽어보고

인터넷 까미노 동아리 카페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준비했다.

컴퓨터나 카톡 배경 화면을 까미노 사진 모음으로 설정하고

마음의 준비도 갖추었다.

  

회사 형편이 안좋아 계약직으로 일하던 나의 퇴직이 3월로 예상되는 2016년 1월,

그간 모아두었던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유럽행 티켓을 예약해 놓고

막상 떠난다는 확실한 일정이 잡힌 후 부터는

회사 퇴직하게 된 것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었고

늘 철없이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당분간은 구직수당이 나오고 내년 부터는 연금이 나오니

내가 벌지 않아도 먹고 살 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퇴직 하자 마자 인근 마을 도서관에 가서 매일 매일 열심히

까미노 관련 책들을 읽으며 길에 대한 종교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관련 영화를 찾아 다시 한 번 보며 시간을 보냈고,

준비물 리스트를 만들어 틈틈히 장비와 도구를 사러 을지로 5가와,

가산디지털 단지 그리고 벼룩시장을 찾아다니며 도구들을 사 모았다.

 

거실 한 켠에 배낭에 들어갈 물건들을 널어 놓고 새로 산 40리터짜리 빨간 배낭에

넣었다 꺼내기를 반복하며 대략 몸무게의 10분의 1 정도로

배낭 무게 줄이기를 위해 노심초사하며 

앞으로 예견되는 일과 지속되어 일어날 사항들을 체크해 보는 기간동안

내게는 매일 매일이 가슴 설레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아파서 그만두는 최악의 불상사가 생기기 않도록

그간 다녔던 병원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여 충분한 약을 받아 놓았으며

필요한 상비약을 챙겨 두었다.  

산티아고 걷기 후 약 보름동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유명도시들을

여행할 계획이지만 준비물은 우선 걷기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른 아침에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 후 이지젯항공을 타기 위해

미리 인터넷으로 출력한 보딩패스를 가지고 바로 출국장으로 나간다.

이지젯은 보딩패스를 창구에서 발급받거나 짐을 탁송하면 비행기 요금정도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국내선 항공편이기에 탑승절차도 없이 짐만 검사 후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는데

한국인 부부가 인사를 한다. 역시 산티아고 행이다.

잠깐의 대화 중에 자신들의 세계 여행경력이 화려함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인근도시에 도착해 생장으로 가는 RER기차를 탈 수 있는 바욘역으로 를 가기 위해

버스를 공항 안내 데스크에 문의하니 나이 드신 안내원이

무척이나 친절하게 작은 쪽지에 써서 알려 준다.

그런데 한국인 부부의 짐을 보고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배낭이 아니고 트렁크를 끌고 오며 자신들은 매 코스마다 짐을

다음 코스로 보내고 배낭없이 가볍게 걷는다 한다.

트렁크 속에는 한국음식 취사를 직접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어느 날 나와 같이 숙소에 묵게 되면 닭도리탕을 해 주겠다 한다.

문득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RER역이 있는 동네 바욘은 참 한적했다.

버스기사에게 물어 역 방향과 마을 사람에게 정확한 역의 위치를 확인하고

넓은 아두흐강 건너에 있는 바욘역으로 가는 길은

이제까지 보았던 도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고풍스러운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바욘 역 앞에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나무의 가지가 하늘로 뻗지 않고 마치 화상으로 손가락이 다 문드러진

환자처럼 나무들이 뻗어 나가기를 멈추어 있다.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이 나무는 원래 이런 것인가?

역에는 배낭을 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어 역사는 금방

사람들로 붐볐다. 그 덕에 비둘기들고 역사 안으로 들어와 먹을 것을 찾는다.


티켓 자동발매기로 티켓을 발급받은 후  

한국인 부부와 나 외에 다른 한국인 아가씨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아직 출발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잠시 짐을 맡겨 두고 혼자 역 근처를 산책했다.

조용한 동네의 주택가 단지를 돌아 보며 왜 이들은 골목에 주차된 차가 하나도

없을까 궁금함을 느낀다.


아가씨들에게도 배낭을 봐 줄테니 잠시 산책하고 오라며 배낭을 들었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의 배낭이 너무 무거웠다.

마마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기차를 타고 가며 배낭의 무게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고

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아마 순례길 걷기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한참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두 칸짜리 예쁜 기차를 타고 가며 한 참 더 이야기해 주었더니 

나중에 이 아가씨들은 결국 짐 일부를 산티아고로 보내야 했다.]

그 외에도 약 7명의 한국인들이 기차를 탔다.

모두 들뜬 분위기로 정보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준비과정에 대한 무용담을 이야기하느라 웃음꽃을 피었고

어느 외국인 꼬마의 천진난만한 노래는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었다.


기차는 목장에서 한가하게 풀을 먹고 있은 말들과 양들이 있는 초원을 지나고

꽃이 보이지 않고 나무도 별로 없는 푸른 산 언덕들과

평온한 전원 마을풍경 속으로 1시간여를 달려 생장에 도착하니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모두 배낭을 멘 순례자들의 전형적이 모습이다.

모두 순례자 사무실로 가는 길을 익히 아는 사람들처럼

인적없는 깨끗한 마을길을 지나 바쁘게 한 곳을 향해 걷고 있다.

작은 마을를 횡단해 스페인문을 지나고 작은 강의 다리를 지나니

갑자기 마을 풍경이 중세 시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곳에서는 프랑스의 냄새대신 스페인풍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진 듯 했다. 


낮은 집 들 사이의 작은 언덕으로 가는 길은 자갈길로 만든 도로였고

그 옆에 줄지어 있는 집들도 오래된 낡은 아치형 대문으로 되어 있다.

도착한 시간이 한 낮인데 이 곳은 프랑스이지만 스페인의 전통을 따르는 듯

낮 시간에 모든 사무실과 상점이 문을 닫는다.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샬이라 불리우는 여권을 발급해 주는 사무실 앞에

배낭을 줄지어 세워 놓고 동네를 기웃거리다가

처음으로 스페인 일상음식인 하몽이 들어가 있는 보카디요 빵과

오렌지 하나 그리고 와인 한 잔으로

순례자의 전통적인 메뉴로 점심식사를 하고는

문을 연 순례자 사무실에서 몇 명의 호스피탈레로라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이 여권을 확인하며 만들어 주는 크레덴샬을 발급받을 때

호스피탈레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목적을 묻는 의례적인 질문에

나는 종교적인 이유와 여행의 두가지라며 체크했다.

알고 있는 바로는 이 길은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여행이라 하면

크레덴샬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 한다.

또한 걸어서 갈 것인지 자전거를 갈 것인지 확인하고 국적을 확인한다.

 

크레덴샬 외에 각 코스의 알베르게 정보와 고도 정보가 있는 안내서를 주고 

기부금 2유로를 내고는 옆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서

순례자의 상징인 커다란 조개껍데기인 일명 가리비를 골라 배낭에 묶었다.

자. 나도 이제 정식 페레그리노라고 불리우는 순례자 신분을 갖추었다. 


몇 몇 한국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55번 알베르게라 불리는 숙소에 들어 가

크레덴샬에 첫 스탬프를 찍고 아침을 포함한 비용 10유로를 지불했다.

넓은 방에 이층 철 침대가 6개 정도 있어 너도 나도 먼저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이런 방이 아래 층에도 있으니 수용인원이 몇 십명은 되는 것 같다.

우선 양말과 팬티 빨래 부터 해서 햇볕 잘드는 마당 건조대에 널고

혹시 바람에 떨어지지 않도록 옷핀을 꽂아 두고는

알베르게 앞에 있는 오랜 된 성채 산책을 나섰다.


고색창연하고 돌이끼 꽃이 가득한 돌담 밑에 먹을 수 있는 물이라며 쿡 누르면 물이 일정량이 나오는

급수대가 있는 곳을 지나 높은 돌벽이 길게 이어진 오붓한 길을 지나고

언덕을 올라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아래 마을에 지붕의 기와 색깔이 모두 같은

정겨운 마을과 하늘에는 서울에서 보기 힘든 맑은 하늘과 흰 구름을 보며 

앞으로의 내 순례길의 감동을 미리 예견할 수 있었다.

이런 멋진 자연 속을 30일 넘게 걸어야 하는 행복감이 벌써 가슴에 밀려온다.


그 높은 곳에 작은 축구장이 있고 아이들이 모여 공을 차고 있다.

만약 공을 잘 못 차면 공이 한없는 낮은 언덕 밑으로 굴러 가 버릴 것 만 같은 우려는

나만 갖는 것일까?


언덕에서 내려오니 많은 외국인들이 이 곳에 관광차 왔는지

몰려가며 여기 저기 구경을 하고 있고 마을을 오가는 코끼리 차를 타고

둘러 보고 있다. 이 곳에 순례용품을 파는 곳이 있어 사람들은 주로

나무로 만든 등산 스틱을 샀다. 나무 스틱 밑에는 쇠로 되어 있어

오래도록 사용하게 되어 있다. 길을 걸으며 많은 외국인들이

이 나무 스틱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한국인 몇 명과 함께 인근 까르푸 마트에 가서 저녁 먹거리를 사서

같이 나누어 먹고 내일 첫 길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직접 가서 확인하고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긴장감으로

어떤 이들은 배낭을 택배서비스로 보내겠다는 계획을 들으며

혹시 나도 그래야 하는가 하는 걱정으로 가슴 설레는 잠든 출발 전 날 밤,


저녁에 같은 방의 한국인들이 마을 성당에서 저녁 미사가 있으니

가보지 않겠느냐며 나에게 권하기에 따라 나섰다.

작은 성당에 여행객들 몇 명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데 천주교의 미사 형태를 모르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후에 앞 뒤 사람 인사할 때 악수하고

미사 끝에 신부님이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해 준다 해서 모두 둥글게

서서 축복을 받았다. 


저녁 10시면 알베르게 문을 닫는다는 규정에

모두 소리없이 침대위에 자신의 침낭을 펼치고 그 속으로

누에고치처럼 들어가 버렸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