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12일차 (아헤스 - 부르고스)

carmina 2016. 6. 10. 20:51



2016. 4. 30


아침에 살짝 알베르게를 빠져 나오려는데

문 앞에 까미노 첫 날 부터 같이 길을 떠난 한국인 부부가

커피를 끓이고 있으니 마시고 가라며 친절을 베푼다.

고마운 사람들.


오늘 따라 왠지 찜찜한 기분이다. 길을 나서면서

무언가 놓고 온 것같은 불길한 느낌으로 어둠 속 길을 걷다가

문득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이정표가 없다.

어제 오후에 당연히 길이 이어질 줄 알았기에 마을 길로 나섰는데

벌써 10분이상 걸어 왔는데 잘못된 길을 더 걸으면

나중에 더 큰 실수가 있을까봐 되돌아 가다가 보니

어느 남녀가 이 길로 오고 있어 물어보니 이 길이 맞을 것이라며 확신한다.


그래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되돌아 가며 마을 근처 길가의 사물들을 보니 내가 그냥 지나 친 노란 화살표가

작게 그려져 있다. 이런 노이로제는 필요한 것인가?


한참 차도를 걷다 보니 조금씩 먼동이 트고 길가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판이 있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선사시대 유적지 표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선사시대 인류의 흔적이라 하는데 특별히

잘 관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도로를 따라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아타푸에르카 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온다. 팔레리아가 터번을 쓰고 인사를 한다.

아침에 머리를 못 감아 터번을 썼단다.

어제 아헤스에서 숙박하지 말고 이 곳에서 숙박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를 남겨 본다. 어제 아헤스는 순례자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어지는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팔레리아 일행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고

나는 천천히 올라가는데 길 옆에 목장에 양 수 백마리가 풀도 없는 곳에서 모여 있다.

아마 밤에만 가두어 두는 우리일 것이고 날이 밝으면 다시 초원으로

나가서 신선한 풀을 즐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스페인의 가축들은 거의 신선한 풀만을 먹는 것 같다.

어디에도 사료부대가 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곳의

고기들이 맛이 있고 이들이 주로 샌드위치 사이에 넣어 먹는 하몽은

돼지고기의 넓적다리를 잘라 소금에 절인 후 건조, 숙성시켜서 먹는데

까미노 길을 걸으며 어디에서도 돼지 우리는 보지 못했다.

아마 돼지 사육은 냄새가 많이 나니 특별한 곳에서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것 같다.


언덕으로 올라갈 수 록 풍경이 아름다워진다. 넓은 벌판에 하늘의

구름이 그림자를 만들어 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멀리

햇빛이 비치는 곳의 언덕에는 풍력발전용 바람개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언덕 위에 아주 커다란 철로 된 십자가가 돌 무더기위에 솟아 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올라온 뒤를 바라보니 그야말로

참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라 찬양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 나왔다.

멈추어 서서 찬양을 큰 목소리로 부르니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모두 내게 박수를 치며 좋아라 한다. 그러면서 한 외국인 순례자가

내 옆에 오더니 자기도 그 찬양을 안다며 즐거워한다.


내 뒤를 따라온 한국 젊은이들 3명이 그 길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지나가 버리는 것을 카메라로 찍었더니 한 편의 작품같이 나중에

청년에게 전해주라며 보내주었다.


아침에 떠날 때는 바람없이 고요하고 푸근하더니 산을 넘으니

바람이 불고 추워진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평소같으면

패딩을 벗을 시간인데 오전 내내 패딩을 입고 다녀야 했다.


평원 저 멀리 큰 도시인 부르고스의 웅장함이 보였다.

이젠 내려가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한 길을 걸어 간다.

길 옆 저 멀리 무슨 공장같은 것이 보였다. 직장생활 36년의 경험으로 볼 때

화학공장은 아닌 것 같고 무슨 광물을 정제하는 공장같이 보인다.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평생 직장생활동안 거대한 정유공장이나

화학공장 건설과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하니 거의 믿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나는 예술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앞서가는 외국여자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흰 머리에 등산모를 썼는데 허리가 휜 것 같고 걷는 것이 조금 불편해 보인다.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이 곳에 온다.

앞으로도 정말 많은 순례자들의 기적이 이 곳에 있다.

까미노에 관한 책에 말도 되지 않는 전설적인 성자나 영웅 이야기들이 많은데

까미노를 걷다 보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어려운 조건의 순례자들이 걷고 있어

기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한쪽의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남자와 동행하는데

그 옆에 조금 퉁퉁한 체격의 여자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국적을 물으니 러시아란다. 그런데 가만히 대화를 들어 보니

이 여자가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불어를 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모국어까지 합치면 무려 4개국어를 하는 셈이다.


외국어를 잘하는 만큼 까미노가 즐거운 것은 당연하다.

적어도 영어는 충분한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고,

스페인어도 잘하면 여행이 편하고 이태리 사람들이 많으니

이태리어를 하면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도 고향에 가면 한국 대기업에 원서를 넣으라 했다.


한참 그들과 이야기하며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선생님, 무지개 무지개"

한국 젊은이들이 내게 무지개를 보라는 외침이다.

모자를 쓰고 긴 팔 상의를 입었기에 비가 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았지만

무지개가 뜬 줄을 몰랐는데 우편 하늘에 무지개가 아름답게 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대개 무지개는 아무 멀리 떠 있기에 무재개의 양쪽 끝을 볼 수 없는데 

현재 내가 보는 무지개는 일곱색깔의 티가 하늘에서 내가 걷는 옆 언덕의

밀밭까지 비쳐지는 것이 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그 이어짐은

내 몸에까지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무지개는 반원형이 아니고 원형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발견을 지나가는 이에게 알려 주니 모두 신기해 한다.

정말 오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비는 조금씩 내렸지만 이 정도는 맞아도 될 것 같기에 우비는 쓰지 않았다.

무지개를 바라보느라 어느 새 내 주위에 사람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아 까르데누에라 리오 피코의 알베르게 앞 벤치에서 쉬고 있으니 낯선 순례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그런데 대개 까미노의 마을은 한군데 모여 있고 조금 지나가면 전혀

주택이 보이지 않는 편인데 이 곳은 마을을 지났는데도 계속 집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마을이 길을 따라 형성된 것 같다. 잘 정리된 집들이 보기 좋고

집집마다 까미노의 길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또 한 번의 커다란 무지개를 보았다.

오늘은 하루에 두 번의 무지개를 본 기적적인 날이다.


낯선 두 여자를 따라 길을 걷다가 다리 위에서 이정표의 표시가 이상했다.

까미노의 이정표는 다리를 건너 직진하라는데

다리 끝에 누군가 돌멩이를 주워 표시해 놓은 이정표는

옆 길로 가라한다. 생각해 보니 돌멩이 이정표가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아

옆의 순례객들과 왼쪽 길을 따르기로 했다.

나중에 보니 산티아고 안내 책자에 이 길로 가라고 추천이 되어있었다.

원래 까미노 길은 거리도 길고 아스팔트길이가 걷기 힘들다고 표시되어 있다.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지는 긴 길은 오른편에 공항시설을 막은 철조망이고

왼편은 나대지였다. 비록 이정표는 없었지만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 간 흔적이 있어

안심해도 좋았다.


그 끝에 다시 마을이 나오는데 도로 앞에 까미노 이정표가 다시 보였다.

그러니까 아까 다리 건너 까미노 화살표는 이 곳까지 오기 위한

우회로였던 것 같다.


마을의 성당 꼭대기 철 십자가 아래 약간의 평평한 곳에 두루미가

집을 지어 살고 있어 신기했는데 앞으로 이런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니 공원에 작은 어린의 석고상이 있는데

아마 이 곳에서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 죽은 아이같았다.

을씨년 스러운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니 바로 큰 도로 옆의 샛길로

이어지더니 갑자기 바이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피코 강을 따라 걷는다. 마을 사람들인 듯 낚싯대를

든 사람들이 앞서가는데 손에 담배를 피고 있어 내가 걸음을 빨리 해

그 사람들을 앞질러 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은 부르고스 사람들의 산책로인 듯 많은 사람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혹은 편한 복장으로 길을 걷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피코 강물과 부드러운 흙길위에 운동하는 사람들. 이젠 곧 큰 도시가

나오겠지 하고 천천히 걷는데 이 길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


강폭이 넓어지는 곳에서 낚싯군들이 여기 저기 옮겨가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고 주말에 산책나온 가족들이 강물의 오리에게 무언가를

던져 주고 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이 다리 아래에서 보였다. 마트용 카트가 누군가 끌고 가다가

놓친 듯 강물에 거꾸로 쳐 박힌 채 걸려서 바퀴를 하늘로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길이 이어지는데 너무 긴 길이라 지쳐간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그럴 것 같다. 어느 정도 가다가 강을 건너 도시로 들어가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 길이 끝이 없다. 이게 도대체 몇 km나 될까?

시간상으로 볼 때 거의 10km 정도 되는 것 같다.


강물이 좁아지고 더 이상 산책로가 이어지지 않을 때 쯤

다리를 건너 도시로 들어 갔다.

이제까지 10일 넘게 도시 다운 도시를 보지 못해서인지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이제야 문명의 세계로 돌아왔다.

도심에 들어서도 한참 복잡한 시내를 가로질러 골목을 지나니

눈 앞에 거대한 성당이 보였다. 그 옆에 알베르게가 있었고

순례자들이 접수를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순례자들은 아는 얼굴들이 올 때마다 환호를 질렀다. 나도

다른 외국인들 까르미나 라는 소리를 들으며 줄을 섰다.

내 앞에 낯모르는 중년의 두 여자가 나보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까르미나라고 했더니 내 이름를 루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자기들도 리투아니아 사람들이라며..


처음 보는 남미형 얼굴의 부인이 있기에 물어보니 멕시코란다.

멕시코네 내가 국영석유회사인 페멕스와 업무가 있어

자주 갔다 했더니 요즘 페멕스의 공장 하나 폭발해 안좋다 하기에

나중에 검색해보니 다행하게도 우리 한국회사가 건설한 공장은 아니었다.


시설은 좋은데 와이파이가 안되어, 어쩔 수 없이 바로 앞 카페에서

맥주한 잔 마시면서 와이파이를 이용해야만 했다.

모든 시설이 순례자 개인을 위해 잘 준비되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전기 콘센트와 개인 벽장과 화장실 등..

알베르게가 크다 보니 모든 순례자들이 다 이곳으로 들어 오는 것 같다.


여장을 풀고 시내 구경을 나왔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있는 듯 정장의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고, 대성당 앞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사진을 찍고, 관광객들이

몰려 다녔다. 무척 큰 성당이기에 일부러 순례자 용 반액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았다. 정말 거대한 성당이었다.

구석 구석에 수없이 아름다운 조각품과 성물과 무덤과 각종 교황의

역사에 대해 표현되고 있었다. 대성당 앞에서 우두커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성 밖에서도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 다니지만 강 건너편 마을은 조용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한국인 부부가 이것 저것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와서는

같이 먹자고 하는데 와인을 한 병 사오고는 남편이 치킨을 먹고 싶어하는데

치킨이 없다기에 내가 얼른 뛰어 나가 길을 가다 본 치킨집에서 닭다리 몇 개를

튀겨 왔더니 무척 좋아라 한다.


주방에서 처음 보는 한국아가씨를 만났다.

교사 퇴직 후 이 곳에 와서 하루 40km씩 걷는다.

혀를 내 두르고 말았다.


부엔 까미노