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10일차 (산토 도밍고 - 벨로라도)

carmina 2016. 6. 10. 15:33



2016. 4. 28


산티아고 까미노는 내 버킷 리스트 10개 중 2번째 목표였다.

첫 번째는 내 책을 출판하는 것이었는데 4년전 국내 트레킹 후기를 모아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라는 서제로 출판했고

까미노의 염원은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2년전 모 대기업을 퇴사후 바로 까미노의 염원이 이루어지는가 했는데

바로 다른 대기업에 재취업되어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어둠속을 걷다가 문득 이 길이 맞나 의문이 가기에

그 새벽에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어느 직원엑 물어 방향을 잡았다.

도심을 바로 빠져 나와 무너진 오래된 집을 지나치며

왜 이런 것들을 그냥 두는지 10일동안 이 곳에 있으니 이젠 이해가 된다.

역사가 생계의 주된 원천인 이들이 굳이 이런 중세 유물들을 그대로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변을 따라 어둠속을 걷는데

앞에 혼자 가는 여성의 뒷모습이 아무리 봐도 한국인이다.

슬쩍 지나치며 물어보니 한국인이 맞다.

내 눈썰미도 모통은 아니다.

이 곳에 오니 한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인다.

중국인이라 일본사람이 거의 없으니 동양인은 거의 한국인이다.


길이 너무 어두워 흑기사 정신을 발휘해서 보조를 맞추어 줄려 하니

자기는 걷는 속도가 느리니 먼저 가라 한다. 아마 내가 천천히

걷는 것을 알아 차린 것 같다.


평평한 길을 한참을 걷다가 작은 언덕을 오르니 그 위헤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 십자가는 용감자들을 나타내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다.

산토 도밍고와 그라뇽지방의 사람들이 분쟁이 있었을 때

마을 대표가 나와 결투를 했다해서 그 자리에 이 십자가를

세워 후대에 알리고자 했다.


아무 표시도 없는 십자가를 보니 한국의 십자가가 그리워진다.

이제까지 걸으면서 모든 성당이나 길가의 십자가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만 봤는데 실제로 기독교에서는

그런 십자가를 교회에 세우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십자가의 뜻을 믿는 것이지, 굳이 피흘리시는

예수님의 형상이나 마리아와 요셉의 형상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이 의미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들은 주장한다. 예수님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가족도 중요하다고..

너무 종교적인 깊은 의미는 접어두기로 했다.


그 넓은 대지위에 십자가 하나 달랑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찼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조용히 찬송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렀다.


십자가 십자가 나의 죄 씻었네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십자가를 지나쳐 길을 걸으면서도 자꾸 그 십자가를 뒤돌아보며 걸었다.

하나님, 이 길을 지켜 주세요.

정말 많은 사랑을 느끼며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걷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강물 소리가 큰 오하강의 큰 다리를 걸으며

길을 1시간 반 정도 걸으니 멀리 언덕 위에 그라뇽 마을이 보인다.


아침 식사를 하고 싶어 카페라 써 있는 곳을 찾아 보았으니

카페 앞에 의자를 펼쳐 놓은 곳이 없다.

카페는 자신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는 표시로 반드시 앞에

의자와 테이블을 펼쳐 놓는 것이 보통이다.

어디선가 빵을 굽는 냄새가 나기에 먹을 곳이 있구나 하고

지나치는데 그 곳은 아침을 제공하는 알베르게였고

아마 숙박한 손님들을 위해서만 빵을 굽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마을 끝에 작은 테이블이 있는 곳에서

배낭 속의 빵과 요구르트 그리고 오렌지 쥬스로 아침을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혼자 차가운 의자에 앉아 아침을 먹는데 어느새 길고양이들이

옆에 와 물끄러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도 그 눈망울이 애처로와 빵을 떼어 던져 주니 고양이는

빵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아까운 빵만 버렸다.


거의 다 먹었을 때 쯤 한국 청년들이 뒤 따라 왔다.

내가 먹은 그 자리 아래에는 끝없이 넓은 평원에

순례자들이 걸어야 할 까미노가 구비 구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에 배낭대신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도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젠 대평원이 시작되는 것인가?

메세타 평원은 부르고스 이후에 있는 약 200km 거리의 평평한 벌판길이다.


끝도 안보이는 밀밭사이의 끝도 안 보이는 길을 걷다 보니

길 중간에 부르고스 지방과 레온 지방의 주 경계선 팻말이 크게 세워져 있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은 부르고스 주였고 앞으로 걸어갈 길은 까스티야 레온 주다.

산티아고까지 걷는 순례자들에게 주 경계선이야 아무 의미 없지만

걸으며 느낀 것이 주마다 문화가 달라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주 경계선을 지나 한참 걷다가 만나는 레데시아 델 까미노 마을에서

팔레리아를 다시 만나 무척 반가왔다. 그녀는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줄

알기에 내게 짧게나마 흥얼거리며 이태리 노래를 불러 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녀는 알고보니 이태리의 변호사였다.


작은 마을을 지나니 다시 밀밭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찾아왔다.

길은 다시 고속도로와 이어지고 까미노는 고속도로 바로 옆길이라

큰 화물차들이 순례자가 걷는 옆을 지날 때는 일부러 속도를 줄이는 것 같았다.


까스틸델가도 마을을 지나는데 같이 걷는 나이든 순례자들이 나를 사진찍으며

나보고 웃으라 한다. 아마 그들도 까미노 친구들을 기억하기 위해 노래하는

나를 사진 속에 잡아 두려나 보다.


마을마다 중간 쯤에 식수대가 있고 중세의 조각들이 그득하다. 나는

물을 늘 충분히 가지고 다니고파서 큰 수통은 배낭에 두고 작은 수통은

언제든 꺼내기 쉽게 허리색에 두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만

늘 무엇이든지 여유로 가지고 있길 좋아하는 내 습관 때문에 수통은

항상 그득 채워야 했다.


비오리아 마을로 다가가는데 이정표가 순례자들 보고 쉬어가라고 유혹 한다.

그 유혹에 넘어가 버려 비올리아 마을 벤치에서 신발을 벗고 땀에 젖은 발을

말리느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을 쉬었다. 젊은 청년들이 곧 내 뒤를

따라오고 쉬임 없이 스쳐 지나간다. 처음에는 잘 걷지 못하던 아가씨 한 명도

이제 제법 걷는 이의 포스가 느껴질 정도로 씩씩해 보인다.


가끔 쓸데없이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구글 위성으로 지구를 찍으면 산티아고 까미노의 푸른 벌판에

개미처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순례자일 것이다.

무언가 뚜렷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고 건물도 없는 황량한 벌판 길을

약 15km 정도 쉬임없이 걷고 있다. 이젠 서서히 발바닥의 통증도

사라지는 것 같다. 어느 순간 부터 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처음 보는 외국인이 있어 말을 거니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온 파르코라 한다.

이전에 포르투갈길을 아버지와 같이 걸었고

이제 산티아고를 혼자 걷는단다.

그는 4개국어를 달변으로 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와 영어

그래서 내가 포르투갈에 나와있는 한국 대기업에서

다국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을 우대하니 응시하라 했다.

그 뒤로도 파르코와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공장지대를 지나고 조금 더 가니 벨로라도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세계의 각 나라 깃발이 휘날리며 요란하게 선전하는

알베르게는 아무래도 마을 중심부와 거리가 멀어 안 좋을 것 같아 포기했다.

한 참을 더 가니 성당에서도 알베르게를 하는 듯 어제 길에서 본

한 쪽 몸이 불편한 남자도 그 곳에 여장을 풀었다기에 와이파이를 물어보니

안된다기에 지나치다가 마을 중심부로 나가니 특별히 알베르게라고  

써 있는 곳이 없어 두리번거리는데 중년의 한국인 두 명이 인사를 한다.

그룹으로 왔는데 초기에 다리를 다쳐 버스편으로 이곳으로 왔다한다.

다리를 보니 발등이 벌겋고 꼭 금방 곪을 것 같기에 항생제 드셔야겠다고

얘기하니 약국에서는 병원의 처방없이 항생제를 주지 않는다기에

얼른 내 배낭 약품통에서 항생제 몇 개를 꺼내 나누어 드리고

빨리 완쾌되기를 바랐다. 그 후 그 분들 얼굴은 보지 못했다.


성당의 건너편 벽에 십자군의 방패가 선명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이 곳에도 어떤 무용담이 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골목의 벽화에도

중세의 말을 탄 기사들의 모습과 순례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전 성당 근처를 지나치다가 아직 문을 본 깨끗한 건물의

El Corro 라는 알베르게가 생각나 발길을 돌려 그곳에 가니 문을 열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미리 온 순레자들과 기다리던 중 다른 처음보는 한국인 부부가

와서 인사를 한다.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한국인 여자가 들으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기에 할머니가 간 후

스페인어를 아느냐 물어보니 전혀 모르는데 그냥 들어 주었단다.

그런데 들어 주는 표정이 참 우아했다.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첫 눈에

인텔리임을 느꼈다.


접수하는 곳에 작은 한국 태극기가 달려 있고 각종 안내를 한글로

써 놓아 이 곳에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것 같았다. 방이 깨끗하나

천정 중간에 횡으로 걸쳐진 커다란 통나무가 있어 그 안에 있는 침상으로

들어갈 때 머리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 했건만 나는 그 안에 있는

일인용 침대가 욕심이 나 그 자리를 얻고 그날 밤에 크게 한 번 부딪혔다.


문득 주방과 응접실이 겸하여 있는 곳에 기타가 보였다. 그리고는

집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나 이제 막 잘라야할 내 손톱을 오늘은 필요할지도

몰라 그냥 두기로 했다.


빨래를 해서 널고 마을 산책을 하다가 다른 알베르게에 체크인 한

한국청년들을 광장에서 만났다. 그 중 남자 한 명이 다리가 불편해

병원에 가느라 두 단계를 건너 띄기로 했다며 안타까워 한다.

그 들에게 마트가 열기를 기다려 시원한 맥주 한 팩을 사서 나누어

주니 앉은 자리에서 이야기들이 끝이 없다. 조금 속도가 늦던

제주 아가씨들도 이젠 탄력이 붙은 듯 잘 따라와 합세를 했다.


동네를 산책하다가 보이는 성당 뒤에 조금 이상한 것을 보았다.

성당 뒤 산에 동굴을 파고 살림하는 집들이 보였다.

아마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살은 듯 동굴은 전혀 수리한 흔적이 없고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옷같은 것들이 보였다.


저녁 식사는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예약하여 순례자 중

약 8명만 테이블에 둘러 앉아 샐러드, 생선요리와 와인을 즐기고

이야기하다가 기타를 가지고 와 내가 리드하여 각 나라 노래들을 즐겼다.

독일인, 영국인, 미국인, 이태리인, 호주인, 한국인등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각 나라의 전통노래를 하는데 유독 내 옆에 앉은 74세의 이태리의

이지노라는 남자가 이태리 가곡들과 미국 팝송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굵직한 베이스로 잔잔히 노래하는데 나랑 참 잘 어울렸고

내가 아는 외국노래들도 그 분은 거의 아는 편이었다.

이때부터 이지노씨와 자주 같이 어울렸다.

끝나고 나니 한국 여자분이 내게 기타 하나로 좌중을 휘어 잡는다며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좋아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내가 즐기던 싱어롱의 시간을 국제적으로 가졌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